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2116. 시간이라는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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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6. 시간이라는 독
일에 파묻혀 살게 된 지 어언 나흘째.
헤르만과 함께 출근을 위해 저택을 나서면...
"... 오늘도 있네."
"……."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한 청년이 내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하아... 이틀 전부터 이게 뭐야.'
비록 엎드려 있긴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첫날엔 이 상태로 자기소개를 했던 미친놈이니까.
"에딘 테크니. 또 이러고 있는 겁니까."
"……."
"당신이 이렇게 해도 마크 테크니는 중죄입니다. 친족인 당신을 만나게 해줄 순 없잖아요."
"죄송합니다."
벌써 삼 일째다. 삼 일째.
유서 깊은 테크니 후작가의 차기 가주,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자가 매일 내 집 앞에 와서 절을 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참 부담되는 상황.
거기다 이 행동은 날이 갈수록 그 수위를 올리고 있는데, 어제는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엎드려 있었다.
저택 사용인인 사아 씨에게 물어보니, 낮에 정원 청소를 할 땐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고.
'이 인간은 도대체가. 귀족 맞냐...'
'내 집이 왕도 한복판이었으면 왕도 신문의 기삿거리가 되어버렸을 게 분명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자...
에딘 테크니는 땅에 붙이고 있던 한 손을 품 안에 넣더니, 두툼한 편지 봉투 두 개를 꺼냈다.
"이것만이라도. 전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제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하아... 어디 한 번 제가 보기라도 합시다."
"감사합니다."
한 봉투는 에딘 테크니. 나머지 하나에는 세바스찬, 시온에서 만난 노집사의 이름이 적혀 있다.
봉인을 뜯고 내용을 읽어 보면, 자신이 미안하니 뭐니 하는 그런 내용이 절절히 적혀 있다.
'이러니까 오히려 의심이 들잖아...'
'테크니는 마법진의 명가라 했었지.'
혹시나 프리즌 브레이크처럼 탈출 수단을 활자 안에 숨겨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나는 엔크라테아의 검집을 잡고, 편지에 마력을 주입해보았다.
'마법진을 숨겨둔 것도 아닌데...'
나는 그에게 말했다.
"에딘. 일어나 보세요."
"죄송합니다."
"안 일어나면, 이거 안 전해줄 거예요."
"……."
그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왁스 비슷한 걸로 고정시켜 깔끔하게 뒤로 넘겼지만, 오랜 시간 머리를 박고 있었기에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매부리코는 유전인지, 마크와 정말이지 비슷하게 생겼다. 그나마 마크와의 차이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유해 보이는 인상이라는 점이겠지.
삼 일간 얼마나 땅에 박고 있었던 건지, 그의 이마와 팔과 다리는 흙과 피가 번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이런 편지를 전하려는 의도가 뭔가요. 이제 와서 이런 걸 전한다고 상황이 변하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말고 의도를 말하라고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 모르겠다고요?"
내가 어이가 없어져 그에게 되묻자.
지친 기색의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예. 왠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에게 사죄하고 싶다는 생각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왠지 모르게...?"
"예."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오늘 일정이 마크를 떠보러 가는 거긴 했는데.'
사실 왕도에 도착하자마자 마크를 만나야 할 일이 있었지만, 내가 화를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 일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거기다... 왕궁부 지하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그였다. 내가 간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게 없을 듯했다.
'하지만 에딘으로 마크를 흔들 수 있다면...?'
나는 에딘에게 말했다.
"에딘. 편지는 건네드리죠."
"정말이십니까?"
"예. 대신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
.
저택을 출발한 나는 곧장 왕궁부 지하를 방문한 나는, 마크의 철창 앞에서 그를 불렀다.
"마크 테크니."
"……."
그의 온몸에는 고문의 자국이 역력하지만, 아직 정신은 굴하지 않은 모양.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겁을 먹을 내가 아니다.
"왕궁부 지하 생활은 꽤 할만한가 보네."
"닥쳐라. 공작."
"아직도 그때 맞은 게 분한 거야? 나 같으면 죽지 않았음에 감사할 텐데 말이지."
시온 자작령의 전투에서 팔다리를 잘린 뵈브는 그 자리에서 출혈로 죽어버렸다. 거기다 생포 당한 몇몇 교인들은 전부 독을 먹고 자살해버렸지.
... 사실상 남은 피의자라고는 마크 테크니 뿐.
나는 그에게 질문을 건네었다.
"그래서. 일리아드가 널 구하러 올 것 같나."
"... 세바스찬이 전부 불었나 보군."
잔뜩 힘이 빠져 한탄하듯 말하는 마크 테크니.
세바스찬은 시온 자작령의 늙은 집사장이다. 그가 내게 정보를 건넸으니, 그건 바로 몇십 년 전 죽은 최악의 성녀가 마크를 홀렸다는 것.
시온 자작령을 그 꼴로 만들고, 해방 교단이 부정의 마력을 모으는 공장으로 탈바꿈시킨 이유가 바로 그 여자 때문이었다고 한다.
죽은 년이 살아서 돌아오다니... 나로서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오래전에 뒤져버린 최악의 성녀가 돌아왔다니, 그걸 믿을 수가 있어야지. 처음에는 집사장이 내게 개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었다."
"……."
"하지만. 그 늙은이가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단 말이야."
나는 감옥 복도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마크 테크니의 철장 앞에 앉았고. 헤르만은 그런 내 뒤에 조용히 따라붙는다.
나는 말했다.
"마크 테크니. 네놈이 여기서 입을 열지 않으면 그녀가 널 구하러 올 것 같나. 그게 아니라면, 이 침묵이야말로 네 사랑인가."
"진짜 일리아드였다면 나이는 60에 가깝겠군. 아무리 외모가 젊었다고 해도 알맹이가 늙어 빠진 년에게 사랑을 느끼다니, 너도 참 순진한 놈이야."
철창 너머의 그는 뚫어지라 날 쳐다보고 있을 뿐,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도발이 너무 귀족답긴 했지.'
나는 덤덤한 어조로 옆에 있는 헤르만에게 말을 걸었다.
"하긴. 궁금하긴 하네. 헤르만. 일리아드가 홀려 먹은 주교만 해도 세 자릿수라 하던데. 하루에 얼마나 많은 침대를 굴러야 그럴 수 있었을까."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도 남잔데 궁금하지 않아? 침대에서 그 정도로 구르면 밤에 얼마나 잘하겠어. 거기다..."
나는 이어서 하려던 섹드립을 멈췄다.
마크 테크니를 도발하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헤르만의 얼굴이 더 붉어져 버린 탓이다.
'대충 눈치채고 협조나... 아.'
그러고 보니...
헤르만은 가문의 방침 때문에 그쪽 지식이 풍부해도 경험은 없었지. 내가 괜한 말을 해버렸다.
그 상태로 헤르만을 멍하게 보고 있자, 감옥 안의 마크 테크니가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공작. 네놈이 어떤 말을 하던, 나는 절대로 굴하지 않는다.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꽤 멋진 말을 지껄이네. 하지만 마크, 네 놈은 그게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당연하지. 모든 상처를 보듬어주시는 성녀님의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니까."
"그 사랑을 위해 교단을 도왔다...?"
"그렇다."
내가 돌아온 대답은...
영지를 기근에 허덕이게 한 것도, 사람으로 만들었던 그 마력 공장도, 힐데스비니를 풀어 도시를 습격한 것도. 모두 자신의 사랑을 이루게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지금쯤 마음속에 불길이 일어야겠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잠잠했다.
'... 그럴 필요성조차 못 느끼는 거겠지.'
나는 눈앞의 한심한 인간에게 말했다.
"상처를 보듬어주는 사랑이란 참 순수하고도 아름다워. 하지만 동시에, 정말 어려운 사랑이지."
"……."
"일리아드가 네 상처에 파고드는 기생충일지, 진정 상처를 보듬는 사랑일지. 그건 네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야. 일리아드 본인만이 알고 있겠지."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아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 이건 정말이지 일반화가 심한 말이다.
감정을 나눌 상대방이 내 기쁨을 반토막 낼지, 아픈 곳을 더 찌를지는 그 누구도 모르니까.
아니, 애초에 상대방이 내 상처에 무관심할 수 있겠지. 내 생각에 일리아드는 마크의 상처에 큰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마크. 너는 정말이지 한심해. 가까운 곳에서의 사랑은 무시하고, 엄한 것을 착각했으니까."
"... 무슨 소리냐. 공작."
"글쎄. 시온 자작령을 떠나기 전, 어떤 늙은이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엎드려 빌더군. 자신이 모든 걸 불 테니, 누군가의 몸만큼은 고단하지 않게 해달라."
"……."
"하지만 나는 그 늙은이에게 대답하지 않았어. 그건 딱히 내 알 바가 아니었거든."
"거짓말하지 마라..."
"믿는 건 네 마음이고. 사실 내게 엎드린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어."
내가 감옥 입구를 돌아다보면, 그곳에는 소리소문없이 따라온 에딘 테크니가 있다. 내가 그에게 손짓하자, 그는 마크의 철창 근처로 다가왔다.
마크는 자신의 잘난 형이 피와 흙으로 뒤덮인 모습이 보일 것이다.
"에딘?"
"……."
"... 하. 개수작인 게 뻔하군."
"왜. 네가 증오하는 형이 내 발밑에 엎드렸다는 사실이 분해? 아니면 믿기지 않는 건가?"
"이런 하찮은 짓거리에 속아 넘어갈 리 없다."
"멍청함이 하늘을 찌르는군."
에딘에게 내가 걸었던 조건은 두 가지.
하나. 지금 그 상태 그대로 날 따라와라.
둘. 마크의 앞에서 한 마디도 하지 마라.
에딘은 품 안에서 두툼한 편지 봉투 두 개를 그의 철장 안에 밀어 넣었다. 마크는 예상치 못한 형의 등장에 멍하니 있을 뿐이다.
그걸 본 나는 말했다.
"헤르만. 에딘. 가죠."
"... 이걸로 끝이야?"
"일리아드라는 년이 존재하는가, 그 확인을 하러 왔을 뿐이야. 이 반응을 보면 있긴 한 거지."
"그렇긴 한데..."
사실 마크에게 캐물을 것은 너무나도 많다.
해방 교단의 정확한 규모라던가, 차남회와 해방 교단의 관계라던가, 재앙을 몰고 오는 정확한 원리라던가. 마지막으로는, 혹시 그 일리아드라는 년이 '데릴라'는 아닌가.
하지만 지금 물어보면 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치부를 털어놓기엔, 일리아드가 심어둔 사랑이 너무나도 확고하니까.
"잘 있으라고. 마크."
"……."
그러니 나는 시간이라는 독을 쓸 거다.
나는 그대로 왕궁부 지하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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