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45화 (145/215)

〈 145화 〉 1­109. 불행한 꿈, 행복한 꿈.

* * *

2­109. 불행한 꿈, 행복한 꿈.

어린 시절.

나에게 좋은 기억 따윈 없는 방 안.

나는 또다시 어린 시절의 꿈을 꾸는 것 같다.

분명히 대학생이 되고 나서 악몽을 꾸는 횟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는데, 에코니아에 떨어진 뒤로는 꿈을 꾸는 빈도가 다시 늘어난 듯하다.

그런데 오늘 꿈은 조금 이상하다. 예전에는 꿈속에서 내가 보고 싶은 부분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내 시선이 자유롭다.

거기다...

'꿈속에서 이렇게 생각이 자유로울 수 있나?'

이런 꿈은 처음 겪는 일인데, 이게 자각몽인가 뭔가 하는 그거일까. 눈앞의 꼬마 시하는 나를 못 보고 있는데, 그게 참 기분이 묘해진다.

'... 지금이 언제려나.'

문득 떠오른 호기심에 좁아터진 나무 책상을 보면, 초등학교 시절에 쓰던 일기장이 놓여있다.

가까이 가서 일기장의 표지를 보면...

[2학년 4반. 20번. 이시하.]

2학년이면 아홉 살.

1학년 때 사귀게 된 소꿉친구의 태권도장에 다니며 조금씩 '정상적인 삶'을 배울 때쯤이다.

아버지는 도장 관장님. 오빠는 사부. 태권도 유전자가 넘치는 행복한 집안이었지. 그분들이 날 꽤 아껴주신 덕에, 소꿉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자고 온다던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 '진짜 가족'을 알게 돼버린 것 같다. 나 자신이 비정상임을 깨달은 것도 이때였고.

일기장에 손을 얹은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문밖에는 어김없이 그 소리가 들린다.

매번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괴물 하나.

"남편이 들어왔는데 이 여편네는 인사를 안 해! 애새끼는 또 어디 갔어!"

방문이 덜컥덜컥 돌아가는 게 보인다.

하지만 다행히도 문이 열리진 않았다. 굳이 이 문을 열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저 괴물에게는 쓸만한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 나를 지키기 위해, 잠자코 맞아야만 저 술주정이 빨리 끝나니까. 어머니는 마지못해 저 쓰레기에게 인사를 하러 나오신다.

그리고 시작되는 소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하다.

욕지거리를 늘어놓으며,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던지고, 피해자를 구석에 몰아둔 채 폭행한다.

정말이지 웃겨 먹은 사실은, 저 쓰레기는 함께 살고 있던 자기 부모와 여동생 년에겐 단 한 번도 손찌검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술을 안 마셨을 때는 효도한답시고 설쳐대는 인간이었지.

그 행동을 자신이 속해 있던 가족이 아닌, 자신이 싸지른 가족에게 향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 꿈은 언제 깨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방문에 등을 붙이고 있던 어린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는 문손잡이를 끼익­하고 돌린 뒤 밖으로 나섰고, 나는 그 뒤를 조심스레 쫓아간다.

그리고 거실 밖의 풍경은...

'이건...'

내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날.

구석에 몰린 어머니. 깨어진 유리 조각. 부서진 나무 의자. 모든 배치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의 나와 어린 나는 함께 시선을 이동시킨다. 그 시선이 이윽고 닿은 곳은 굳게 닫힌 안방.

저곳엔 망할 기생충들이 살고 있지만, 어린 내가 '행동'을 하고 나서야 방 밖으로 나올 것이다.

... 어린 나는 이제 주방으로 향했다.

저번 꿈에서는 여기까지 보다 구역질이 나서 깨버렸는데, 왜 이번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꿈도 여러 번 꾸면 익숙해지기라도 하는 걸까.

주방으로 따라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선반 문에 걸린 것들을 보며 고민에 빠진 어린 내가 있다.

이내 그는 작은 손으로 잡기에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한 후, 잠겨 있던 가스 밸브를 열어젖힌다. 그리고 식탁 위의 라이터도 빼먹지 않는다.

... 괴물을 죽이지 못하면 더 힘들어질 테니까. 가스와 라이터는 실패했을 때를 위한 보험이다.

괴물을 죽일 무기와 함께 죽을 수단까지 모두 챙겼으니, 어린 나는 이제부터 거실로 향하겠지.

아무리 어린 시절의 나라도, 저런 행동을 자연스레 떠올리고 행하는 걸 보면 조금 혐오스럽다.

'더 이상은... 보기가 싫네.'

다행일까 불행일까.

저 계획은 반만 성공할 것이다.

잠자코 맞고만 계셨던 어머니가, 기적 같은 힘을 발휘해 나를 집에서 데리고 나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린 내가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끝으로.

내 눈앞은 점점 어두워졌다.

.

.

방 안은 이미 어둠이 깔려 있고, 창밖으로 희미한 달빛만이 은은히 새어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여긴 또 뭐야...'

왕도 저택의 내 방도 아니고, 동관에서 얹혀살고 있을 적의 방도 아니고, 메디아 호수의 객실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긴 도대체 어디인 걸까.

그런 의문을 품고 상체를 일으키려 하니, 내 왼팔에 자그마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심코 내 왼편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고운 은실이 쏟아 내리고 있다. 달빛에 비치는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셰리아 공주의 머릿결.

그녀는 내 팔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물론 침대 위에 같이 누워 있다든가 한 건 아니고,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아 있다가 잠든 듯하다.

나는 그녀를 조심스레 불러보았다.

"... 공주님?"

"으으음."

그녀는 새근새근 숨 소리만 낼 뿐이었다.

'깊게 잠든 모양이네...'

그래도 한창 자라나야 할 어린이가 구부정한 자세로 자고 있다니, 이건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나는 공주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솜털처럼 가벼운 그녀를 들어 침대 위에 눕혔다. 이러는 중에도 몸이 축 늘어져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자는 것 같다.

"후우..."

이게 뭐라고. 애 하나 침대에 눕히는데 엄청난 긴장을 했더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 내가 여기 앉아야겠다."

공주가 여기 있다는 건 다른 호위도 있다는 뜻이겠지. 그럼 이 건물이 위험하진 않을 거고, 괜히 이 밤에 다른 사람들을 깨우기도 싫다.

그렇게 의자에 앉았더니, 방문이 열렸다.

"일어났어?"

"아. 헤르만. 근데 여긴 도대체 어디야?"

"시온 자작령의 영주관이야."

"영주관...?"

내가 멍하니 말을 흘리자, 헤르만이 조심스레 물었다.

"형님. 또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무슨 기억?"

"형이 어제 힐데스비니를 죽였잖아."

"... 아."

"뭐야. 이번엔 기억나는 거야?

"기억이 나긴 하는데..."

"나긴 하는데?"

"당장에 떠올리기는 조금 싫네."

"……."

어느 정도는 또렷하게 기억난다.

1페이즈야 아일라의 상급 마법과 연계해서 큰 피해 없이 넘겼고, 2페이즈를 대비하기 위해서 주민들을 피난시키고 영주관까지 후퇴했었다.

하지만 피난이 덜 된 탓에 광인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몰려와서 수비에 애를 먹었다. 그러다 루이는 팔까지 물어 뜯겼지...

그런데 이다음부터가 문제다.

여기서부턴 전날 꾼 꿈을 애써 떠올리듯이,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리듯이 희미하게 기억난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무언가가 내 몸속에 흐르는 느낌이었다.

내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길을 막아대는 광인들이 불타고, 계속해서 자리를 채우는 그들을 전부 다 태워버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끝끝내 힐데스비니의 앞에 서서는...

"맞아. 죽이긴 했지."

"……."

"내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고 해야 하나..."

정말이지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사실... 영주관을 방어하던 그 순간까지도 나는 광인들이 인간이라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루이의 팔이 살점째 뜯겨나간 걸 봐버린 그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전부 사라져버렸다.

내 머릿속엔 저걸 태우고 죽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을 뿐,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게 헤르만이 말했다.

"시하 형. 이제 위험한 건 안 하면 안 될까."

"... 왜?"

"그 증상이 뭔지는 알고 있지?"

"……."

모를 리가 있겠나.

나도 여기서 산지 반년이 다 되어가니까. 반년 사이에 공부나 수련도 많이 했고, 원래 알던 지식에 접목도 많이 시켰다.

지금 이 증상은 마력 중독.

마법서에는 심상 마법 적성이 떨어지는 사람이 걸리기 쉽다고 적혀 있었다. 여기에 마력 감응, 그러니까 게임의 이성 수치가 높은 사람이 한계 상황에 부딪혔을 때 특히 위험하다 했었지.

하필이면 둘 다 나한테 해당되는 말이다.

나는 최대한 웃으면서 말해 보았다.

"내가 정신력이 약한 건가? 하하하하..."

"형. 이제 위험한 짓은 그만하면 안 될까."

"……."

"나를 시키던가. 윤 대장에게 시키던가. 아일라에게 시키던가. 그러면 되잖아. 싸울 때마다 마력에 중독당하고, 그러다가 정말로 인재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려는 거야."

게임에서든 현실에서든, 헤르만이 저런 말을 하는 건 처음 본다.

그는 왕국의 그림자일 뿐, 어느 개인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없었으니까. 게임에서 알렉산더 호위를 맡은 것도 결국 왕국을 위해서였지, 알렉산더 개인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왕국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시종일관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며 일을 회피하는 게 헤르만의 원래 성격이라 해야 하나. 그런 그가 나를 걱정해준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헤르만. 걱정해주는 건 참 고마운데."

"고마운데...?"

"내가 그렇다고 가만히 있긴 힘들어."

"... 왜?"

왜.

정말 짧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전생에서 당신들이 나오는 게임을 했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공주님을 죽이게 되고, 결국 에우데미아는 쇠락해요.'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굳이 이 사람들이 가질 필요 없는 죄책감을 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하게 바라보도록 하는 건 올바르지 못한 일이다.

... 그래도 나는 거짓말은 하기 싫다.

"헤르만. 내가 상식적인 일만 시키진 않잖아."

"그래도 전부 다 도와주긴..."

"언젠가는 너마저 돕지 못 할 일도 생길 거야. 사실 너도 이미 하나는 알고 있잖아?"

헤르만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실 이번 일도 '상식적이지 못한 일'에 들어가니까. 거기다 혜세국의 제1 공주라는 시한폭탄이 있다는 것마저 아는 그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용납해준 거지, 그러지 않았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다.

"중독이야 여기 사람들이 안 걸리는 것도 아니고. 자연 마법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몇 번쯤 겪는 일이기도 하잖아. 설마 내가 인재로 변하겠어."

"그래도 형은 고위험군이라고."

"그럼... 오히려 남들 있을 때 걸려보는 게 좋을 수도 있지. 언제 내가 중독되는지 확실히 알면 대처하기도 쉽지 않을까?"

"... 무슨 귀족 가문에서 주량 알아보듯 말하네."

"뭐야. 귀족들도 그런 거 해?"

"혹시라도 파티에서 주사를 부리면 안 되니까."

나도 처음 대학생이 됐을 때, 동기들과 주량을 알아본다며 경쟁하듯 마신 적이 있었다. 그런 걸 귀족들이 한다니. 참 흥미로운 일이네.

슬쩍 화제를 돌리려 하는데, 헤르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그럼 적어도 하나는 약속해줘. 앞으로 전투에서 엔크라테아는 놓지 마."

"갑자기 왜?"

"소피아 후작 영애가 말해줬어. 엔크라테아가 마력 중독을 예방 시켜줄 거래."

"... 필로네가 여기 오기라도 했어?"

"식량도 잔뜩 들고 왔던데. 마크 테크니랑 사제 하나를 이대일로 때려눕혀서 끌고 왔다더라."

"진짜...?"

"내일 직접 고맙다고도 해."

"그... 그래."

역시 아카데미 수석은 허투루 딴 게 아니라는 건가. 필로네는 게임에서 정치력이 주로 주목받던 인물이었지만, 전투력도 꽤 강한가 보다.

그나저나 필로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나는 헤르만에게 물었다.

"근데. 나도 모르고, 검을 맡고 있었던 프로네시스 가문도 모르는 걸 필로네가 어떻게 알아?"

"소피아 가문의 심상 마법은 절대 진리를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이니까. 사람 마음만 빼면 모든 사실을 알 수 있어. 엔크라테아로 마력을 충분히 유지하고 있으면 중독될 일도 없어진대."

"... 그렇구나."

지혜의 눈이라는 거, 참 대단하네. 엔크라테아로 마력을 공급받는다는 것까지 꿰뚫어 보다니.

잘 생각해보면 어제 루이가 광인들에게 물렸을 때 엔크라테아를 손에서 놓쳐버렸었다. 정말로 그게 마력 중독의 원인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함부로 그 검은 놓지 마."

"알았어. 됐지?"

"에휴..."

내가 별 고민도 하지 않고 가볍게 대답하자, 여전히 못마땅한 듯 한숨을 내쉬는 헤르만.

그는 포기한 듯 말했다.

"나는 이제 자러 갈게."

"그래. 내일 보자."

정말 살포시 문을 닫으며 나가는 헤르만.

복도로 그가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그리고 뒤늦게 나는 한 사실을 떠올렸다.

'공주님이 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난 어디서...'

아무리 어린아이더라도 일국의 공주님이다.

한 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캔들이 났었는데, 한 침대에서 잤다는 소문이 나면 난 모가지다.

내가 이 아이를 그저 천진한 소녀로 보고 있어도 대중들은 내 변명 따위는 신경도 안 쓰겠지.

나는 그저 의자에 앉은 채로. 멍하니 아셰리아 공주의 자는 얼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참 평화롭게 자네..."

그러고 보면

내 마력 중독은 공주님 덕에 풀린 게 아닐까.

이 아이가 성벽 사이로 달려들어 오며 내 이름을 부른 순간, 그 뜨거운 느낌이 사라지고, 붉어진 내 시야가 맑게 갰기 때문이다.

그 후로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는데, 아셰리아 공주는 울며불며 내게 말했었다.

'왜 이런 위험한 곳에 오신 거에요.'

'저한테는 괜찮을 거라 하셨잖아요.'

'왜 선생님이 재앙과 싸우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괜찮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는 것 뿐이었다.

"후우..."

내 한숨을 듣기라도 한 걸까.

공주는 뒤척거리더니 잠꼬대했다.

"시하 선생니임..."

"저 여기 있어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가락을 아셰리아 공주의 손바닥에 가져다 대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는 도중에도 내 손가락을 살포시 잡았다.

'...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이미 잠도 다 자버려서 안 오고...

나는 그 상태로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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