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2113. 제정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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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3. 제정신인가?
잠시 동안 내 어이는 가출해버렸다.
지금 내 옆의 이 인간, 필레몬 국왕이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린 나는 삐딱하게 물었다.
"국왕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 내가 죽으면 아이들을 부탁한다 했네만."
다행히 내 청력에는 이상이 없는 듯하다. 필레몬 국왕이 방금 들은 것과 똑같은 말을 하니까.
하지만 나로서는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아..."
"갑자기 웬 한숨인가?"
웬 한숨이긴요. 지금 이 한숨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내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지.
네 번째 악인기란 말을 처음 들은 순간에는 당혹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갑자기 역사서 속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사람이 당황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 쓰레기 게임의 시대적 배경이 네 번째 악인기였을 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다. 애초에 나는 그 게임을 극복할 셈이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니 '아. 내가 그 병신 짓을 5년이나 하고도 아셰리아 여왕을 못 살린 데엔 이유가 있었구나.'라는 감상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런데...
"국왕님."
"... 왜 그러나?"
"왜 죽을 생각을 먼저 하시는지요."
내가 아셰리아 공주의 주변에 있는 사람을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이 인간은 죽을 고민이나 하고 있다니. 이건 상당히 열받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달라진 내 태도에 국왕은 당황하여 말했다.
"내가 말했지 않나. 에우데미아는 언제나 세상을 구하는 데 앞장서야만 한다고."
"그게 왜 폐하께서 죽는다는 이야기가 됩니까."
"……."
잠시 당황의 빛이 어렸던 국왕의 얼굴은 다시금 굳어 버렸다. 게임이나 영화 속 누군가가 죽을 각오를 했을 때 짓는 그런 표정이다.
그가 말했다.
"자네에겐 부끄러운 말이네만... 확신이 없네."
"확신이요?"
"그래. 확신."
깊은숨을 들이쉰 국왕은 한탄하듯 말했다.
"에우데미아의 최대 전력은 나를 비롯한 여러 가문의 심상. 허나 심상 마력도 결국 마력이네. 자연 마력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자신의 심상을 가다듬어야만 위력이 제대로 나오지."
몇 가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연 마법사는 나이가 많을수록 강하다.
마력을 담을 그릇을 키우고, 자연 원리를 관찰하고, 마력을 고찰하고, 마법을 구성하는. 이 모든 과정에서 깨달음과 경험을 쌓아야만 강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는 심상 마법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 어떤 경험을 하며 어떤 감정을 느껴왔는지, 자기 마음을 어떻게 그려내는지에 따라 그 힘은 크게 달라진다.
자연 마법은 자신만의 물리 법칙을 쌓아나가는 깨달음이라면, 심상 마법은 자신의 내면을 점점 깨달음으로서 성장하는 것이다.
국왕은 말을 이어간다.
"지금 왕국에는 악인기에 맞설 이가 너무 적어. 특히 중앙에는 나와 어거스트 경뿐이지. 우리 두 사람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거기다 내 심상도 예전 같지 않아. 만일 에스더를 죽인 그 판타스매터가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난다면, 나는 이겨낼 자신이 없네."
사실 그의 말이 모두 맞는 말이다.
나라를 받치던 세 기둥 중 하나 사라진 상태니까.
여기에 더해서, 국왕이 진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 게임에서 필레몬 국왕은 본편 시작 1~2년 전에 죽은 상태였다. 그를 죽인 재앙은 본편 시작 직전에 다시 한번 나타나 어거스트 기사단장마저 죽여버린다. 국왕이 말한 판타스매터는 사기 캐릭터인 이방인이 마지막에 겨우 물리칠 만큼 강한 놈이다.
어찌 보면 국왕의 우려는 당연한 셈.
하지만 국왕의 말은 내게 있어 다른 의미로 맞는 말이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처맞는 말.
나는 아직도 그에게 화가 난 상태다.
"아직 악인기는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시작했네."
"아뇨. 본격적인 악인기는 3년 뒤에 찾아옵니다."
"자네. 갑자기 그 무슨..."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 국왕께서는 제정신이 아니신 듯합니다."
국왕은 내 말에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아무리 그가 호탕한 성격이라 해도,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듣는 건 그의 40에 가까운 인생 중 처음일 테니까.
나는 쉼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폐하. 왕실의 심상은 행복이라고 하셨지요."
"... 그렇다네."
"두 자제분께서는 이제야 진심으로 웃게 되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슬픔을 주실 생각부터 하시는 걸 보면, 확실히 국왕께서는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
"그딴 암울한 생각 속에 빠져계실 시간이 있다면, 미리 악인기를 대비해두는 게 훨씬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면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나 더 내시죠."
반년 전만 해도 관리들 앞에서 억지웃음만 내보이던 알렉산더였다. 거기다 아셰리아 공주는 표정이 얼어붙어서 한 달 동안 웃는 모습을 두 번밖에 못 봤었지.
그런 아이들이 일상 속에서 조금씩 더 웃고 있는데, 아버지라는 인간이 그 웃음을 또 앗아갈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화가 끊이질 않는다.
국왕은 나를 빤히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흠... 아마 제정신이 아니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마력 중독에 걸린 상태일 수도 있다.
그 탓에 지엄하신 왕족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나는 그에게 속사포처럼 답했다.
"사실 제정신이 아니니 이런 말을 하겠지요. 이번에 해방 교단을 상대하며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 주변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죽거나 다치면 열이 뻗치는 성격이더라고요."
"한데 제 옆에 계신 분께서는 큰 위기를 앞두고 죽을 고민부터 하시니, 이것도 꽤 열이 뻗치는 상황입니다. 이럴 시간에 처낼 놈들 처내시고, 챙길 사람 챙기시는 게 훨씬 나을 듯합니다."
필레몬 국왕은 고개가 갸웃거린 채 멍하니 얼어붙었다. 눈에 긁힌 상처까지 있는 금발의 중년 남성이 저런 포즈로 굳어 있으니 참으로 어색하다.
잠시 후 그의 표정은 화가 난 듯 약간 찌푸린 것으로 변하나 싶더니, 그 역시 오래가지 못하여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버렸다. 이내 '허허'하며 기가 차는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고, 마지막엔 호탕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하하하하! 자네 말이 맞아!"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자네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말이야! 하하하하하!"
필레몬 국왕은 그 후로 한참을 웃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 말을 정확히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긴 하다.
... 그래. 팔불출 국왕은 이래야지. 나에게는 조금 잔혹한 말이지만, 자식들은 부모를 은연중에 닮으니까. 알렉산더와 아셰리아가 닮을 부모는 밝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 화목한 가족을 위해서.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나는 이 세계에 숨어서 활동하던 흑막 중 하나를 확정해냈다. 그 게임을 플레이하던 시절에도 이루지 못한 것을 이 세상에 와서야 이루어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지금부터 할 일은 미리 결재받아야 한다.
"하아... 한껏 웃으니 낫구먼."
"폐하."
"왜 그러나."
국왕은 한층 편해진 얼굴로 답했다.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라더니, 이 세계에서도 통하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제정신인 말투로 그에게 고했다.
"교단의 앞잡이로 의심되는 놈들이 둘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
"말씀드리기 전에. 사업 하나만 하게 해주십시오."
"... 사업?"
머릴 치기 전에 팔다리를 전부 처내야 쉬운 법.
이제 가지치기를 할 시간이다.
* * *
다음 날.
"아, 의뢰인님! 접수증 작성하셔야죠!"
왕도 아레트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남쪽 거리의 용병 길드. 접수원 밀리는 오늘도 고생 중이다.
"어딜 감히. 나 길드장이랑 술도 마시고 다니는 사이인 거 몰라? 이딴 종이를 나한테 왜 들이미는 게야!"
"길드장님과 면담하시려면 이거 꼭 작성해주셔야 해요. 안 해주시면 제가 왕국법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으니까... 제발 부탁드릴게요."
"이... 시펄. 내가 너만 했을 때는 말이야! 알아서 이런 거 눈치 있게 따악! 해서 사인만 따악! 하면 되도록 준비해놨다 이 말이야. 하여간 요즘 젊은 것덜은! 카아악 퉤!"
용병의 대다수는 타지에서 떳떳하지 못한 일을 저지른 뒤 신분을 세탁하고 흘러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용병들을 쓰는 의뢰인들 역시 개차반이 많기 마련. 오늘도 술을 마시고 찾아온 꼰대의 굴욕스러운 언사에 당하고 있던 밀리였다.
하지만 이런 게 운명일까.
"거기 개새끼. 접수원한테 행패나 부릴 거면 이제 닥치고 비켜라."
어떤 남성이 빛을 뿜어내며 다가왔다.
동방인을 연상시키는 흑발, 입과 코를 가린 두건, 무표정한 눈. 그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얼굴의 절반을 회색 머리의 남성 하나와 옅은 금발의 여성이 따르고 있다.
꼰대 귀족이 그에게 답했다.
"뭐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지금 나보고 방금 뭐라 했어!"
"개의 새끼니까 개새끼를 개새끼라 부르지, 아니면 뭐라 불러. 강아지라 해줄까?"
"이... 이이!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잘 알지. 블룸즈 남작. 3년 전에 에우데미아 남부의 작은 영지를 하사받았지."
갑자기 벌어진 소란에 용병 길드에 남아 있던 용병들이 웅성웅성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꽤 분개하는 수인들도 있었다.
"거. 개새끼라니. 수인 차별 발언이다!"
"저 새끼 혀를 확 뽑아버려!"
"그래! 저 새끼가 왜 개새끼야!"
"저건 진짜 개보다도 못하거든!"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나는 개가 아니라고!"
그걸 듣던 귀족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하자, 눈앞에 두건을 쓴 남성이 말했다.
"남작. 작년 건국제 연회에 참가하긴 했나."
"당연하지! 연회에 내가 참가하지 않을 리가..."
"올해부터 참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이내 시하는 입에 두르고 있던 두건을 치워냈다.
그 순간 용병 길드는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다... 당신은..."
"각종 길드에 방문한 귀족들은 접수증을 필히 작성해야 한다. 이걸 어기면 어쩌나. 요나. 이 새끼 끌고 가시면 될 것 같아요."
"... 이러려고 절 데리고 오신 겁니까?"
"아뇨. 사법부에 얘 가뒀다가 오시면 될 것 같은데요. 입회 정도는 해주셔야 하니까요."
"하아..."
시하의 뒤에 있던 요나는 한숨을 내쉬며 꼰대 남작을 끌고 길드를 나섰다.
시하는 반년 전부터 각종 화재의 중심에 선 인물. 왕도 신문을 자주 보는 접수원 밀리가 그의 얼굴을 몰라볼 리 없었다.
접수원 밀리가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용병 길드의 접수원 밀리라고 합니다! 이시하 임시 공작님을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내가 부탁이 있어서 왔는데..."
"네! 말씀하세요!"
평민인 자신을 하대하지 않고 대해준다니. 이 무슨 영광일까. 거기다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난동을 부리던 꼰대 남작까지 치워준 시하다. 그가 무슨 부탁을 하든 성심성의껏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길드장 그 대머리."
"... 네?"
그녀의 믿음은 곧바로 배신당했다.
"내 앞에 무릎 꿇고 대가리 박으라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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