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50화 (150/215)

〈 150화 〉 2­114. 제압했을 뿐이에요.

* * *

2­114. 제압했을 뿐이에요.

주황 머리 접수원은 내 말에 당황하여 물었다.

"고... 공작님? 다시 한번 말씀해주실래요?"

"길드장 그 대머리. 내 앞에 무릎 꿇고 대가리 박으라고 전해주세요."

"……."

말문이 막혀버린 접수원.

내 뒤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게 누군데 길드장님을 오라 가라 하는 거야?"

"방금 공작이라고..."

"그런 사람이 개새끼라는 단어를 써?"

"최근에 왔다던 표류자를 말하는 거 아냐."

"그 낙하산으로 공작 됐다던?"

... 역시나.

게임 속 에우데미아는 망할 만도 했어.

저들을 나쁘게 말하면 길드장의 졸개들. 좋게 말해주면 친 길드장파 용병들이다. 여러 종족이 스무 명 정도 모여 있는데, 저놈들은 언제나 길드에 상주하며 바람잡이 노릇은 한다. 지금은 그 중 열 명이 모여 있다.

지금은 게임 본편만큼은 아니더라도 재앙이 드물지 않게 출몰하는 시기. 왕국은 용병 길드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대신, 자율규제를 철저히 하도록 명했다.

'어차피 관리할 인력도 부족하니까, 권리를 줄 테니 책임을 져라.'라는 뜻이었겠지. 하지만 이런 모질이 단체에서 자정 작용이 있을 리 없다. 용병 중에 '사연 있는 능력자나 지성인'도 꽤 있긴 하다만, 그런 이들은 30%도 되지 않는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아일라가 말했다.

"공작님. 전부 죽일까요?"

"진정해. 저런 거 다 죽이면 사람이 안 남아. 어차피 바깥에 쫙 깔아뒀는데, 뭘."

"알겠습니다."

가만 보면 적을 대하는 순간만큼은 나보다도 가차 없는 아일라다. 시온 자작령에서도 라나가 위험했을 땐 광인들의 머리를 뚫어버렸었지.

'그나마 나한테 허락은 구해서 다행이네.'

우리 대화에 접수원은 새된 소리를 흘렸다.

"히... 히이이익!"

저런 험상궂은 용병들을 반평생 상대하며 살아왔을 텐데, 겨우 죽인다는 말에 놀라버리다니.

'이런 걸 보면 초짜 같은데...'

나는 게임에서도 가끔 골라본 질문을 건넸다.

"지금 길드장 있긴 해요?"

"네니오?"

"네니오는 또 뭐야."

"계... 계셔요!"

딱 보니 이 접수원은 고용된 지 얼마 안 된 신입이구만. 용병 길드와 우호적인 상태가 아니라면 이 질문에는 '길드장님께서는 현재 부재중이십니다.'라는 답변이 나오는 게 정상이다.

그나저나 이 길드는 거대한 크기만큼 의뢰도 엄청 받을 텐데 접수원이 고작 한 명이다. 고용한 인력이 너무 적다 해야 할까. 분명 이곳은 악덕 기업임이 틀림없다.

"신입이에요?"

"아. 네!"

"그럼 내 말 잘 들어요. 이 길드는 감사 대상이 되었으니, 접수대에 있는 서류는 다 챙기세요."

"... 네?"

"빨리 챙기기나 해요."

내 말에 뒤에 있던 용병들이 끼어들었다.

"거기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이 나라 공작인데."

"길드의 자치권을 무시할 셈인가!"

"너희 같은 개새끼들이 자릴 차지 하고 있으니까 내가 온 거잖아. 아직도 분위기 파악 안 돼?"

"이 인간이 또 개새끼라고...!"

내 단어 선택에 분개하는 견인족 수인이 있기에 그곳을 보니, 마침 내가 아는 놈이었다.

나는 정확히 그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 너."

"...나?"

"그래 너. 같은 수인들에게 동포니, 동족이니 하면서 등쳐먹으니까 참 살만도 하지?"

"……."

"수인국에서 쳐 나왔으면 다른 곳에서라도 제대로 살아야지. 같은 용병들 상대로 사기나 치는 새끼가 개새끼란 단어에 화난 연기를 해?"

상당히 멍청한 척을 하고 있긴 하지만, 게임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놈이다. 용병 길드에서 실질적인 두뇌를 맡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클로에와 수인 녀석들에게 '첫 의뢰'를 준 것도, 클로에를 귀족가에 팔아먹으려는 생각도, 전부 저놈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하아. 저 면상을 보니 또 스멀스멀...'

내가 왼팔을 엔크라테아의 손잡이에 걸치자, 내 몸속에 기분 좋은 시원함이 퍼져나간다.

그전까지만 해도 내 속이 이렇게 답답해 온 적이 없었는데, 시온 자작령에서 마력 중독에 빠진 뒤로는 저런 쓰레기만 봐도 주체가 안 된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으니, 어떤 노년의 남성이 2층 계단을 통해 내려오며 말했다.

"무슨 소란이냐."

"아. 길드장님. 이시하 공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임시 공작..."

계단을 전부 내려온 그는 바람잡이 용병들의 앞에 서서 나와 대치했다.

젊은 시절의 근육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몸, 꽤 늙긴 했지만 쭉 펴진 허리, 신경질적으로 뜬 눈이 그를 날카롭게 보이도록 한다. 여기까지 보면 내가 아는 그 용병 길드장이 맞다.

그런데...

"아직 남아 있네."

"뭐가 남아 있다는 거지?"

"머리둘레에 남아 있는 그거."

"무... 무슨 소리냐?"

"당신 머리털. 3년 뒤엔 전부 빠질 거야."

"……."

내가 아는 길드장은 머리가 아예 다 빠져서 번쩍이고 있었는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비록 정수리는 전멸이지만, 머리둘레로 쓸쓸하게 남은 머리를 애써 올려둔 머리 스타일.

내 탈모 말기 선고에 길드장은... 몇 가닥의 머리칼로 애써 가려둔 정수리가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임시 공작이라 해도 초대면의 용병 길드장인 나에게 이딴 언사라니! 당신 미쳤소!"

대놓고 신경을 긁으려고 한 말이긴 하지만, 대머리라는 팩트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초대면이라..."

나는 그에게 의뭉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길드장. 우리가 분명 초대면이긴 하지. 그런데 우리가 단순한 초대면은 아니지 않소?"

"무슨 뜻이지."

"내 저택에 쥐새끼들을 작작 보냈어야지."

"... 나는 모르는 일이오."

"그래. 당신은 몰라야지. 당신 뒤에 있는 개새끼가 보내자고 했을 게 뻔하지만 말이야."

길드장이 자신의 뒤편을 힐끗하고 돌아보자, 어떤 개새끼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말했다.

"사실 거기 개는 말 안 했어. 내가 잡은 쥐새끼들도 평범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했을 뿐이고."

"그렇다면 내가 사주했다는 증거는 없지 않소."

"왕국의 정보력을 어디까지 무시하는 건가. 거기다 지금 당신의 행동만으로도 확실해졌지."

"……."

지금은 시온 자작령에 남아 있지만, 이미 헤르만이 증거를 확보해두었다. 쥐새끼들을 역으로 추적해 길드와의 연줄을 확인한 것이다.

거기다...

거짓말을 하려면 뵈브 정도로 상판대기에 철판을 깔아야지. 내 앞에서 수하들을 뒤돌아보고, 모르는 일을 잘 아는 듯이 말한 시점에서 확신범이다.

상황이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길드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유명하신 이시하 임시 공작께서 우리 길드엔 어쩐 일로 찾아오셨소."

"별일은 아니고. 당신들 개짓거리에 신물이 나서 말이야. 왕명을 수행하러 왔지."

"... 왕명?"

"그래. 왕명. 오늘부로 용병 길드는 전부 폐쇄. 길드 내 문서는 전부 검토하여 죄를 묻겠다."

내 선고에 얼굴 주름이 늘어나는 길드장.

나는 내 뒤편에 있는 접수원에게 말했다.

"거기 접수원. 이름이 뭔가?"

"미... 밀리입니다."

"당신은 일개 접수원일 뿐이니까. 협조만 잘 해주면 선처하겠네. 어서 서류들이나 정리해."

내 말에 갈피를 못 잡는 접수원.

그녀의 시선은 길드장을 향하고 있다. 보나 마나 험악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겠지.

역시나 뒤를 돌아다보면, 정수리만큼 얼굴이 벌게진 노인네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우리와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이오?"

"분명 왕명이라 했을 텐데."

"필레몬 국왕 폐하께서 그런 명을 내리실 리 없소."

"재앙이 판치는 시대에 길드의 도움이 절실해서?"

"... 그렇소."

"그걸 알면 자율권을 받았을 때 잘했어야지. 쓰레기들과 결탁하여 나라를 좀먹는 늙은이가 지금 와서 폐하의 이름을 팔겠다는 것이냐."

하필 칙서를 들고 있는 요나를 사법부에 보내버렸으니, 참 난처한 상황이다. 그걸 내보이기만 하면 깨갱도 못하고 사법부에 쇠고랑을 찰 것들이 발악하고 있으니까.

'... 사실 일부러 요나를 보낸 거지만 말이야.'

어차피 내겐 결정타가 될만한 정보가 있다. 아직 왕도에 공표되지도 않은 따끈따끈한 정보. 이걸 내 입에 담는 순간, 길드장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마도 난동을 부리겠지.

나는 접수원에게 말했다.

"밀리. 의뢰인은 시온 자작령의 마크 테크니. 의뢰 수주는 묘인족의 클로에. 이 의뢰는 단 한 건 뿐일 테니까, 지금 당장 찾으세요."

"기... 길드장님."

"범죄자와 말을 섞을 생각인가요? 빨리 내가 말한 문서나 찾으세요."

"네. 네엣!"

밀리가 움직이자, 길드장 역시 몸을 굽혔다.

'시선은 접수대 방향이 아니군. 목표는 2층.'

나는 즉시 엔크라테아의 손잡이에 대고 있던 손을 검집으로 뻗으며 마법을 구상한다.

'수속성 초급 마법, 수증기의 응결, 물의 빙결. 떠올리는 것은 여왕의 빙벽.'

길드장이 튀어 오른 순간, 나 역시 오른팔로 허공을 휘저으며 마력을 분출했다. 그 순간 마력은 형체를 바꾸었고, 2층 진입을 막는 두꺼운 빙벽으로 자라난다.

"으윽...!"

빙벽에 가로막혀버린 길드장은 당황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다. 나는 그의 행동을 예상하며 다음 수를 준비한다. 내 기억 속 길드장은 권법가. 그의 단련된 오른팔은 저 빙벽을 언제나 부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마법은...

언젠가 아카데미 숲에서, 윤흠서에게도 사용했었던, 사거리가 짧지만 내가 쓸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강력한 마법.

마력으로 지정한 한 점에 공기를 가두고, 잔뜩 압축해둔다는 느낌으로.

길드장의 주먹이 빙벽에 닿으려는 그 순간, 그의 오른팔을 날려 버리도록.

"공작을 막아!"

"밀리 네 이년! 당장 멈춰라!"

내 정면에서 개새끼가 외쳤다.

그를 비롯한 몇몇이 이쪽으로 달려드는 듯하지만, 나는 그저 아일라를 믿고 돌아보지 않는다.

... 이 마법은 꽤 집중해야 하니까.

"흐아아압!"

이내 길드장이 기합과 함께, 오른팔에 최대한의 힘과 마력을 실어 내질렀다.

주먹은 쿵! 소리를 내며 빙벽을 부쉈지만, 동시에 쾅! 하고 터지는 소리가 그의 귓전에 터진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길드장은, 팔꿈치 아래가 사라진 오른팔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길드장의 수하들을 보면, 반쯤은 아일라의 마법에 날아가 벽에 박혔고, 절반은 전의를 상실해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린 상황.

그리고.

"꼼짝 마라!"

"반항하면 사살해도 된다는 폐하의 명이다!"

"전부 그 자리에서 엎드려!"

길드를 포위하고 있던 왕도 치안본부 대원들과 요나가 조금 전의 굉음을 듣고 들이닥쳤다.

"교사님! 괜찮으십...니까?"

"아. 요나. 아주 조금 늦으셨네요."

요나는 내가 다치기라도 했을까 걱정이 된 모양.

이내 그는 길드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아일라에게 날려진 용병들과 길드장의 팔을 보고 표정이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요나가 내게 물었다.

"교사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용의자들을 잡아들여 조사하고 벌하라는 말이 있었지, 즉결 심판까지 허락되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요나.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어허..."

사실 오늘 일은 전부 내 계획대로였다.

길드장은 게임의 모든 루트에서도 갱생의 여지가 없었던 인물. 거기다 저 개새끼는 길드장보다 더 악질이다. 이 기회에 둘 다 짓밟아두지 않으면, 내 속이 편치 못할 게 뻔했다.

이 상황을 위해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재정 상황이 안 좋지만 믿을만한 남작에게 투자와 후원까지 약속해가며 대본을 만들 정도였다.

뭐... 남작은 술 취한 상태에서 큰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니까. 사법부에서 싹싹 빌면 작위에 타격은 없겠지.

나는 요나에게 미리 준비해둔 말을 꺼내었다.

"증거 인멸을 시도하려기에 제압했을 뿐이에요."

내 말에 요나는 얼굴을 잠시 찌푸리더니, 길드장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빙벽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표정이 풀린 요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역시나 규범을 잘 지키는 요나였다.

나라를 좀먹는 쓰레기들을 잡으러 와서도 그만의 정의를 주장하다니, 참 한결같아서 좋다.

어찌보면 이게 요나의 매력이겠지. 사회에 이런 사람이 하나 정도는 필요하다니까.

"요나. 그럼 뒤처리는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제게 맡기십시오."

조금 과격했나 싶기도 하지만...

클로에 루트를 생각하면 안 죽인 게 어디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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