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1108. 순백의 공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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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 순백의 공간에서.
푸른 들판 위에 홀로 솟아난 아름드리나무.
아담하지만 운치 있는 붉은 벽돌 오두막집.
그 둘 사이로는 샘물이 차오르고 있는 연못.
얼핏 보기에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너무나 큰 결점 하나 있으니.
푸른 들판. 아름드리나무. 벽돌 오두막. 연못.
그 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순백의 빛이 온 사방을 가득 메운 공간에서, 자그마한 들판은 외딴섬처럼 떠 있을 뿐.
'근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어있는 것치고는, 상당히 볼품없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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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간직한 마녀, 샤크티 프로네시스는 멍하니 연못 안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지난 200년 동안, 그녀가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온 일과 중 하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연못 주위에 검은 안개가 일렁이더니, 한 젊어 보이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 큰 뿔이 달려 있으며, 엉덩이에는 검고 뾰족한 꼬리가 나 있다는 점만 빼면 인간과 다를 게 없다.
주변을 가볍게 눈으로 훑은 그는 연못가에 앉아 있는 샤크티에게 말을 걸었다.
"샤크티. 또 그걸 들여다보고 있었냐."
"일어나셨네요. 미친 마왕님."
"... 너도 여기 들어온 지 어언 200년이지 않냐. 이제 '미친'이란 수식어는 빼줬으면 좋겠는데."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려 보는 마왕. 하지만 샤크티는 계속 연못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역사서에도 그렇게 적히신걸요."
"좆같은 역사가 새끼들. 누구의 희생 덕분에 발 뻗고 사는지도 모르고..."
"아마 대가리를 깨부수는 미친 마왕이었죠."
"... 넌 진짜 고리타분한 년이야."
"한결같다는 말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아. 그 말도 150년은 들은 것 같구만."
포기했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는 마왕. 이내 그는 연못 근처로 다가와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조금 위태롭긴 하네요."
"어디 보자..."
마왕이 수면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한 인간이 미쳐버린 인간들에게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한계군."
그 인간은 바로 표류자 이시하.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려는 그였지만, 마왕의 눈에는 한껏 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뭐. 상대가 탐식의 대재앙이니까. 나도 첫 번째 삶에서는 저놈 때문에 꽤 애를 먹었지."
"그때도 강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건 늙었을 때고. 어렸을 땐 다른 세계의 마족으로 전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렇다면..."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이웃들이 날 물어뜯으려고 하던 그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
몇백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 날의 기억에, 마왕은 잠깐 저기압이 되어버렸다. 샤크티 역시 괜한 것을 물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말을 아끼게 된다...
잠시간의 침묵.
…….
마왕은 갑자기 허공에다 원투 펀치를 날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 영감탱이가 준 기회 덕분에. 다음 생애에선 마왕 펀치로 놈을 때려죽일 수 있었지!"
"마왕 펀치라니..."
"하하하! 마왕 펀치! 마왕 펀치!"
"잠시라도 죄송함을 느낀 제 마음을 돌려주시죠."
"얼음장 같은 년이 죄송함은 무슨! 마왕 펀치!"
"하아..."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쉬는 샤크티.
장난스럽게 마왕 펀치를 남발하던 마왕은, 그런 샤크티를 보고 진중하게 말했다.
"이제야 표정이 좀 풀렸구만."
"... 네?"
"방금은 정말이지 굳은 표정이었다고."
매번 정신머리가 가출한 듯이 구는 마왕이기에 조금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진중한 면도 있었다니. 샤크티에겐 참 의외였다.
마왕이 말했다.
"샤크티 프로네시스. 근원에 도달한 네가 선택한 인간이다. 악으로 깡으로 믿고 버텨라."
"뭐라고요...?"
"이왕 저질렀으면 믿으란 이야기지."
샤크티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마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적들이 악인으로 선정한 인간을 빼돌려 소환하다니."
"……."
"그래도 네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사람 마음이 닫혀 있는 게 걸리긴 하지만, 그건 큰 문제는 아니고..."
마왕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사이.
돌연 공중에 순백의 연기가 맴돌더니, 그 속에서 중후한 목소리로 들려왔다.
"큰 문제가 아니긴!"
"아... 영감."
연기는 중년 남성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백발로 물든 머리칼. 바르게 정돈된 수염. 왼쪽 어깨부터 내려오는 하얀 천은 그의 몸을 가리고, 오른손에는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있다. 여러모로 그리스 철학자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그가 마왕에게 말했다.
"저것이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았을 텐데. 저놈은 일찍이 미쳐있던 놈에 불과하다!"
"할아방탱이. 저 아이가 살아온 환경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기원전에 넘어온 당신과는 다르게, 나는 저 아이와 같은 시대에서 넘어왔으니까."
"시대가 달라도 그 죄의 무게는 같다. 저 아이가 저지른 죄가 가벼운 것이더냐!"
"가벼운 건 아니지. 그런데. 그 꼴을 보고 가만히 있어야 했나? 살아남기 위해,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쳐야지."
두 사람 간에 시작된 언쟁.
하지만 그 대화는 샤크티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장 수면에 비치는 광경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인들의 끊임 없는 침공을 막아내던 시하가 옆을 돌아본 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방어선에 서 있던 한 견인족 소년이 팔을 물어뜯긴 탓이었다.
'저 아이의 이름이 루이라고 했었나...'
견인족 소년은 팔을 부여잡고 오열한다.
그 모습을 본 시하는 루이에게 달려드는 광인들에게 화구를 날리며 달려갔다. 검을 내팽개치고 회복 마법 스크롤을 환부에 대어보지만, 저 정도 상처에는 큰 효과가 없다.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게임에서도 그랬으니까.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여러 핑계를 대며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아군 피해는 점점 더 커지는 절망적인 상황.
나 따위가 해방 교단을 건드린 대가인 걸까.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았을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 사이로, 잊고 있었던 감정 하나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영감. 그런 상황에선 끝을 봐야 한다고.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미쳐야 할 때가 있는 거야."
"허! 사랑? 사랑 같은 소릴 하고 자빠졌군. 저것에게 그런 고귀한 감정이 있을 것 같으냐."
"……."
"저건 남의 표정을 보고 감정을 읽을 뿐이지. 공감 따위는 할 수 없는 놈이다. 그런 놈이 진정 사랑할 수 있겠느냐. 선할 수 있겠느냐!"
시하의 왼팔에 있는 불꽃 늑대 문양에 조금씩 붉은 빛이 돌기 시작한다.
옷 너머에서 빛나고 있어 주변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샤크티만큼은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문양은 자신이 새겨준 것이니까.
다른 병사에게 루이를 맡긴 시하.
이내 그의 시선은 재앙을 향하고.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저 아인 지켜야 할 것 정도는 잘 구별한다고."
"그래. 아직은 마음속 계율이 남아있겠지. 하지만 저 아이의 어미는 미친 짓을 한계다. 언젠가 제 어미가 쌓아 올려둔 정언 명령이 전부 허물어지는 순간, 저것은 큰 재앙이 될 것이야."
"할아범. 우린 그걸 패드립이라 부르기로 했어요. 자기 아이만큼은 정상적으로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 그걸 폄하해선 안 되지."
"하! 애초에 정상적으로 살지 못할 아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경멸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증오할 뿐이었으니까. 다시 말해서, 에코니아에서는 폭탄과도 같은 인간이란게다."
"우리 시대엔 뉴스에서 자주 나오는 일이라고."
"허나 정도가 다르지 않으냐."
"그건..."
시하의 검은 눈동자에 붉은빛이 감돈다.
에코니아에서 자신의 심상 마력에 중독된 인간은 저렇게 눈빛이 변하기 마련. 그가 평생토록 억누르고 있던 단 하나의 감정이 깨어나는 것이다.
'역시나... 비슷하네.'
사실 샤크티로서는 저 빛이 조금은 그리웠다.
먼 옛날, 자신의 약혼자가 저런 빛을 띠었으니까. 결국 그 마력에 먹혀버려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리운 사람이다.
시하를 보며 옛날을 회상하는 도중에도 샤크티의 뒤편에 있는 시조는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저런 폭탄 같은 놈을 뺏기보다는 더 나은 인간을 소환했어야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시조님."
"... 왜 그러느냐."
갑작스러운 샤크티의 부름.
아레트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해주실래요? 중요한 장면이거든요."
"뭐... 뭣! 이 녀석이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왕도에서 살 때 의선이 가르쳐줬어요. 영화관이란 곳에선 조용히 하는 거라고."
옆에서 마왕도 한마디 보탰다.
"틀딱 새끼."
"이놈이! 은혜도 모르고!"
"은혜도 500년이 지났으면 유통기한 끝난 거지. 그리고 나는 갚을 만큼 갚았어."
마왕은 한껏 내리 깐 어조로 말을 덧붙인다.
"사실 지금은. 그게 은혜였는지도 모르겠어."
"……."
시조는 잠시간 마왕의 얼굴을 바라봤으니, 그의 표정에는 수심만이 가득하다.
여기에서 더 말해봐야 누구의 상처가 더 큰가 후벼파는 싸움밖에 되지 않겠지. 오직 세 명 뿐인 근원 식구들이다. 제일 연장자인 자신이 나잇값도 못 했다는 사실을 자각한 시조였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연못 근처로 다가간 시조 아레트.
그는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는 둘에게 동참했다.
어느덧 시하는 광인들의 바다를 헤쳐가며 멧돼지의 재앙 앞에 도달한 상태. 이미 시하는 심상 마력에 반쯤 먹혀버린 터라,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저 엔크라테아의 검집을 통해 보이는 마력의 흐름을 따라가며, 지금 이 비극을 만든 원흉을 죽여버리겠다는 마음을 표출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 시하를 앞에 두고, 대재앙은 당황했다.
한낱 인간이 자신의 앞에 버티고 있으니까.
왜 자신의 마력이 통하지 않는 걸까.
어떻게 내 앞에서 저리 멀쩡한 거지.
하지만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하다.
힐데스비니의 심상은 결국 남의 것이니까.
아쉽게도 이시하라는 인간에게, 타인과 감정을 교류할 창구 따윈 대부분 닫혀버린 지 오래다.
그 집안을 공감하는 순간 상처 입으니까.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입힐 수 있으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 감정의 문을 닫았다.
공황에 빠진 힐데스비니가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엄니로 꿰뚫고, 불길로 뒤덮인 발굽으로 찍어 내리고, 은빛 몸통으로 부딪히려 한다.
하지만 힐데스비니의 공격은 시하에게 너무나 익숙한 패턴일 뿐. 모든 공격은 빗나가버린다.
그리고 힐데스비니의 치부, 배가 드러난 순간...
검붉은 마력을 머금은 회오리가 재앙을 관통했다.
"저 아이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조가 말했다.
"엔크라테아에 선택받은 것은 운명인가."
"... 그 사람과 닮았으니까요."
그에게 답하는 샤크티 프로네시스.
여기서 그 사람이란 정해져 있다.
저 검집의 전 주인. 샤크티의 하나뿐인 반려자. 시조 아레트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다.
"... 그렇지. 평생토록 감정을 이성으로 억눌러온 아이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걱정인게다. 이 세계의 심상은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쉽게 타락해버리는 계기가 되어버리니까. 감정에 익숙하지 않으면 그대로 곯아버리지."
창조주가 죽으며 이 땅에 남겼었던 저주.
그 저주는 아직도 세계에 흐르고 있다. 모든 심상이 타락하게 된 계기는 바로 그것이다.
시조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것만을 경계해왔다.
"괜찮을 거예요."
샤크티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시조님."
"왜 그러느냐."
"저희가 정한 선악의 기준은, 과연 옳았나요?"
"……."
"그 기준을 따른 결과로, 저희는 행복했나요?"
그녀의 물음에 아레트는 답을 할 수 없었다.
보편적인 선을 지키기 위해 희생했지만, 실상 이 세 사람은 전혀 행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탈진하여 바닥에 무릎 꿇은 시하를 보며, 시조 아레트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 아이는 행복할 수 있느냐. 저 아이가 품은 마음은 악에 가깝다. 엔크라테아가 그 힘을 억누르고 있다만, 언젠가 한계에 달할 것이야. 200년 전의 비극이 다시 재현될 수 있어."
"그렇죠."
"거기다. 에버마리가 굳이 저 아이를 소환하려던 이유는 뻔히 정해져 있지 않으냐."
"흐음..."
샤크티는 잠깐 고민했다.
자신이 기대하는 바는 있으나, 그 미래는 너무나 실현되기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망적인 것이기에, 일단 말해보기로 했다.
"방금. 저 아이가 공감할 수 없다고 하셨죠?"
"... 분명 그랬지."
"저 아이가 마음을 연 상대가 딱 셋 있어요."
"……."
이후 샤크티는 그 셋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말한다.
"하나는 동경. 하나는 모성애. 하나는 첫사랑. 그중 두 사람은 아마 더 이상 만날 수 없겠죠."
약지. 검지. 중지. 그중 검지만을 남긴 그녀는 살포시 연못의 수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걸요."
그녀가 말을 끝내자, 깨진 성벽 사이로 은발의 여자아이 하나가 뛰어 들어온다.
아레트 자신의 머나먼 핏줄.
이브의 피를 진하게 이은 아이.
그 아이를 보고 아레트는 코웃음 쳤다.
"허. 농담도 참 잘하는구나."
"농담은 아니었는데요."
"후우. 마력 아깝다. 나는 이만 쉬어야겠다."
그렇게 시조는 흰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마왕이 말했다.
"할배. 튀었네."
"뭐. 이해해드려야죠. 제 말을 듣고 한 가지 가능성을 상상하셨다면, 아찔해지셨을 거니까요."
"하긴... 초대 성녀를 똑 닮았을 거니까."
연못의 수면에는.
아셰리아 공주가 울며불며 선생님께 매달려 있다.
시하는 마력 중독에서 겨우 헤어 나온 듯하지만, 체력이 고갈되어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
"에이."
마왕은 그 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설마 쟤들이 여기 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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