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2122. 믿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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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믿으니까요.
"여러분께는 방이 조금 비좁을 겁니다."
고블린의 작은 체구처럼 주방장 노인의 사무실은 자그마했고, 가구들 역시 그리 많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린이용이라 해도 믿을만한 낮은 침대. 그와 어울리지 않은 높은 책상과 의자. 손수 적은 요리 관련 서적이 잔뜩 꽂혀 있는 책장이 끝이었다.
시하는 방을 보고 말했다.
"주방장님. 역시 다른 넓은 집을 구해 드릴 테니 거처를 옮기시는 게..."
"아닙니다. 제게 이 정도면 적당한 방이랍니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길드 안에서 살다 보면 소란도 많이 일어날 건데요."
"넓은 집은 오히려 살기 힘들답니다. 타인종의 종아리 높이인 계단은 무릎까지 올라오고, 넓은 면적은 제 동선만 늘리죠. 거기다 왕도에서 출퇴근하지 않는 것도 축복입니다. 이 도시는 제게 너무 넓으니까요. 스승께선 이런 삶 역시 평등의 예시라 일컬으셨습니다."
"... 그렇군요."
주방장의 스승은 정말 자유와 평등에 미친 미국인다운 사람이었구나, 시하는 생각했다. 지금 고블린 노인이 말하는 것이야말로 다름을 존중하는 평등이니까.
노인은 두 사람을 자기 책상으로 인도했다.
"그래도 이 책상과 의자는 꽤 높은 걸 샀답니다. 일할 때는 고블린이 아닌, 한 사람 헤드 셰프로 일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자. 여기 앉으십시오."
"어... 주방장님?"
"예. 왜 그러십니까."
하지만 시하를 난처하게 만드는 요인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노인의 가구가 너무 적다는 점이었다.
이 방에는 의자가 단 하나뿐이었다.
"의자가 하나뿐인데요."
"그렇군요. 한데 주방에는 의자가 따로 없는 터라..."
고블린 노인은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난처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에 시하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뭐.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요. 저는 잠시 서서 들여다보면 됩니다."
"이거 참 죄송합니다. 혹시 모르니, 다음에는 보조 의자를 하나 들여둬야겠군요."
"하하. 다음에는 제가 다른 곳에서 검토하면 되죠. 여긴 주방장님의 개인 공간인걸요."
시하가 웃음과 함께 답하자, 고블린 노인은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며 방을 나섰다.
"그럼 서둘러 요리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방문이 닫히고, 고블린 노인의 집무실 겸 개인실에는 아셰리아와 시하만이 남았다.
"공주님. 어서 앉으세요."
"……."
시하가 아셰리아에게 말해보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저 의자에 앉는 것은 영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앉으세요."
"공주님. 그건 좀..."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 스승께 자리를 양보할 뿐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제가 서 있을게요."
"흐음..."
시하에겐 오늘의 아셰리아가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라면 이렇게 둘만 있을 때면 조잘조잘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주던 아셰리아였다. 이토록 어색하게 있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거기다 이 아이를 서 있게 하는 건 싫은데.'
자기만 의자에 앉는 것은 괜히 아이에게 벌을 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
고민하던 시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공주님. 여기 옆으로 와보세요."
"... 네."
혼이라도 나는 건가 싶은 아셰리아가 선생님께 다가가자, 시하는 의외의 행동을 해버렸다.
'으챠'하는 소리와 함께 아셰리아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자기 무릎에 앉혀버린 것이다.
"서... 선생님?"
그에 아셰리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나 동경하는 선생님의 무릎 위에 앉게 된다니, 지금 이 상황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
하지만 시하는 그녀에게 태평하게 말했다.
"이러면 둘이 같이 앉을 수 있잖아요."
"……."
"자. 장부를 한 번 볼까요."
"... 네."
한 손은 아셰리아의 허리에 두르고. 그녀의 정수리 위에 자기 턱을 올리다시피 한 시하.
아셰리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얼굴을 붉히게 되었지만, 시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위치다.
팔락 소리를 내며 표지가 넘어가고.
시하는 그곳에 적힌 내용에 감탄했다.
"와. 정말 꼼꼼하시네."
노인의 장부에는 수많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레시피 별로 어떤 재료가 얼마만큼 들어가는지, 그 가격은 계절에 따라 어떻게 변동하는지.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요리가 팔렸고, 그에 따라 재료의 재고는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그야말로 이 식당에 관련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주님.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네에."
그렇게 장부를 확인하기 시작한 두 사람.
하지만 아셰리아는 눈앞의 장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면접자의 '거짓말'을 잡아낸 '근거'를 물어보시는 건 아닐까. 이걸 묻기 위해 나를 집무실에서 데리고 나오신 건 아닐까.'
이 생각이 아셰리아를 계속해서 괴롭힌다.
"이 페이지는 다 읽으셨나요?"
"... 네."
"그럼 넘길게요."
"네."
분명 아셰리아는 감정의 색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었고, 아셰리아에게 이 능력은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었다.
이 저주는 그녀로 하여금 몰라도 될 감정을 너무나도 일찍 깨닫게 했다. 그 탓에 자신의 존재가 타인의 감정을 흐리게 만든다는, 슬픈 착각 속에 빠져 살지 않았나.
거기다 인간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도 어린 나이에 깨달아버렸으니, 아셰리아는 쉬이 타인을 신용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보이는 감정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지만, 이 능력이 오랜 시간 아셰리아를 괴롭혀왔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도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요."
"네."
"넘길까요?"
"... 네."
거기에, 아셰리아로서는 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두렵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다르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셰리아는 자신을 돌보아주던 시녀들에게 수많은 색이 보인다고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어린 아이의 귀여운 발상이라 생각할 뿐, 제대로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그에 아셰리아는 깨달았다. 자신은 남들과 다르고, 자신이 보는 세상을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아셰리아는 자신이 보는 세계를 타인에게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방금 나간 음식까지 다 정리되어 있네."
"그렇네요."
"저희가 더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죠?"
"네. 어르신께서 엄청 꼼꼼하시네요."
어느새 장부는 마지막 장까지 도달해버렸지만, 아셰리아는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였다.
선생님이 혹시나 물어보신다면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할까. 아니면 거짓말이라도 해야 할까.
솔직하게 말한다면 자기 말을 믿어주시지 않을까 두려웠고, 거짓말을 한다면 자신이 그 죄책감을 견뎌내지 못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때가 와버린 것일까.
"아셰리아님."
시하는 아셰리아의 이름을 불렀고,
'지금쯤 물어보시려는 걸까.'
아셰리아는 반쯤 체념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 네."
"혹시 불편하세요?"
"네?"
하지만 시하는 의외의 것을 물어버렸다.
"제 무릎 위에 있는 거. 불편하세요?"
"... 아뇨."
"그럼 이 상태로 잠시만 쉴까요. 음식이 될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은 것 같은데."
그리 말하면서, 시하는 등받이에 자기 몸을 맡겼고. 그에게 안겨있는 아셰리아 역시 조금은 뒤쪽으로 몸이 기울여버렸다.
선생님 위에 누워버린 듯한 자세가 된 아셰리아.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끼며 다급히 말했다.
"서... 선생님."
"네?"
"내려주세요."
"불편하셨으면 진즉에 말씀하시지."
"그런 건 아니고..."
사실 불편하다기보다는 편했다.
물론 그가 질문할까 두려워서 심적으로는 불편했던 게 맞지만, 그걸 제하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동경하는 선생님의 품은 너무나도 포근했다.
이내 시하는 아셰리아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의자에 그녀를 앉혀두고 자리를 일어났다.
"자. 공주님께서 앉아 계세요."
"……."
"와. 이런 책도 다 있네..."
아셰리아로서는 정말이지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집무실 안에서도 '확신하게 된 이유'를 물으셨으니, 단둘이 남았을 때 당연히 물으실 줄 알았다.
하지만 시하 선생님은 그에 관심도 없다는 듯이, 고블린 노인의 책장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다.
이쯤 되면 아셰리아가 오히려 궁금해진다.
"저기. 시하 선생님."
"네. 왜 그러세요. 공주님?"
"왜 물어보시지 않는 거예요?"
"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시하.
그런 그에게 아셰리아는 침을 삼키며 물었다.
"방금 7번 모험가의 면접 도중에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확신한 이유요."
"아."
그에 시하는 책 하나를 뽑아 들며 답했다.
"제가 그걸 물어봤으면 하시나요?"
"그건..."
자신이 호기롭게 물었건만, 아셰리아는 그의 질문에 어쩔 수 없이 말끝을 흐리게 되었다.
아무리 동경하는 선생님이라도, 지금 그 이유를 물어보신다면 제대로 답할 자신이 없다.
아니, 오히려 동경하기에 답할 수 없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만약 선생님께서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기에.
아셰리아의 침묵에 시하가 말했다.
"공주님만의 이유가 있으셨겠죠."
"네?"
"저는 그 이유가 무엇이건 딱히 신경 쓰지 않아요. 제가 알고 있는 공주님을 믿으니까요."
"……."
"그러니까.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필요한 말이라면 공주님께서 말씀해주셨겠죠."
고블린 노인의 책을 읽으며 답하는 시하.
아셰리아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이토록 나를 믿어주시는데.'
나 역시 모든 걸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 아셰리아는 애써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게..."
"아셰리아님."
"네."
"억지로 말씀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지금은 한껏 긴장하고 계신 게 제 눈에 보이거든요."
"……."
"언젠가 편하게 말씀하실 수 있을 때. 그때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저는 어디 안 가니까요."
그제서야...
아셰리아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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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방에 돌아온 고블린 노인이 보게 된 것은, 스승의 무릎 위에 앉은 소녀가 책을 읽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 * *
왕도는 크게 네 개의 거리로 구획이 나뉜다.
왕성과 귀족 거주구에 닿아있는 북쪽 거리.
유학생이 통행하는 동쪽의 아카데미 거리.
용병들과 외지인들이 생활하는 남쪽 거리.
마지막으로 시민들이 기거하는 서쪽 거리.
각 거리에는 여러 협회와 길드가 존재하며, 그들은 각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자네는... 남문 상인회장이군."
"기억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공작님. 저와는 구면이셨지요?"
"안녕하십니까. 서쪽 마도구 길드의..."
공주님께서는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셨으니, 조금은 가벼운 기분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다.
전부 고블린 주방장님의 덕이라 해야 할까. 둘이서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공주님은 온종일 마음에 짐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 역시 공주가 걱정되어 이 자리에 집중할 수 없었겠지. 그 점에서 주방장님의 제안을 들은 것은 여러모로 다행인 일이었다.
"자. 인사는 그만하고."
왜냐하면 내게 이 자리는 너무 중요하니까.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라면 꼭 거쳐야 하니까.
"회의를 시작하지."
이 자리는 내게 있어 전쟁터와 마찬가지.
나는 적의 팔다리를 자르기 위해 이곳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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