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2111. 똑똑한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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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 똑똑한 바보.
힐데스비니 격퇴 후 사흘째.
원래라면 시하의 휴가 기간이 끝나 왕성으로 복귀해야 할 때였지만, 시하는 한 가지 이유로 인해 왕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시온 자작령의 영주관 집무실에서, 시하는 소파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셰리아에게 물었다.
"아셰리아 공주님. 갑자기 왜 그런 서한을 보내신 거에요."
"괘씸하잖아요."
"... 네?"
"교단과 함께 이런 참극을 꾸민 마크 테크니. 그리고 자기 아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테크니 후작가. 둘 다 괘씸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뒷수습을 직접 할 필요는 없잖아요? 어차피 카일 왕궁부장님도 오실 건데..."
아셰리아는 마크의 영지 관리 소홀을 핑계로 왕실과 테크니 후작가에 서한을 보내버렸다.
그 내용은 시온 자작령의 수습을 손수 진행하겠다는 것. 테크니 후작가로서는 왕실이 휘하 영지를 시찰하겠다는 선전 포고를 당한 셈이었다.
하지만 안건이 안건이다 보니 테크니 후작은 그 요구를 군말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아셰리아와 알렉산더는 직접 자작령을 감사할 권한을 얻었다.
하지만 시하로서는 상당히 어이없는 상황이다. 제자들이 휴가를 나와서는 자신이 일으킨 일의 뒷수습을 하겠다고 선언해버린 꼴이니까.
그런 시하에게 공주는 답했다.
"선생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다른 분들과 쉬시면 됩니다. 엄청나게 고생하셨잖아요."
"... 공주님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저는 공주님께서 다른 일까지 찾아서 하라고 휴가를 낸 게 아니라고요. 공주님께서 왜 굳이 일하시냐, 이 말이에요."
"……."
아셰리아는 그 자리에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녀가 이런 일을 벌인 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데, 그걸 이해해주지 못하는 선생님께 약간 화가 나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시온 자작령을 '시찰'하여 순식간에 자작령의 문제를 해결한 뒤, 조금이라도 더 선생님과 함께하는 휴가를 만끽할 생각이었다.
이 휴가 동안 아셰리아가 그토록 바라왔던 한 가지. '함께 메디아 호수 근처의 꽃을 구경하는 것'을 꼭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실패해버렸다.
시온을 습격해온 대재앙을 쓰러트린 시하 선생님은, 그 반동으로 이틀간 앓아누워 버렸으니까.
그 탓에 아셰리아는 이곳에 선생님과 함께 있을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묘수를 꺼내야만 했다.
'영지 감사를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고, 하루 이틀 정도는 메디아 호수에 들렀다 가는 거야.'
결국, 순수한 12살 여자아이가 자신의 작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 더 큰 일을 벌여버린 셈.
아셰리아는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말했다.
"선생님. 어차피 이 일은 왕실이 나서서 수습할 일이었습니다. 어차피 저와 오라버니가 맡지 않았다면 아바마마나 어마마마께서 오셔야 했을 거에요."
"아무리 그래도..."
"만약 그렇게 됐으면 저와 오라버니는 결국 두 분을 빈자리를 대신해 일을 했을 거고요."
"음..."
시하는 아셰리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일전에 시하가 벌였던 참관 수업으로 재상부와 왕궁부의 기강은 확실히 잡힌 상황이다. 하지만 왕실의 결재가 필요한 사안은 존재하는 법. 시하에겐 아셰리아의 주장을 뒤엎을 수단이 없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대신 그 폐광 쪽은 절대 손대지 마요. 공주님도, 왕자님도, 기디언도, 아샤도요. 거긴 나중에 카일 장관님이 직접 가면 되니까요."
"... 네."
"저도 도울 테니까. 얼른 끝나고 돌아갑시다."
그에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알렉산더와 기디언이 말했다.
"스승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이만 들어가셔서 쉬시는 게..."
어제는 홧김에 몸을 움직여 마크 테크니를 흠씬 패주었던 시하였다. 하지만 일시적인 흥분은 몸의 피로를 잊게 하는 법. 이후 시하는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다시피 잠들어버렸다.
그 탓에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에도 나오질 않았으니, 학생들이 그 사정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시하는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라는 듯이 말했다.
"제가 이곳 상황은 더 잘 알아요. 제 휴가지에서 학생들이 일하는데 제가 쉬면 뭐가 돼요."
"……."
이번엔 그의 말에 반박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들 안녕하십니까. 거의 두 주 만이군요."
영주 집무실의 문이 열렸고, 그곳으로 왕궁부장인 카일 티오리아가 들어왔다.
시하가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이네요, 왕궁부장님."
"아. 자네 몸은 괜찮은가?"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그나저나 빨리 오셨네요?"
"소식이 도착하자마자 밤낮없이 달렸네."
"그렇군요..."
"폐하께서 전할 말이 있다고 하셔서 말이야. 자네를 속히 왕도로 보내라 하셨어."
"... 네?"
예상치 못한 카일의 한 마디.
그에 시하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 저만요?"
"그래. 꼭 직접 전해야겠다 하시더군."
아. 올 것이 와버린 건가. 이번에 너무 큰 일을 허락도 받지 않고 저질러버린 탓에 가정교사 직에서 잘려버리는 건가.
온갖 생각이 드는 시하였다.
그의 옆에 있던 아셰리아가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하 선생님만. 왕도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카일이 말했다.
"폐하께서 자네에게 친히 할 말이 있다고 하시더군. 왕도에 도착하자마자 등성하여 후궁 응접실을 찾으라 하셨네."
"그럼 헤르만과 함께..."
"음. 아들 녀석은 이곳 사정을 내게 설명해주어야 하니, 내가 잠시 데리고 있겠네. 바깥에 승합 마차와 호위대도 준비해뒀어. 자네가 따로 데려온 수하들과 편히 귀환하게."
헤르만 제외. 다른 수하들. 승합 마차. 호위대. 카일의 말은 시하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혹시나 너무 큰 일을 벌인 탓에 숙청이라도 당하는 걸까. 진짜라면 다른 사람들이라도 도피시켜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시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관님께서 미리 언질 받은 내용이 있으신가요?"
"흐음..."
시하의 질문에 고민에 빠진 카일.
이내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원래라면 내게 귀띔 정도는 해주시는 편인데, 이번에는 따로 들은 바가 없군."
"...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해방 교단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뒤에야 그 말씀을 하셨지. 아무래도 교단과 관련된 내용일 수도 있겠어."
"……."
시하는 생각했다.
'설마 그 팔불출 국왕님이 해방 교단과 연루된 사람이겠어. 만약 그랬다면 날 시온 자작령 근처에도 보내지 않았겠지...'
그는 집무실에 모여있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스승님. 가면서도 몸조심하십시오."
"걱정 마세요. 어제는 일어나자마자 무리해서 그런거고,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시하는 그대로 자리를 나섰고...
아셰리아는 그의 빈 자리를 멍하니 볼 뿐이었다.
사실.
아셰리아는 이런 큰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왕도에 계신 부모님과 자신의 옆에 있는 시하.
그들에게 각각 한 마디씩, 두 마디면 됐었다.
"선생님과의 휴가를 조금 더 연장하고 싶습니다."
"호수에서 꽃 구경을 함께하자 약속하셨잖아요."
평소에는 영민하게 일을 처리하지만...
그녀의 선생님과 관련된 일만큼은 바보가 되어버리는 아셰리아 공주였다.
* * *
카일이 내 몸 상태를 우려한 건지, 마부는 평소보다 더 느린 속도로 마차를 몰았다.
그렇게 시온에서부터 사흘을 달려 도착한 왕도.
카일의 당부대로 곧장 등성하여 후궁을 찾아가자, 국왕 내외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자네 왔는가. 큰일이 있었다더군."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예보도 없었는데 탐식의 대재앙이라니. 몸은 괜찮으신가요?"
"저는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루시아 왕비.
사실 나도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적어도 지금 내 눈앞의 두 사람은 지금 당장 날 숙청시킬 분위기는 아니니까.
루시아 왕비가 내게 말했다.
"필로네에게 대략 전해 듣긴 했습니다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게... 전부 설명해 드리자면 깁니다만."
"괜찮습니다. 이건 선생님께 직접 들으려 했으니까요. 차근차근 말씀해주세요."
이후 나는 국왕 내외에게 밝힐 수 있는 선까지, 시온 자작령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말했다.
인위적인 면이 보이는 가짜 기근.
지방 영주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
어딘가로 납치당한 마을 주민들.
부정의 마력을 모으는 해방 교단.
마지막엔 힐데스비니의 출현까지.
내 이야기가 점점 진행될수록 국왕 내외의 표정에는 조금씩 그림자가 드리웠다.
"주교는 자기 위에 사도라는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번이 끝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후우..."
필레몬 국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먼저. 자네에겐 미안하게 됐네."
"... 네?"
"이 세상에 온 지 겨우 반년밖에 안 된 자네에게 안 좋은 경험을 시키지 않았나. 원래라면 내가 직접 나서서 처리했어야 해."
내게 돌아온 건 진심 어린 사과.
하지만 필레몬 국왕이 왜 내게 사과해야 하는가.
나쁜 놈들은 따로 정해져 있다.
"폐하.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나쁜 짓을 저지른 건 마크 테크니와 해방 교단입니다. 왜 폐하께서 제게 사과를 건네시는 겁니까."
"하하. 고맙구만..."
필레몬 국왕은 호탕한 듯한 웃음소리를 내었지만, 그의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말을 이었다.
"헌데.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시지요."
"자네는 내게 왜 해방의 의미를 물었던 건가."
"……."
"혹시 그 이유가, 해방 교단 때문이였는가."
... 지난 며칠 동안 주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만 내게 해대는지.
내가 고민하고 있자...
필레몬 국왕은 왕비에게 말했다.
"루시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 이미 말했었잖아."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보는 거지."
"내 뜻은 변함없어. 선생은 우리 가족을 위해준 사람이잖아. 믿어도 된다고 생각해."
갑자기 내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영문도 모른 채로 가만히 있자, 국왕이 말했다.
"에우데미아의 왕실 가정교사는 그 의미가 특별하다. 이 말은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네."
"... 네."
"지금껏 우린 자네를 반만 인정하고 있었어."
"……."
"자네는 가정교사로서는 합격이었네. 아이들에게 웃음을 되찾아주었고, 우리 가족을 화목하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하지만 왕실 가정교사로서는 부족했어."
반이라.
언젠가 왕비가 말하길, 나는 아셰리아를 위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용한 거라 했었지.
어찌 보면 `가정교사로서 합격`이란 말은 왕비가 말했던 것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국왕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날 따라오게. 자네에게 보여줄 곳이 있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