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2119. 우리 공주님이 [ ]을 쓸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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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9. 우리 공주님이 XX법을 쓸 리 없어.
내 앞에 선 공주는 뜬금없는 말을 했다.
"저와 한 약속. 기억하고 계신가요?"
약속이라...
왕궁의 동관에서 살 때 한 약속도 있고, 지금 사는 저택으로 이사한 뒤로 했던 약속도 있다.
이런저런 일이 많긴 했는데. 그래도 갑자기 이런 자리에서 말할만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나는 일단 그녀에게 둘러대기로 했다.
"제가 공주님과 했었던 약속이 꽤 많긴 하죠?"
"……."
내 대답에 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년보다 꽤 성장해서 키가 올라오긴 했지만, 아직도 내 가슴팍에 겨우 올 정도라 해야 할까. 그 정도 높이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 결국 어린아이의 시선이지만, 그래도 꽤 아프다.
이내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왜 그러시나요. 공주님?"
"아닙니다."
갑자기 웬 한숨을 쉬는 걸까.
하지만 아셰리아 공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필로네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필로네님께서 면접에 참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 그렇죠. 제가 부탁드렸거든요."
"그걸 듣고 저 역시 선생님을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도 면접관으로서 참가하게 해주세요."
"네?"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그래도 아이에게 이런 걸 부탁하기는...'
물론 아셰리아 공주는 일국의 왕족이며, 열두 살 생일을 맞이한 참이니 이런 사업에 참여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겨우 열두 살이다. 저쪽 세상을 기준으로 했을 때, 아셰리아 공주는 초등학교 6학년생. 알렉산더는 질풍노도의 중학교 2학년이다.
내 감각으로는 내가 보호해야 할 아이.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이런 일을 부탁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마음이다.
시온 자작령에서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뵈브를 죽였다니. 인환이 거의 동귀어진 수준으로 밀어붙였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그래도 위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내 안색을 살피고 있던 아셰리아 공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하 선생님. 안 될까요?"
공주는 혹시라도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될까 싶어 한껏 기가 죽은 표정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날 돕겠다고 와준 건데...'
원래라면 왕궁에서 나오는 일도 적은 아이들이다.
알렉산더는 이제 유나를 왕궁 안에서 만나면 되니 외출 빈도가 확 줄어들었고, 공주는 원래 그림이나 독서를 즐기는 편이었으니까.
그런 아이가 도와주겠다고 먼 걸음을 한 셈인데, 괜히 안된다고 기를 죽일 필요가 있겠는가.
거기다 저 친위대를 보면, 국왕 내외도 아셰리아 공주의 면접 참여를 허락했을 것이다. 이걸 거절했다가는 그 팔불출 국왕의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꽤 많아서 걱정하던 참이었거든요."
"다행이네요."
그제야 아셰리아 공주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어떤 사람이 이 아이를 게임 속 여왕과 동일 인물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커뮤니티에 이 아이의 사진이 올라온다면, 다들 조작이라고 말할 것이다.
공주와의 인사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자, 얼굴이 영 굳어있는 필로네가 눈에 띄었다.
"필로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 하하... 별말씀을요."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내 물음에 작위적인 미소를 띠는 필로네.
그녀는 에딘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에딘 오라버니는 왜 여기..."
"폐하께서 수정 협찬을 부탁했다고 하시더라구요. 두 분은 서로 아는 사이신가요?"
"당연하죠. 저 공돌이 오라버니와는 어릴 때부터 익히 알고 지냈으니까요."
공돌이...?
에코니아에 온 지 반년이 넘었건만, 저 단어를 이 세상에서 들은 건 처음이다.
나는 그 단어에 의문을 표했다.
"공돌이라. 그런 단어가 에코니아에도 있네요."
"당연하죠. 이 몹쓸 오라버니는 매일 공방에 틀어박혀서 마법진만 만지고 살았거든요. 왕도의 아카데미에서도 참 유명했어요."
"필로네.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할 말은..."
"괜찮아요. 본인도 자각이 있을 테니까."
필로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던 에딘이 말했다.
"중앙 사대 귀족이 어릴 적부터 함께 커오듯, 삼대 변경백과 누스 가문은 절친한 관계입니다."
"에딘 오라버니. 웬일로 말을 잘한다...?"
"말을 잘 한다라. 그 정의를 잘 모르겠구나."
"……."
에딘의 대답에 필로네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 내가 에딘에게 느끼던 불편함이 이거였구나.
평생 마법진 연구에 파묻혀 살다 보니, 사람 대하는 능력이 영 늘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카데미에서의 생활까지 전부 마법진만 몰두하면 이럴 만도 하지.
여기서 더 말을 해봐야 내 속만 답답해질 것 같고, 면접을 빨리 진행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친위 대장님께서는 공주님의 옆을 지켜주시고, 나머지 친위 대원들께서는 제 수하들을 도와 질서 유지에 힘써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다들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면접장은 이 층입니다."
나는 다른 이들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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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면접관은 나, 아셰리아 공주, 헤르만, 필로네, 에딘. 이렇게 다섯 명이 되었다.
나는 모두에게 면접 방법을 설명했다.
"오늘 면접은 집단 면접. 인성을 위주로 평가할거에요. 바깥에서 열 명씩 조를 나누어 이 방에 들일 예정이니까, 저희는 차례대로 면접만 하면 됩니다."
내 설명에 헤르만이 물었다.
"형님. 근데 인성을 어떻게 파악해? 사람이 저렇게나 많잖아."
나는 그 질문에 자리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서류들 보이지? 면접자마다 서류가 두 장씩 있는데. 하나는 자기소개서고, 하나는 왕도 치안본부에서 받아온 범죄 이력이야."
"... 저걸 다 찾아서 봐야 해?"
"물론 면접 대기 번호에 따라 분류해뒀어. 면접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직원들이 건네줄 거야."
"시하 형. 어차피 기존에 용병 생활하던 사람들이 대다수일 건데. 그냥 다 받으면 안 될까?"
"그건 절대 안 돼."
내가 나름대로 희망적인 이야기를 했건만, 헤르만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말했다.
그에 아셰리아 공주가 설명을 덧붙였다.
"안 될 말입니다. 헤르만 오라버니. 옛 모험가 길드가 무너진 이유 중 하나가 인선이니까요."
"그런가요. 공주님..."
"중범죄자들은 이 길드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마 시하 선생님께서도 그 점을 가장 경계하고 계실 거에요."
필로네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공주님 말씀이 맞아요. 해방자는 존경받을 인물이긴 하지만, 모든 인간이 선하다고 믿은 게 유일한 흠이었죠. 이전 길드는 모험가가 되는 조건이 너무 어설퍼서 망한 거나 다름없어요."
두 사람이 내가 할 말을 거의 다 해버린 것 같다.
옛 모험가 길드는 해방자의 유지를 이어 제대로 운영되고 있었으나, 점점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기꾼들이 순진한 모험가들을 등쳐먹는 수단으로 변질하였다.
이후 용병왕이라는 사람이 용병 길드를 부활시켰고, 모험가 길드는 몰락의 길로 접어든 셈.
나는 헤르만에게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기본적인 인성만 볼 거니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야. 힘 내보자고."
"... 그래. 알았어."
이어서 나는 에딘 테크니 쪽을 보며 말했다.
"에딘. 통과자들의 마력 측정을 부탁드릴게요."
"... 이 중에는 제가 수정을 제일 잘 다루니, 그게 합리적이겠군요."
"정확합니다. 따로 자리를 만들어 접수원 한 사람을 붙여드리죠."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에딘이 전직 용병들의 신경을 긁을까 싶어 내린 결정이다.
다행히 에딘은 이 방법이 효율적이라고 스스로 이해했는지, 군말 없이 내 말을 따랐다.
아셰리아 공주가 말했다.
"선생님."
"네?"
"자리는 어떻게 앉을까요?"
"적당히 앉으면 되지 않을까요?"
"아뇨.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이내 공주는 면접용 의자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먼저 선생님께서는 길드의 장이십니다. 그러니 중앙에 앉으셔야겠지요."
"그거야 그렇네요."
"그리고 양옆에는 누가 앉아야 할까요?"
...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셰리아 공주는 일국의 공주니까 내 옆자리에 앉으면 되겠지. 헤르만과 필로네의 경우에는 둘 다 고위 귀족이니, 나와 공주의 옆에 앉으면 될 테고.
나는 내 의견을 말했다.
"공주님께서는 왕녀이시다 보니 중앙에 앉는 게 맞겠지요. 필로네와 헤르만은 편하신 자리에 앉으면 될 것 같습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 대답에 공주는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냥 당연한 일 같은데.
내 말을 들은 헤르만이 필로네에게 물었다.
"필로네 양. 제가 형님 옆에 앉아도 될까요? 여차할 때 이 인간을 말리려면 어쩔 수가 없네요."
... 얘는 왜 나를 폭탄 취급을 하는 거지. 요즘 들어 헤르만은 나를 폭발물 취급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이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헤르만의 말을 들은 필로네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청 화가 난 것 같은데... 방금 아셰리아 공주를 째려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예민한 건가?'
지금 필로네가 보이는 반응은 화가 났거나 수치스러울 때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조금 전 대화에서 그런 감정을 느낄만한 대목이 있었나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잠시 동안 찾아온 침묵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는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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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면접관 사이의 자리 배치는 '필로네 나 아셰리아 공주 헤르만' 순서가 되었다.
화를 참던 필로네가 한 마디를 내뱉었기 때문이다.
'저는 공작님과 한 번 맞선을 본 입장인데, 이런 행사에서 떨어져 앉으면 평판이 나빠져서요. 헤르만 님께서 제 사정을 헤아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공주의 말뜻을 이해했다.
귀족들은 시시콜콜한 소재로 남을 까내리는 걸 좋아하니까. 이런 자리 배치도 신경 쓰란 뜻이었겠지.
... 역시나 나는 아직 귀족 물이 덜 든 것 같다.
"공작님. 첫 면접조. 들여보내겠습니다."
"네. 부탁해요. 밀리."
내가 대답하자, 각양각색의 용병들이 실내로 들어와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에코니아에서는 면접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니까, 몇몇은 꽤 긴장한 기색이었다.
"모험가 길드 면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늘 면접은 간단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직접 작성한 자기소개서와 치안본부의 범죄 기록을 보고 여러분들께 질문을 드릴겁니다. 인격적인 문제만 없다면 합격입니다."
말을 마친 내가 면접자들의 기록을 뒤지려는 순간...
아셰리아 공주가 첫 질문을 먼저 시작했다.
"거기 7번. 강간 혐의가 있군요."
"그 혐의는 혐의일 뿐, 모함이었습니다. 왕도 치안본부가 생사람을 잡은 것이었지요."
공주의 어조는 얼음같이 차가웠지만, 그에 답하는 7번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그런가요?"
"예. 제 명예를 걸고 확신합니다."
"……."
7번을 뚫어지라 쳐다 보는 공주.
7번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집무실에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이내 아셰리아 공주는 담담히 그에게 선고했다.
"거짓말이군요."
그 선고는 내가 게임에서 몇 번이나 들었던 그 대사였다.
그에 7번은 어이없는 말투로 답했다.
"... 무슨 말씀이신지요?"
"머릿속이 좋지 못한 감정으로 가득하군요.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
우리 공주님이 관심법을 쓸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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