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59화 (159/215)

〈 159화 〉 2­123. 호의가 계속되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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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3. 호의가 계속되면 (1)

지금 이 비공개회의에는 왕도 내 대부분의 단체장이 모여 있다.

"먼저. 남문 용병 길드를 비롯한 여러 용병 길드의 횡포에 맞서 정의를 집행하여주신 이시하 공작께 큰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여기에 더해. 국왕 폐하께서 하해와 같은 은혜를 내리셨으니. 일개 장사치에 불과한 저희가 큰 감사를 드려야 마땅한 일입니다."

회의의 표면적인 명분은 용병 길드의 횡포에 당하던 모든 이들의 보상.

하지만 명분은 명분일 뿐. 여기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받아먹기 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시간 아깝네. 왜 저런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해. 안 그래도 바빠 죽겠구만.'

나는 공치사를 늘어놓고 있는 서문 상인회장에게 말했다.

"서문 상인회장. 이제 공치사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이곳 말고도 가봐야 할 곳이 많거든."

"아. 공작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래야죠."

그제야 서문 상인회장은 자리에 앉았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타국과 거래하며 대규모 상단을 운영하는 무역상들. 각종 무구나 마도구를 깎다 나온 장인들. 요식업이나 소매에 종사하는 영세 상인들. 이들이 종사하는 직종은 정말 다양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각 길드와 협회의 피해 내역은 재상부를 통해 제출했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그래도 직접 들어봐야겠지. 자네들 역시 용병 길드의 횡포에 많이 당해왔던 것 같더군."

"아무렴요. 공작님. 그것들이 보호비 명목으로 얼마나 큰 돈을 요구하던지..."

"그래. 그랬겠지."

"폐하께서 드디어 결단을 내리시다니. 여기 모인 이들은 그 결단에 감탄할 뿐입니다."

"일단 큰 곳부터 차근차근 들어보자고. 다음은 각 거리의 상인회에서 말해보도록."

내 말에 왕도의 각 거리를 대표하는 상인회장들이 말을 꺼낸다.

보호비로 돈을 뜯겼다느니, 용병들이 횡포를 부렸다느니. 전부 자신들은 피해자라 주장하며, 보상을 원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그래도 약간 다른 곳이 있다면 북쪽 거리. 북부는 왕궁과 맞닿아 있어 귀족들이 많이 살다 보니, 용병 길드의 입김이 덜 닿았나 보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굴리는 사업의 규모가 큼지막한 자들의 푸념은 전부 듣게 되었다.

그리고.

"각 거리의 상인회의 말은 대부분 들었고. 영세 길드나 협회장들은 따로 할 말이 있나?"

내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이 자리에서 감히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어찌 보면 이게 당연한 일이지.'

사실상 각 거리의 상인회장들이 여기 모인 사람들을 전부 대표한다고 봐도 되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 설명이다.

'어라. 저 사람은...?'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한 사람이 손을 들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할 말이 있음."

저 듣기 껄끄러운 음슴체. 작은 키에 4등신인 땅딸막한 체구. 북슬북슬한 황색 수염과 모히칸 헤어. 전신에서 '나는 장인이다'라는 느낌을 주는 중년의 드워프였다.

나는 막상 가만히 있었지만, 내 근처에 앉은 상인회장들이 그를 저지하려 한다.

"룩스 벨렌카야. 네놈 따위가 말할 것은 없다."

"대장간 길드는 이미 피해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나."

"공작님께서는 일정이 바쁘신 분일세."

나는 저 사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룩스 벨렌카야. 그는 서문 거리에서 작은 대장간을 운영하는 드워프다.

처음 왕도에 도착한 이방인은 루시아 여왕과의 알현을 마친 후 거리로 나오게 되는데, 그때 첫 퀘스트를 주는 인물이 저 대장장이다.

옛날 RPG 게임에서는 게임 초반부터 플레이어를 친절하게 맞이해주는 대장장이 캐릭터가 꼭 있었지 않나. 그런 사람이라 보면 될 것이다.

"왜 나는 발언이 불가능한 것임?"

…….

그래도 말투가 영 부담스럽다.

분명 룩스 벨렌카야는 내게 옛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사람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캐릭터가 아닌 실제 인물이 저런 식으로 말하고 있으니... 조금 그렇다.

'그래도 저 사람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발언한다면 나야 편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나는 룩스에게 말했다.

"발언을 허가한다."

"고... 공작님!"

"저 자의 말은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듣겠다는데 왜 자네들이 가로막는 건가?"

내 물음에 남문 거리의 상인회장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저희는 이미 상인회 의결에서 합의를 마쳐둔 상태입니다. 지금 와서 저자가 다른 말을 하는 것은 각 상인회의 규정을 위반하는 일입니다."

규정. 의결. 합의. 정말 그럴듯한 단어들이다.

얼핏 듣기만 하면 각 상인회가 민주주의를 따르면서 공익을 추구하는 줄로만 알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민낯을 알고 있고, 이미 이들에게 당한 아이들을 거두기도 했었다.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

"그 규정이란 무엇인가."

"상인회와 교류하는 단체, 혹은 개인은 상인회 의결에 따라야만 한다. 그런 겁니다."

"그래서. 나 역시 그 의결에 따라야 하는가."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상인회 규정이 왕국법에 우선하는가."

"아닙니다."

"그럼 내가 저자의 말을 들어도 상관이 없겠군."

남문 상인회장의 말을 가볍게 뭉개자, 아카데미 거리의 상인회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기다려주십시오. 공작께서 아무리 왕실 가정교사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신들, 우리 상인회를 존중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상인회가 왕실에 어떤 공헌을 하는지는 공작님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나는 이미 존중하고 있었다만?"

"제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더군요. 오히려 저희 입장을 무시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물며 공작께서는 우리 상인회의 일원이나 마찬가지이신데 말이죠."

"무시. 거기다 상인회의 일원이라..."

정말 웃기는 이야기다.

생떼를 들어주지 않는 것을 무시라 일컬으며, 아카데미 거리의 베이커리 하나를 후원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일원으로 취급하는 셈이니까.

일개 상인이 공작에게 기어오르는 상황.

누군가가 본다면 참 미쳐 돌아가는 상황이라 하겠지만, 어찌 보면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상업의 발달은 기존 정치 체제를 무너뜨리는 요인 중 하나였으니까.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세력과 결집하고, 기존 체제를 서서히 무너뜨린다.

이것은 당연한 역사의 흐름이며, 현재 이들의 자본력과 입김만큼은 어중간한 귀족들보다도 훨씬 강하다.

'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면 안 되지.'

여긴 에퀼리아가 아닌 에우데미아다. 왕국에서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힘을 허락한 건 맞지만, 이딴 식으로 기어오르라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회장. 더 할 말은 없나."

"네."

"내 말을 시작하기 전에 묻지. 남문, 서문, 북부 상인회장. 자네들은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가?"

내 물음에 회의장에는 침묵이 깔렸다.

여기서 침묵은 아카데미 상인회장의 말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침묵을 깨고 한 사람이 말했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알겠네. 북부 상인회장. 그럼 자네를 제외한 세 사람에게만 말하도록 하지."

"... 감사합니다. 공작님."

내게 감사를 표하는 북부 상인회장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그를 지켜보던 다른 세 명의 회장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세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살던 세계에는 이런 말이 있었어. 호의가 계속되면 둘... 아니 권리인 줄 안다."

지금 상황이야말로 이 말에 부합한다.

지금까지 미샤 베이커리에 해가 갈까 싶어 오냐오냐해줬더니, 이 자리에서마저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으니까.

거기다. 저 새끼들은 현 왕실에게 받은 은혜는 잊고 뒤에서는 칼을 갈고 있던 놈들이다.

직접 '귀족다움'을 보이기는 싫지만, 이 쓰레기들 앞에서는 '귀족다움'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아카데미 상인회장. 자네가 방금 내게 한 말의 의미는 제대로 알고 있는가."

"...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분명 자네들을 존중하고 있었어. 남문 상인회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차근차근 그의 의견을 물었지. 한데 자네는 내게 뭐라고 했었나."

"……."

인제야 북부를 제외한 세 명의 상인회장들의 표정에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래.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볼 수 있으니까. 지금껏 저 쓰레기들의 눈에는 내가 벼락출세한 젊은 표류자로만 보였겠지.

또한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기 마련. 내가 용병 길드에 직접 출두했다는 사실은 접했겠지만, 평소의 내 모습을 생각하며 우습게 여겼을 것이다.

대중 앞에서는 헤실헤실 웃는 모습만 보이며, 자기들 말에 저항 없이 따르는 멍청한 임시 공작. 그 생각이 없었다면 방금 같은 말은 하지 않았겠지.

"자네가 말한 존중이란, 자네의 말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전부 수용하라는 것인가."

"... 아닙니다."

"그리고. 자넨 내가 취미 삼아 후원하는 작은 빵집을 들먹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나."

"……."

"몇몇 쓰레기 놈들과 용병 길드에 빌붙어있다 보니, 내가 아주 우습게 보였나 보군?"

내 폭탄과도 같은 선고에, 세 명의 상인회장들은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고... 공작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인제 와서 용서해줄 내가 아니다.

'진짜 무시가 뭔지 보여줘야겠네.'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음슴체를 쓰는 드워프 대장장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룩스 벨렌카야."

"옙."

"자네는 명민하니, 이쯤 되면 내가 어떤 의도로 이곳에 왔는지는 알겠지. 발언하라."

내 말에 상인회장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고... 공작님!"

"닥쳐라."

나는 그 자리에서 한 손을 들어 올린 후 허공에서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시온 자작령에서 몇 번을 썼는지도 모를 빙창이 그의 테이블에 쿵­ 내리꽂혔다.

"이이익..."

"나는 이 자리에 필레몬 국왕 폐하의 대리인으로 온 것이다. 용의자들은 입을 닥치도록."

아주 고자를 만들어 줄까 싶었지만, 그건 참았다. 요나가 그런 망측한 꼴을 본다면, 내게 과잉 진압이라며 따질 게 뻔하니까.

겁먹은 한 남자의 신음이 낮게 깔린 와중에, 드워프는 묵직한 말투로 자기 말을 이었다.

"북부 상인회 제외. 나머지 세 상인회는 용병 길드와 결탁. 휘하 길드에 텃세를 부렸음."

"저 새끼들. 용병 길드와 다를 바 없음. 가게에 상납금도 걷고. 보상금도 꿀꺽할 생각임."

여기까지 말한 드워프는 입 안의 침을 꿀꺽 삼켰고.

세 상인회장을 슥 둘러보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상납금 일부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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