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2106. 시온 자작령. 7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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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 시온 자작령 7일차.
폐광 근처의 숲.
척후조의 승리 조건은 클로에가 메디아 호수에 도달할 때까지의 시간을 버는 것. 그 첫걸음은 교단 사제들은 전부 처리하는 일이었다.
첫걸음은 깔끔하게 해냈고, 이제 두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만이 남은 상태. 허나 인환의 생각에 그 일은 전혀 쉽지 않아 보인다.
옆에서 멍하니 서 있던 선재가 말했다.
"저게. 가능한 건가?"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주교 뵈브가 있었다. 뵈브의 몸에는 인환이 폐광에서 보았던 부정의 마력이 연기처럼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그 빛은 방패마저 물들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재앙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부정의 마력에 몸이 뒤덮이진 않고 있다는 것.
서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인재人災..."
"하지만. 인재는 저렇진 않잖아."
"마력에 잠식되긴커녕, 원하는 순간 부정의 마력을 끌어내 신체를 강화한다니. 있을 수 없어."
인환은 머릿속으로 활을 쏴볼까 고민도 했지만, 방패를 앞에 둔 채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뵈브에게 틈 따윈 없어 보였다. 부정의 마력에 미쳐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 보인다.
침묵을 지키던 뵈브가 말했다.
"그래. 메디아에 다른 왕족들이 있다고 했지..."
이내 그는 집게손가락만 세운 채 내밀었다.
"네놈들이 버텨야 할 시간을 알려주지."
"……."
"일반적인 고양이라면 메디아 호수까지 두 시간. 나는 저 고양이의 두 배로 달릴 수 있다. 그럼 네놈들은 한 시간은 버텨내야 한다는 게지.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보나."
세 사람은 뵈브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저 물음에 답해봐야 클로에의 행선지를 확인시켜주는 꼴일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지금 세 사람이 이곳에 서 있는 건 가능과 불가능을 따질 일이 아니다.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시간을 벌어야 하는 상황. 뵈브의 질문은 애초에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이루어줘야겠지."
말을 마친 뵈브는 지면에 박아뒀던 방패를 뽑아내어 달려들었고, 전투는 시작되었다.
부웅 그가 방패를 휘두를 때마다 바람이 갈렸고,
쿵 땅을 내려찍을 때마다 거대한 구멍이 생긴다.
척후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리 조절을 최대한 섬세하게 하면서 방패를 피하는 것뿐. 가끔 빈틈을 찾아낸 인환이 칼을 휘둘러 보지만, 그 위력이 모자란 탓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거대한 방패가 뿜어내는 중압감에 척후조의 정신력은 고갈되어 가고. 끊임없이 유지해야 하는 신체 강화 마법은 그들의 체력과 마력을 앗아간다.
그리고 한계는 찾아왔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서준이였다.
방패를 밀어내듯 쳐내던 그는 일주일 전 놀로 인해 생긴 상처가 터져버렸다. 이후 피 냄새를 맡은 뵈브는 곧장 서준을 밀쳤고, 방패 정면에 맞은 그는 나무 사이로 날아가 돌아오지 못했다.
나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을 때 기절이나 즉사.
그다음은 선재였다.
서준의 부재로 뵈브의 공격 주기는 짧아져 버렸고, 선재는 앞선 전투에서 체력을 소모한 탓에 지쳐버린 것이다. 방패 날은 칼로 빗겨 쳐 막았으나, 이어진 뵈브의 펀치로 공중에 떠버린 그는 머리부터 떨어져 버렸다.
"지금까지 8분."
그리 말한 뵈브는 인환에게 달려들어 방패를 휘두른다. 가벼운 공격은 처내고, 무거운 공격은 굴러서라도 피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인환은 버텼다.
'조금 전 화살에 담긴 마력도 무시할 수 없었는데. 칼마저 꽤 다루긴 하는군. 하지만...'
더는 평가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뵈브는 상대가 피할 수 없도록 방패를 빠르게 밀어 쳐 냈다.
"으억!"
폐의 공기가 빠지는 느낌을 받으며 바닥을 구르는 인환.
그는 한참을 구르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인환에게 뵈브가 고한다.
"포기해라. 네놈에게 가망은 없다."
"쿨럭!"
"동방의 수련법은 나 역시 알고 있다. 주교 중에 혜세국 출신도 있어서 말이야. 내 방패술 역시 네놈들이 말하는 '도'를 찾기 위해 고민한 결과지."
"……."
"내 방패를 뚫어내기 위해서는 네놈이 칼의 경지에 도달해야 할 터. 하지만 네 놈의 도는 활에 맞추어져 있기에, 감히 그 경지에 다다를 순 없을 것이다."
인환 역시 그 뜻을 알고 있다. 그가 전군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유정겸 장군이 자신에게 해주던 말 중 하나였으니까.
그에게 유정겸의 말이 스친다.
'네가 중검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제껏 네가 걸어왔던 길을 전부 잊어야만 한다.'
'특히 너는 지금껏 활을 다뤄왔기에. 지금까지의 도를 전부 뜯어고쳐 반대로 행해야 하지.'
바닥에 엎드린 인환에게 뵈브는 고한다.
"네 목숨은 고양이 하나와 바꿀만한 것이 아니다. 그년을 포기하겠다면 교단에 들여주마."
그 말을 들은 인환은 잠시 사고가 멈추었다.
한 단어가 그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길을 찾지 못해 헤메고 있을 뿐인 아이.
인환이 전군에서 길을 헤멨던 것처럼. 그 아이 역시 지금은 헤메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클로에가 자신의 도를 찾는다면, 그때는 훨훨 날아오를 것이 분명하다.
그런 아이를 '고양이 하나'라니...
그의 마음속에 잔잔한 불꽃이 일었다.
"호오. 근성 하나는 대단하군. 일어나는건가."
칼을 땅에 박으며 일어난 인환은 몸 상태를 확인한다.
전신의 근육이 아프다는 비명을 내지르지만, 다행히도 움직이지 못하는 근육은 없다. 아무래도 눈앞의 주교가 자신을 거두겠다는 욕망에 힘 조절을 한 듯하다. 골절된 부위가 있으나, 근육에 마력을 집중시켜 움직이면 억지로 뼈를 고정할 순 있을 것이다.
인환은 칼을 한 손으로 잡고 팔을 쭉 폈다.
"해보겠다는 게냐. 네놈의 칼로는 할 수 없다."
"... 닥쳐라."
"……."
지금의 인환에겐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남은 힘을 전부 짜내서라도.'
그대로 뵈브에게 달려드는 인환. 그 모습을 본 뵈브는 이 참격이 마지막 공격임을 직감했다.
그는 속에서 나오는 웃음을 뿜어내며 외쳤다.
"그렇군. 네 힘을 시험해보마. 와라!"
왼손으로 든 방패로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하는 뵈브. 방패는 여전히 불길한 빛을 머금고 있다.
하지만 인환에게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다. 다른 모든 인간을 농락하고, 무시하는 뵈브를 내려치겠다. 오직 그 마음뿐이다.
온몸은 칼을 쥔 오른팔을 위해 움직인다. 방패를 부숴버리겠다는 각오로, 칼에는 최대 출력의 마력을 휘감는다. 지금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공격뿐. 다른 것 따위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검은 어느새 푸른 빛에 휩싸였고, 인환의 모든 것을 집중시킨 한 방이 방패에 내려꽂혔다.
쿵
두 힘이 부딪혀 발생하는 굉음은 방패와 칼이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뭉툭한 둔기로 철문을 때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잠시 후. 쩌적 소리와 함께 주교 뵈브가 들고 있던 대형 방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금은 방패 전체로 확산하였고, 뵈브의 왼팔엔 뒤늦게 전해져 오는 고통을 느껴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방패는 부서져 내렸다. 뒤이어 방패를 잡고 있던 왼팔의 모든 혈관에서는 피가 터져 나온다.
"으윽...!"
낮은 신음성을 내는 뵈브.
'충격이 방패를 타고 흘러 들어오다니...'
그는 자기 앞에서 칼을 휘두른 자세로 굳어버린 인환에게 말했다.
"인정하마. 네놈은 경지에 이르렀다."
뵈브는 남은 오른팔을 인환의 몸통에 내질렀고,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어진 인환은 그 주먹에 맞아 한참을 굴러 나무에 부딪혔다. 폐에 충격이 전해진 인환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뵈브는 중얼거렸다.
"활과 상극인 길을 완성하다니..."
활을 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성과 균형. 하지만 중검의 묘리는 그 반대편에 존재한다. 온 힘을 단 한 번의 참격에 쏟아붓는 일격. 근력과 마력을 한 점에 집중해 터뜨리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이것 또한... 해방이겠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속에서 검은 마력의 검섬이 날아들었다.
"읏!"
뵈브는 만신창이가 된 왼팔을 강화하여 막으려 했으나, 그의 팔은 깔끔하게 잘려버렸다.
검섬의 주인은 검은 머리에 실눈의 소년이었다. 그의 뒤론 금발의 왕자와 동방인 소녀. 그리고 고양이 수인 하나가 뒤이어 나타났다.
기디언은 신속히 뵈브의 뒤를 잡았고, 알렉산더는 주교의 정면에 선 상황.
'에우데미아의 왕자. 프라시스 가의 자제. 벌써 증원이 도착한 건가. 내 계산 착오군.'
클로에는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있던 인환에게 치유 마법진을 대보지만, 그는 피를 토하기만 할 뿐. 가망은 없어 보인다. 애써 눈을 뜨고 상황을 파악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동방인 소녀가 칼 하나를 줍더니, 알렉산더와 뵈브의 사이에 섰다.
"당신이 여기 있던 사람들을 죽였나요?"
"... 그렇소만."
"……."
"유나. 차라리 내가."
"내가 하게 해줘."
저 말은 분명 뵈브를 죽이겠다는 뜻일 터. 왕국의 왕자도 아니고, 사대 가문의 자제도 아닌 일개 소녀가 감히 자신을 죽이겠다니. 뵈브의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마력으로 출혈을 억제하곤 있으나, 팔 하나를 잃은 상태로 포위당한 시점에서 패배. 그렇다면 저 주제넘은 꼬마 하나는 데려가야겠군.'
뵈브는 순식간에 동방인 소녀의 앞에 당도하여 하나 남은 오른팔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유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 역겨워."
뵈브의 주먹은 휘둘러졌고, 그 궤적은 소녀의 두개골을 박살 내기 위해 움직인다.
'능력이 없다면 죽어야지.'
하지만 그의 팔은 소녀에게 닿지 않았다.
유나는 그 주먹이 자신에게 닿기 직전에 고개를 틀었고, 동시에 뵈브의 남은 팔 하나를 잘랐다.
뒤이어 그녀는 뵈브의 양 허벅지와 무릎에 칼을 박아넣었고, 그 자리에 주교를 무릎 꿇렸다.
그리고 유나가 말했다.
"어떻게. 그런 참혹한 짓을..."
지금 유나가 화난 이유는 단순히 뵈브가 동방의 무인들을 해쳤기 때문이 아니다. 클로에가 알려준 머나먼 폐광. 유나는 이미 그곳의 참극을 명월시로 봐버린 직후였다.
그런 참극을 만든 주교를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기디언이 말했다.
"왕자님. 저희도 소도시에 합류해야..."
"아니. 일단 저 분을 최대한 살려내본다."
"하지만..."
"지금은 내 말대로 해줘. 기사단을 믿는 거야."
"... 네."
그 순간.
소도시 방향에서 붉은 불꽃이 하늘을 덮었다.
"저... 저게 뭐지?"
불꽃은 마치 회오리처럼 일렁거리며 하늘을 뚫을 듯 솟아올랐고, 이내 흩어져 사라져버린다.
양팔이 잘린 뵈브는 그 모습을 보고...광기에 찬 웃음을 흘렸다.
"으흐흐..."
"으하하하하!"
세 아이는 그 모습을 불길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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