〈 141화 〉 2105. 시온 자작령 7일차.
* * *
2105. 시온 자작령 7일차.
2페이즈 돌입한 직후. 나와 윤흠서는 병력을 나뉘어 따로 후퇴하기로 했다. 피난을 담당하고 있는 영지병들과 수인 아이들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길목마다 디버프의 영향을 받은 광인들이 튀어나와 이빨을 들이대고, 본색을 드러낸 교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우리 목숨을 위협한다.
나는 광인 하나를 베어내며 말했다.
"라나! 아이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야 한다!"
"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라나를 제외한 피난조는 대부분 영주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라나는 막 피난을 마친 주민의 부탁을 듣고 아기를 구하러 왔을 뿐이라고. 지금의 나는 혹시나 낙오자가 있는가 확인하며 후퇴하는 것에 가깝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하하하하! 죽어라아!"
"공작님! 위에요!"
옆에서 라나가 말하기도 전에 위를 보니, 교인 하나가 광기에 찬 웃음소리를 내며 뛰어내리는 중이었다.
나는 곧장 들고 있던 엔크라테아의 끝에 마력을 압축시켰고, 교인이 내 앞까지 내려오는 순간 펑! 하고 터뜨렸다.
커헉! 소리를 내며 날아간 교인은 근처 민가의 벽에 박혔고, 내 빙창은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 짜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 이 쓰레기 새끼들.'
나는 이유 없이 그 시체에 화구를 날리고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악!"
"고. 공작님."
"하아... 아무것도 아니야."
"... 네."
내 뒤를 따르던 아일라와 라나, 다른 병사들은 나를 멍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교단이 이 마을에 어떤 쓰레기 짓을 저질렀는지 대충이나마 이해해버렸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이성'은 캐릭터마다 타고나는 부분도 있었지만, 환경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졌었다.
인간관계, 마력 고갈, 재앙과의 전투... 그 환경에는 여러 부분이 존재했지만, 시온 자작령의 해방 교단은 주민들의 생활 환경에 깊게 파고들었다.
가짜 기근을 이유로 모든 경제 활동을 금지하고, 집 밖으로의 출입도 금지했으며, 해방 교단이 배급하는 식량으로만 생활하도록 만든다.
이후 소도시를 비롯한 모든 촌락의 빈부격차를 인위적으로 벌린 뒤, 빈곤 계층을 핍박하여 부정의 마력에 노출되기 쉽게 유도한다.
도시 내 빈민가에서만 유독 광인들이 많이 출현하는 걸 보면, 이게 올바른 추론일 것이다.
또다시 내 앞으로 광인들이 나타나 달려든다. 뒤집힌 눈에는 흰 자만이 보이며, 침을 질질 흘린 채 손을 휘적거린다. 서로를 물고 뜯으면서도 다른 생명체를 찾아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내 옆의 아일라가 말했다.
"공작님. 마지막 거리의 수색이 끝냈습니다."
"그럼 저것들만 처리하고 영주관으로 간다."
"네. 그럼 제가..."
"너는 지금 마력을 아껴. 잠시 후에도 방어전을 벌여야 해."
"... 알겠습니다."
내 말에 아일라는 마지못해 뒤로 물러났다.
나는 마력 총량이 적어도 회복량만큼은 타고난데다, 엔크라테아가 있어 마력 고갈을 겪을 일이 적다. 하지만 아일라는 그렇지 않다. 그녀의 화력은 영주관에서 써야만 한다.
나는 또다시 날카로운 빙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을 무조건 즉사시킬 수 있을 정도로.
지금 내게 다가오는 저 광인들은. 어제만 해도 굶주림에 떨던 일반인이었을 것이다. 어제까지 갈 필요도 없다. 불과 반 시간 전만 해도, 나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성벽 위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저들을 죽여야만 한다. 저들을 죽여야만 내가 살고, 주변 사람들이 살고, 나아가 공주를 비롯한 모든 이들을 구해낼 수 있다.
나는 완성된 빙창을 목표물의 머리에 쏘아냈다.
그리고 수하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영주관으로 향한다. 전원 밀집 대형으로, 약자들은 중앙에. 내가 선두에 선다."
"예!"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게임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또다시 자각했다.
... 어떻게 이런 개 같은 세계관을 가진 게임이 히트를 한 건지. 참 어이가 없기도 하네.
* * *
시온 자작령으로 향하는 중인 어느 호화로운 마차.
그 내부에서는 두 여성... 아니, 한 소녀와 한 여인이 눈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거 참 우연히도 만났네요. 필로네님."
"그러게 말입니다. 아셰리아 공주님."
그 정체는 아셰리아 공주와 필로네 소피아.
시온 자작령을 '시찰'하기로 한 시하의 학생들과, '식량 원조'를 하러 온 필로네가 길목에서 만나버린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에는 스파크가 터지고 있다.
"영애께서는 꽤 서두르신 모양이네요. 소피아 령에서부터 이곳까지 직접 걸음을 옮기시다니."
"후후. 공작님께서 저를 믿고 부탁해주신 일인걸요. 거기다 왕국의 백성들이 굶주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서두르지 않을 수 없죠."
"수고하셨습니다. 시하 선생님의 휴가는 겨우 사흘밖에 남지 않았고, 식량은 저희 학생들의 도움으로 대부분 해결하셨지만요."
아셰리아의 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 길 오셨는데, 헛걸음하셨군요.'
사실 필로네는 아셰리아가 시하를 끌고 동관 정원에서 모습을 감춘 뒤로, 곧장 말을 타고 달려 소피아 후작령으로 향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마차가 아닌 말을 혼자서 타고 달렸다는 것. 다른 귀족 가문 영애들과는 다르게 어릴 적부터 직접 말을 타고 영지를 다닌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원래라면 닷새는 걸릴 거리를 사흘 만에 주파한 필로네는, 영주관에 도착하자마자 식량을 수배하고 호위대를 꾸려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 자신의 노력을 은근슬쩍 깎아내린다니. 눈앞의 이 괘씸하고도 귀여운 꼬맹이를 그냥 둘 필로네가 아니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식량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한데 공주님, 제게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공주님께서는 왜 시하 공작님과 따로 행동하고 계신 거죠? 분명 두 분은 함께 오셨을 텐데요."
"... 기근이 일어난 곳에 왕족이 함부로 얼굴을 내밀면 안 되는 법이죠.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돕는 게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함께 있지는 못하셨다는 거군요."
"뭐. 선생님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혼자 가셔도 그깟 기근쯤은 해결하실 분이시니까요."
애써 태연한 얼굴로 답하는 아셰리아. 하지만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던 것이 결정타였다.
'딱 보니. 공작이 따라오지 말라 했구나?'
그도 그럴 게, 필로네는 공주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 물론 그녀의 자세한 감정까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아셰리아 공주가 시하의 옆에 딱 붙어있으려 한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남의 맞선 상대를 데리고 사라진 그녀의 행동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으니까.
대화의 끝에 소소한 승리감을 맛본 필로네는 그 자리에서 낮은 웃음 소리를 흘린다.
"후후후. 시하 공작님께서는 학생분들의 걱정을 많이 하시나 보네요. 아셰리아 공주님께서도 그분을 믿고 계시고요."
"네. 두말하면 잔소리죠."
다 알아차렸다는 듯이 말하는 필로네에게, 아셰리아는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미소로 대적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다른 학생들은... 왠지 모를 한기를 느낄 뿐이었다. 물론 아샤는 제외하고.
눈치를 보고 있던 유나가 말했다.
"의부님의 맞선 상대셨던 필로네님이신가요?"
"의부님이라... 당신은 공작님께서 양녀로 들이셨다는 유나 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주님의 생신 파티에서 일어난 소동을 멋지게 정리하셨다고요."
"정리라 하기에도 과합니다만...."
"유니스 그 아이를 따라다니는 것들이 조금 유별나서 말이죠. 엄청난 일을 하신 거랍니다."
겨우 두 사람의 말을 돌렸구나. 유나가 안심하던 차에 갑자기 마차가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을 열자, 밖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나 아가씨이이이!"
"멈춰라! 이 마차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다!"
"빨리! 급하다구요! 유나 아가씨이이!"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보내주세요."
"아가씨이이..."
목소리의 정체는 클로에.
하지만 이상했다. 마차에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의부님의 수하들이 입는 에퀼리아제 방호복은 온통 흙으로 뒤덮여 있고, 그녀의 얼굴엔 풀에 베인 자국이 군데군데 나 있다. 게다가 오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린 건지, 베인 자국에서 나오는 피와 눈물이 뒤섞여 그녀의 고운 얼굴을 더럽히고 있다.
유나는 다급히 마차에서 내리자, 클로에는 그대로 힘이 빠져 유나에게 안기는 꼴이 되었다.
"무슨 일이에요. 클로에?"
"인환 조장님이... 공작님이..."
"인환...?"
유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혹여 잘못들은 건 아닐까. 서씨 집안의 괴짜. 활의 천재임에도 칼의 길을 걸으려 했던 자. 한때 혜세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무인의 이름이 클로에의 입에서 나오다니. 그가 전군으로 향한 계기가 첫 왕후였던 어머니의 죽음이었기에, 유나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름이다.
유나의 뒤로 마차에 있던 다른 이들이 내렸고, 그 중 아샤는 지친 클로에에게 강장제를 먹였다.
아셰리아는 유나의 상태를 살폈다.
"유나 언니. 무슨 일이에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정신을 차린 유나가 클로에에게 물었다.
"클로에.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인환이 어쨌다는 거예요. 의부님께서는..."
유나의 물음에... 클로에는 인환의 말을 떠올렸다.
'네가 가세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메디아 호수에 원군을 청하는 것이 우리의 승리다.'
그녀는 애써 울먹임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해... 해방 교단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