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46화 (146/215)

〈 146화 〉 1­110. 후회와 결심과 화풀이.

* * *

2­110. 후회와 결심과 화풀이.

재앙을 토벌한 다음 날.

아침엔 내 방을 찾아온 아샤로 인해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 의자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사람에게 단도를 날리다니. 어떻게 된 인성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파란의 아침이 지나고.

나는 헤르만에게 지난날의 결과 보고를 받으며 임시 막사로 향했다. 유나가 그곳에서 할 말이 있다며 날 불러냈기 때문이다.

"일단 필로네가 그 폐광을 전부 조사해줬어."

"... 그렇구나."

"내가 조금만 일찍 갔어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주교가 척후조로 붙었으니, 어쩔 수 없던 거야. 아이들이 나타나서 뵈브를 죽여서 다행이지."

"하아..."

헤르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제 쓰러진 후, 그나마 현장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그가 다른 사람들을 조율했다고 한다.

메디아 호수에서부터 달려온 왕자 일행.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함께 왔던 호위대.

멀리 동쪽에서부터 온 필로네 일행까지.

그 사람들 전부를 지휘하면서도, 참혹한 현장을 상대하는 건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게 뻔하다.

"다 왔네."

"형. 클로에는..."

"알고 있어."

그렇게 도착하게 된 막사.

이곳에는 윤흠서와 클로에도 있었다.

헤르만이 차음 마법을 펼치자, 그들이 인사했다.

"시하 공. 오셨소."

"... 안녕하세요. 공작님."

윤흠서는 나와 유나 사이에 껴서 눈치를 보고 있는 느낌이고, 클로에는 멍해진 눈으로 손에 든 각궁만을 하염없이 보는 중이다. 아일라는 클로에의 옆에서 그녀를 걱정스레 보고 있다.

... 나는 이곳에서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 처지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묵을 깨고 유나가 말했다.

"의부님."

"왜 그러니."

"저에게 더 숨기고 계신 건 없으신가요?"

어제부터 사람들이 참 뼈아픈 질문을 건네온다.

아셰리아 공주를 시작으로, 새벽의 헤르만을 거쳐, 지금은 내 눈앞의 유나까지. 사람들 모두가 나에게 질책이라도 하는 느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에 벌어진 일이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던 터라,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말했다.

"당연하지. 비밀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잖아요. 저한테라도 말씀해주셨다면, 피해가 적을 수도 있었어요."

"알고 있어. 하지만 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너희에겐 전부 숨기겠지."

"대체 왜..."

"유나야."

"... 네."

내가 이름을 부르자, 유나는 마지못해 답했다.

나는 내가 하려 했던 말을 하기로 했다.

"그게 억지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않니?"

"……."

"윤 대장에게 전부 들었다면 이해했을 거야. 우리가 왜 이 땅에 왔는지. 전군이 왜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렇지 않니?"

"... 네. 알고는 있어요."

유나는 고개를 떨군 채 울먹이며 말했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제가 더 일찍 알았다면. 인환이 죽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 대재앙이 이 도시를 습격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다른 수많은 이들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나도 만약을 말할게. 그 사실을 알더라도 다른 아이들과 따로 행동할 수 있었을 것 같아?"

"……."

"그리고.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알고 있니?"

"... 해방 교단의 목적과 실체를 밝히기 위해."

"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세상은 과연 해방 교단이 저런 미친놈들이라는 걸 믿었을까?"

"……."

유나는 답하지 못했다.

이 아이 역시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알렉산더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에게 사실을 숨기고 행동할 순 없으리라는 것을.

직접 자기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해방 교단의 사악함을 믿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나는 게임 속 루트에 근거하여 말을 덧붙였다.

"만약 너희가 왔더라면 교단이 시온 자작령을 포기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때부터 교단은 왕실과 날 경계하며 활동할 거야. 세상은 교단이 적이라는 걸 믿지 않을 테고, 마크 같은 쓰레기 귀족들은 교단과 손을 잡겠지. 이건 혜세국도 마찬가지야."

"...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저것들은 전 대륙에 퍼져 있어."

나는 혜세국 DLC를 직접 플레이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 업보인 걸까. 내 바보짓을 미약하게나마 이어받은 놈들은 커뮤니티에 넘쳤고, 덕분에 DLC의 각 루트를 정리하는 글이 꽤 올라왔었다.

나는 공부로 바빴기에 글들을 직접 읽지는 않았었지만, 조금씩 들려오는 소식들로 해방 교단이 게임에 꾸준히 나온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기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교단은 이 땅의 흑막 중 하나가 아닐까.'

내가 큰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헤르만과 윤흠서도 내게 물었다.

"전 대륙이라니. 저것들이 더 있다는 거야?"

"시하 공. 그건 우리에게도 말하지 않지 않았소."

"확실해. 뵈브도 말했어. 주교 위에는 사도가 있다고. 그 위에는 당연히 대주교나 교주도 있겠지."

""…….""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이 없어졌다.

해방 교단의 주교 위에 더 높은 자들이 존재한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조용히 유나의 이름을 불렀다.

"유나야."

"... 네."

"너를 비롯한 모든 학생. 이 막사 안팎의 모든 사람은 내 테두리에 들어온 사람들이란다."

"……."

"인환과 선재도. 희생당한 다른 대원들도. 전부 내 테두리에 들어와 버린 사람들이었어. 나도 그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말하다 보니 내 속은 또다시 뜨거워지려 했다.

절제자 뵈브

마크 테크니

그 둘의 면상이 하나하나 떠오르고, 내 손으로 전부 죽여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는다.

'증상이 심해지긴 했구나...'

엔크라테아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청명한 마력이 내 몸에 돌면서 그 뜨거움이 식어 간다.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겨우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난 이곳에 와야 했어. 우리가 오지 않았더라면 이 도시는 머지않은 미래에 궤멸하고, 해방 교단은 자취를 감췄을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돌아오겠지."

"대의를 추구하기 위해 한 일이 아니야. 내 주변 사람들을 그딴 이유로 잃긴 싫어."

내 말에 천막 안은 더 고요해져 버렸다.

... 내가 숨기고 있는 모든 걸 이들에게 밝힐 순 없지만, 내 각오만큼은 밝히고 싶어졌다.

"지키기 위해. 나는 그 어떤 적이든 전부 없애버릴 거야. 해방 교단이든, 김원상이든, 썩어빠진 귀족 놈들이든, 전부."

"이건 내가 에코니아에서 살아가는 목표야. 여기 남을거라면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해. 절대로 날 후회하게 하지 마.자신이 죽을 것 같다면 여길 떠나도 돼."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될 대로 되란 심정이 강했다.

어차피 전부 죽으니까.

대충 살다 죽자는 생각이었다.

... 하지만 지금은 주변 사람이 죽는 게 너무 무섭다.

잠자코 있던 유나가 내게 말했다.

"의부님. 부탁이 있어요."

"말해보렴."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정도는 알려주세요. 절대로 아이들에겐 비밀로 할게요."

"... 알려주지 못 할 일은 많아."

"혹시. 제게 책임을 지우기 싫으신 건가요?"

"……."

이번엔 내 말문이 막힐 차례였다.

유나는 고했다.

"혜세국을 빠져나오는 그 순간에도 저는 남들을 희생시키기만 했어요. 하나뿐인 시녀는 제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 죽었고, 수많은 군인은 제 죽음에 분노하여 난을 일으키고 죽었어요."

"저하..."

"윤 부장. 저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니에요."

"... 예."

윤흠서의 말을 바로잡은 유나는 다시금 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의부님. 저는 더 이상 남들의 희생만으로 살기는 싫어요. 하지만 거기서 눈을 돌리는 건 더더욱 싫어요. 그러니 의부님께서 무언가 일을 벌이실 땐, 알려 만이라도 주세요."

"……."

나름대로 큰 고민을 하고 하는 이야기겠지.

유나가 무엇을 느끼고,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왜 저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렴."

"네."

"그래."

유나와의 말을 마무리 짓자, 이번에는 다 갈라져 가는 목소리로 클로에가 말했다.

"시하 공작님."

"왜 그러니. 클로에."

"저. 이거. 배우고 싶어요."

더 이상 빼낼 눈물도 없어 보이는 그녀가 내민 것은 인환의 유품인 각궁.

게임에서도 수인들로 하여금 활이나 총을 들게 할 순 없었다. 그 무기들을 쥐여주는 순간, 자존심이 상해버려 파티를 이탈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로에는 수인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활을 들려고 하는 것이다.

... 그만큼 충격이 크단 거겠지. 주변 사람들에게 듣기로, 척후조 사람들과는 정이 많이 들었다고 했으니까. 척후조의 세 명 중 인환과 선재는 사망. 서준은 중상이었다.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래. 왕도에 가서 적당한 사람을 알아볼게. 지금은 무조건 쉬어."

"네..."

"다른 사람들은 할 이야기 있어?"

다른 이들을 전부 돌아보니, 따로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일들은 전부 기사단에게 맡기고 쉬어. 윤 대장님.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전해 주세요."

"알았소."

이후 나는 헤르만과 함께 막사를 나왔다.

.

.

막사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는 필로네가 휘하 사병들과 함께 누군가를 끌고 오고 있었다.

그 정체는 마크 테크니. 그의 온몸에는 멍과 탄 자국이 가득하고, 재갈과 수갑이 채워져 있다.

나는 필로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필로네. 이번에 큰 도움이 되어주셨다고요."

"당연한 일이었죠. 몸은 괜찮으신가요?"

"덕분에 쌩쌩해요."

"그... 다행이네요."

필로네는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마크 테크니를 눈으로 훑으며 말을 아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필로네. 그 쓰레긴 왜 데리고 오신 건가요?"

"왕도로 이송하기 전에 공작님께 할 말이 있다고 성화여서요."

"그래요? 헤르만. 재갈 풀어줘."

어떤 개소리를 할지 참 기대가 된다.

헤르만은 내 눈치를 보더니 재갈을 풀어줬고, 마크 테크니는 당당한 어조로 내게 고했다.

"이시하 임시 공작. 당신이 이겼소."

"... 내가. 이겼다고?"

"그래. 탐식의 대재앙을 훌륭히 막아내고, 당신의 약혼녀를 불러 나를 무릎 꿇렸지 않소."

"……."

"역시나. 사도 후보를 이길 수 없었던 건가."

두 단어가 거슬리는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내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으니까.

엔크라테아로 응급 처치를 끝낸 나는 왼손으로 치유 스크롤 하나를 꺼냈고, 마크 테크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필로네. 잠시 그거 좀 빌려도 되나요?"

"갑자기 치유 스크롤은 왜..."

"그거. 잠시만. 빌릴게요."

필로네는 내 기세에 밀려 마크 테크니를 내 쪽으로 보냈고, 나는 그의 얼굴에 치유 스크롤을 대는 척을 해보았다.

그러자 마크 테크니는 말했다.

"패자에게 보내는 동정 따위 필요 없다."

"아직도 넌 자신이 명예로운 귀족인 줄 아는구나."

"……."

"나는 그저 화풀이할 돼지가 필요했을 뿐인데."

"무... 무슨!"

나는 그대로 그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억!"

"아픈 척하지 마. 마력은 안 실었어."

"윽! 억! 이 무슨! 으억!"

이게. 이기고. 지고. 따질. 싸움이냐고.

재앙을. 끌고. 온 게. 자랑이다.

화풀이하던 나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아. 왕도로 보내기 전에 스크롤은 써줄게. 헤르만, 필로네. 지금 벌어진 일은 전부 잊어요?"

"... 나도 같이 때려도 돼?"

"그럼. 당연하지."

나와 헤르만은 필로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엎어진 그의 얼굴에 연신 주먹을 날리고, 헤르만은 구둣발로 그의 몸을 밟아댔다.

내 뒤에서는 필로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못 본 걸로 할게요..."

마크는 추하게 지면을 구르며 신음할 뿐이었다

"어윽! 억! 윽! 그... 그만!"

"말이. 나오나. 보네. 더. 맞아!"

아무리 패도 내 마음은 풀리지 않는다.

이래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이미 일어난 일을 돌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나는 얼굴만 집중적으로 때렸다.

추하게 바닥을 구르며 처맞는 굴욕이 이 쓰레기에게 가장 큰 고통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범죄자 주제에 정신 승리를 해대면서 귀족 티를 내는 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나는 치유 스크롤로 회복시킬 수 있는 선에서, 마크가 죽지 않을 정도까지 때리고 또 때렸다.

... 정말 오랜만에 사람을 손으로 팬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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