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48화 (148/215)

〈 148화 〉 2­112. 영 불안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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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 영 불안한 말

국왕이 나를 이끌고 간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내가 도착한 곳은 왕궁 본관의 알현실. 큰 축제가 있을 때마다 연회장으로도 쓰이는 이 거대한 홀에는 오직 나와 국왕뿐이다.

필레몬 국왕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발걸음으로 붉은 양탄자를 나아갔고, 옥좌로 이어지는 계단 위를 올랐다. 하지만 왕족이 아닌 이가 함부로 그 계단을 밟아서는 안 되는 법. 잠자코 그를 뒤따르던 내가 계단 아래에서 멈추자, 국왕은 뒤로 돌아보고 말했다.

"자네. 뭐 하고 있나?"

"그게..."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네. 어서 올라오게나."

"... 알겠습니다."

국왕의 채근에 나는 널찍한 단에 한 칸씩 올랐다.

'건국제를 제외하면 처음이네.'

그때를 제외하면 나 따위가 옥좌의 단에 오를 줄 누가 알았겠나. 왕실의 힘 그 자체를 상징하는 곳이다 보니, 부담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뒤편에 준비실이 있네."

내가 단에 오르는 걸 확인한 국왕은 왕좌 뒤편의 커튼을 젖히며 그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 저긴 게임에서도 못 가본 공간인데.'

준비실은 행사 때마다 왕족들이 잠깐씩 쉬는 공간인 듯, 휴식용 가구들이 꽤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존재가 있었으니. 내 키의 두 배 정도는 될 것 같은 그림이 정면에 걸려 있었다.

'시조, 아레트 에우데미아.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한 사람은 그 특징이 너무나도 또렷한 에우데미아의 시조였다.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볼 법한 전형적인 그리스 철학자 이미지. 왕국 곳곳에 걸려 있는 사람을 헷갈릴 수는 없다.

그의 옆에는 성모처럼 양팔을 벌린 한 여성이 그려져 있는데, 곱게 뻗어 내린 은발과 신비로운 자안이 아셰리아 공주를 떠올리게 한다. 19세 시절의 아셰리아 여왕에 비하면 꽤 부드러운 분위기다. 사실 시조 옆에 그려진 은발의 여성이라면 단 한 명뿐이겠지.

나는 국왕에게 물었다.

"이분은 초대 성녀님이신가요?"

"그래. 시조님의 반려이자 헬렌 교국의 초대 성녀, 이비버스 헬레니아. 헬렌 교국에서는 이브라고도 불린다."

"이비버스..."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적지. 세상 대부분의 인간이 헬레니아의 성을 가진 최초의 여인이라고만 부르니까."

국왕은 그림의 네 곳, 시조 아레트와 초대 성녀의 손이 그려진 부분들을 한 번씩 짚었다. 그러자 그림은 조용히 반으로 갈라졌고, 그 뒤편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면은 전부 회색 벽돌로 채워져 있고, 일정 구간마다 희미한 빛을 내는 마력등이 박혀 있는 긴 비밀 통로. 나로서는 그 길이가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걸 본 내 머릿속에는 왕국의 어둠, 알아서는 안 될 비밀, 숨겨진 진실과 같은 무서운 단어들이 이리저리 부유한다.

하지만 국왕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에 발을 들였고, 나 역시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섯 걸음 정도 걸었을까.

­ 쿵.

이 통로를 가리고 있던 그림이 합쳐졌다.

국왕은 통로를 나아가며 말했다.

"이제 자네도 악인기에 관해서는 알고 있겠지."

"네."

"자네가 아는 대로 말해보게나."

"수많은 표류자와 빙의자들이 일어났고, 세상의 선악이 충돌한 시기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빙의자라. 덧씌워진 인격을 그리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잠시 필레몬 국왕이 말을 쉬자, 또각 또각 또각, 두 사람분의 발걸음만이 통로에 울린다.

"자네가 물었었지. 해방이 무어냐고. 그 답을 위해서는 자네가 한 가지를 먼저 알아야 하네."

국왕은 내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해방자 정의선은 무엇을 해방했을 것 같나."

언젠가 헤르만에게 건넸던 질문이었다.

해방 교단이 말하는 해방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나도 이걸 한참 고민했었다. 200년 전, 자랑스러운 한국인 표류자 정의선은 이 세계의 근원으로 향했었지. 과연 그곳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게 무엇이 있었을까.

나는 머릿속에서 가장 유력한 답을 말했다.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감정이지 않을까요?"

"호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 조물주는 이 세상에 감정을 부여했고, 근원에서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을 관찰하기 위해 만물을 마력으로 엮은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

"근원에 도달한 해방자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할 만 한 것. 그게 감정이라 생각했습니다. 감정을 해방한다는 게 어떤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어머니의 꿈을 꾼 날, 문득 떠오른 한 마디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스스로가 이성적인 사람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세상의 아름다운 감정을 유심히 들여다보라 하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지.

'감정이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고, 그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지 보렴.'

문득 떠오른 당신의 말씀은 이 세계, 에코니아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내가 살던 곳은 이성에 얽매여 있다면, 여긴 감정이 너무나도 강한 세상이니까. 당장 심상 마력부터가 감정의 소중함을 반영하지 않나.

거기다. 피조물들에게 멋대로 감정을 부여한 조물주는 그 감정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세상을 부수려 했었다. 에코니아의 역사마저도 감정과 깊은 연관이 있는 셈이다.

필레몬 국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자네는 대단해. 저쪽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으나, 그 어떤 표류자도 자네처럼 빨리 답에 이르진 못했을 걸세."

"제가 맞춘 건가요?"

"그래. 절반뿐이긴 하네만, 일단 정답이지."

"절반... 이라니요?"

"후우..."

한숨을 내쉰 국왕은 한탄하듯 말했다.

"자네가 이미 말했지 않나. 이 세상의 선과 악이 충돌한 시기가 악인기라고."

"그렇습니다."

"해방자는 그 둘 중 하나만 해방시켰다네."

"둘 중 하나... 선을 해방시킨 건가요?"

"그렇다네."

순간.

'아레트 에우데미아. 그리고 정의선. 그들은 무언가를 해방한 적 따위는 없습니다.'

뇌리 속에 절제자 뵈브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자연스레 그다음 말을 읊조리게 되었다.

"오히려 해방자는 봉인자에 가깝다..."

"그 말은 어디서 들은 건가?"

"해방 교단의 주교가 내뱉은 말입니다."

"역시나. 그랬던 거로군."

내 앞에서 걷고 있는 국왕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마. 해방 교단이 말하는 진정한 해방. 그것은 악의 해방이라는 것일까.

... 나로서는 감이 잘 안 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국왕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무엇이 말인가?"

"사실 감정을 해방한다는 게 잘..."

"와닿지 않나 보군."

"... 네."

"걱정하지 말게. 이제 다 왔으니."

국왕의 말에 전방을 보자, 그 끝에는 통로에 비추는 마력등보다 훨씬 강렬한 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빛에 도착하자 국왕이 말했다.

"이름에 비해 초라하긴 하네만. 여기가 바로 에우데미아 왕실의 비고라네."

벽돌로 만들어진 통로의 끝에는 거대한 공동이 있었다. 머리 위에는 어떤 원리로 빛나는지도 모를 돌들이 빼곡히 박혀 있고, 정면과 좌우에는 꽤 오래되어 보이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정면은 우리 왕실의 기원. 시조께서 조물주와 싸워온 역사가 기록되어 있네."

"아..."

정면에는 다섯 신수를 찾아 세상을 헤매는 시조와 초대 성녀. 근원으로 향한 그의 신살. 그 모든 것이 이집트 벽화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밝은색으로 칠해진 사람들과 어두운색으로 물든 사람들이 대립하고 있다.

"좌벽에는 해방자의 일대기일세. 사실 에우데미아의 왕실로선 조금 부끄러운 역사지."

"부끄러운 역사라뇨?"

"자네의 검이 누구의 것인지는 들었나?"

"알고 계셨네요..."

"당연하지. 나도 일국의 국왕이야. 내가 모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네."

이성과 절제의 검. 엔크라테아. 한나는 이걸 당대 최악의 악인이 사용한 검이라 했었지...

국왕은 말을 이었다.

"당시 왕실에는 세 남녀가 있었네. 허나 그중 한 분께서 혈육을 잃은 분노에 악인이 되어버렸지."

"... 설마. 그 사람이 이 검의 주인인가요?"

"그렇다네. 해방자 정의선을 최후의 최후까지 몰아붙였던 악인이 왕실의 핏줄이었던 게야."

"……."

말문이 막힌 나에게, 국왕은 담담하게 말하며 돌아섰다. 그가 향하는 곳은 우측의 벽이다.

"에우데미아 왕실의 심상을 굳이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네."

"갑자기 그런 걸 저한테 말씀하셔도..."

"차근차근 들어보시게나."

이윽고 나와 국왕이 도착한 우벽에는...

비록 그림체는 다르지만,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구도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금발의 왕자님. 후드를 쓴 누군가, 그 뒤편에는 수많은 영웅이 모여 있다. 그들 모두는 검은 재앙, 판타스매터들에게 맞서는 중이다.

'에코니아 아포칼립스의 포스터...'

도대체 그 게임은 누가 만든 것일까. 이 정도면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왔거나, 이 세상의 신이 그 게임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왕은 말을 이었다.

"악인기는 한 번이 아니었다네. 시조께서 조물주와 맞서셨을 때를 시작으로, 악인기는 그 주기가 점점 짧아져 가고 있다네. 해방자가 겪은 악인기는 정확히 세 번째야."

"뭐라...고요?"

"나는 자네가 맞섰던 그 해방 교단이 네 번째 악인기를 여는 게 목표라고 생각하는 중일세."

국왕은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그 게임은 에코니아의 악인기를 다룬 건가. 그리고 그 해방 교단은 악인기를 유도하는 자들...

정신이 멍해져 버린 사이, 국왕이 말했다.

"한 사람의 타락이 있었네만. 에우데미아는 언제나 악인기를 넘기는 선봉이 되어 왔어. 우리 왕족은 언제나 행복의 심상을 가다듬고, 그 마력으로 세상을 구하는 데 앞장서 왔네."

"……."

"자네에겐 부탁이 하나 있다네."

"말씀하시지요."

국왕은 잠시 동안 뜸을 들이다 말했다.

"아이들을 위해서, 어디까지 갈 수 있겠나."

아이들.

분명 아셰리아와 알렉산더를 뜻하는 거겠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반년 전에 이미 정해두었고,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제 목표 그 자체입니다."

"그런가."

아셰리아 여왕은 내 어린 시절을 넘기게 해주었고, 아셰리아 공주는 이곳에서 날 구했다. 어찌 보면 나는 두 번이나 그녀에게 구원받은 셈. 보은 정도는 확실히 해야겠지.

거기다 알렉산더를 비롯한 다른 녀석들 역시,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아직도 내겐 특별한 삶의 목적이 없다. 지금 맡은 아이들이 없어지면, 내가 살 이유도 없어진다.

"그렇다면..."

국왕은 조금 만족한 듯 흐뭇하게 웃었다.

이어서 그는 평온한 얼굴로...

"내가 죽었을 때, 아이들을 잘 부탁하네."

영 불안한 말을 내뱉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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