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2124. 호의가 계속되면 (2)
* * *
2124. 호의가 계속되면 (2)
여러 길드나 협회가 생겨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에우데미아 왕가의 관용 덕이었다.
물론 그 관용에는 약간의 계산도 포함되어 있긴 했지. 산업이 발달하면 세수가 늘어나고, 그 세수로 국방을 강화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결과까지 예상한 사람들이 있었을까. 자본력을 확보한 상인들이 더 큰 이익을 탐하고, 다른 집단까지 끌어들이려는 이 모습을.
드워프가 말을 마치자, 남문 상인회장이 내게 말했다.
"공작님. 저건 모함입니다! 조합원들에게 걷은 돈은 전부 발전 기금이었습니다. 전부 거리를 위해 쓰였을 뿐, 저희 주머니에 넣은 돈은 없습니다!"
"그런가."
"당연하지요. 저희 역시 용병 길드에게 당한 피해자들이었으니까요!"
"아카데미 상인회. 그쪽 의견은 어떤가. 자네는 내게 찔리는 게 있을 텐데."
"……."
내 질문에 아카데미 상인회장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남문. 자네도 내게 찔려야 정상인데..."
"예?"
"내가 거둔 수인 아이들이 있는데 말이야. 남문 용병 길드의 함정 의뢰를 받은 녀석들이었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클로에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나."
남문 상인회장은 긴장된 목소리로 답했다.
"제 기억에는 없군요."
"하긴. 자네에게는 돈이 안 되는 이름이었으니 기억할 필요가 없었겠군. 용병 길드장 그 대머리 놈이 어린 수인들에게 일을 주지 말라, 그런 협조 공문을 보냈을 텐데 말이야."
"... 그거참 불쌍한 녀석들이군요. 허나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저희는 용병 길드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군. 끝까지 네놈들은 그 범죄자 놈들과 협력 관계가 아니었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런 도중 아카데미 상인회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용병 길드로부터 입을 수 있는 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따라야만 했습니다. 공작께서는 지위와 명성이 있으시니 그 수인들을 거두실 수 있으셨던 거지, 저희는 그럴 힘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거야 나도 잘 알고 있어."
지금 저 말은 분명 맞는 말이다.
클로에를 비롯한 수인 녀석들은 이제 내 테두리에 들어온 인간들이지만, 저 상인회장들에게는 거리에 널리고 널린 수인에 불과하다.
그런 녀석들을 도우려다 용병 길드에 피해를 보느니, 매정하게 내치는 게 정답이라 볼 수 있다.
"허나 자네들은 지금 논점을 흐리려 하는군."
하지만 지금 저 말의 의도를 곰곰이 따져보자면, 아주 처맞는 말이다.
나는 다시금 음슴체를 쓰는 드워프를 불렀다.
"룩스 발렌카야."
"옙."
"방금 한 말을 그대로 다시 해보아라."
"북부 상인회 제외. 나머지 세 상인회는 용병 길드와 결탁. 휘하 길드에..."
"거기까지."
"……."
"지금 묻는 건 용병 길드와의 결탁 여부다. 내가 언제 그 수인들을 어찌 대했나를 물었나?"
방금 상인회장들의 말은 내가 수하들을 염려하고 있다는 프레임을 씌우면서, 자신들 역시 어쩔 수 없었다는 처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대화의 중요한 점은 가리고, 주안점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쳐맞을 짓이라는 거다.
내 말에 비리 상인회장 측이 말했다.
"공작님. 약자가 일방적으로 상납을 바치는 것을 결탁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상호 간에 공통된 목적과 이득이 있어야만 결탁이라 할 수 있겠지요."
"공작께서는 그 증거를 대시길 바랍니다."
"아니, 사법부 입회하에서 판결까지 받아 보죠."
"그래. 그게 좋겠소!"
뉴스나 일상 속에서 범죄자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서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지금 그중에 두 개가 나왔는데, 하나는 '증거 있냐?', 또 하나는 '법대로 하자'다.
하지만 나로서는 헛웃음밖에 안 나오는 상황이다.
'이런 멍청한 새끼들이 상인회장들이라니...'
아니, 정확히는 자신들의 돈이 많다는 이유로 남들을 한창 깔보고 있었기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거겠지.
자신들보다 상대적으로 돈이 없는 이들을 멍청하고, 게으르고, 쓰레기 취급하는 졸부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용병 길드의 비밀 장부를 꺼내며 말했다.
"네놈들 눈에는 용병 길드가 그리도 멍청하게 보였나."
"……."
"여기 이 비밀 장부에는 네놈들과 거래한 내역이 전부 남아있더군. 지금부터 말해주지."
나는 그 장부에 적혀있던 내용을 전부 읊었다.
상인회 가입을 거부하는 괘씸한 자들을 벌해달라. 납품을 거부하는 제작 길드에 용병들을 보내달라. 주변의 상권을 정화해달라. 환경을 정화해달라.
상인회는 내가 살던 세계에서 용역 깡패들이 하던 일들을 용병들에게 위탁하고 있었다.
모든 내용을 말한 나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원래 이 자리에서 공표할 생각은 없었네만. 자네들이 내 머리 위에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군. 이제 법대로 가보자고."
내 선고에 남문과 서문 상인회장은 얼이 빠진 듯이 멍하게 있었고, 아카데미 거리의 상인회장은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불끈 쥔 두 주먹은 부들부들 떨고 있으며, 입을 씰룩거리는 걸 보면 상당히 열을 받은 듯하다.
'저러다 터지면 오히려 좋지.'
아니나 다를까, 그는 외쳤다.
"경호대! 공작을 향해 조준하라!"
"전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입 닥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그의 외침과 함께, 드넓은 회의장 사면에 서 있던 경호병들이 나를 향해 마도구를 조준했다.
경호병의 숫자는 열두 명. 그들이 들고 있는 마도구의 모습은 1차 세계대전에서 썼을 법한 볼트 액션 소총을 닮았다.
'마탑의 기술이 적용되지 않은 골동품이네...'
내가 엔크라테아의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는 사이, 남문과 서문 상인회장이 반발했다.
"아니. 당신 미쳤소?"
"왕국의 공작에게 조준 명령을...!"
"발악하다 죽으나, 체포당해서 죽으나, 죽는 건 똑같소. 차라리 이게 살 가능성이라도 있지."
그게 맞긴 하지.
상인회장이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고, 아카데미 숲 너머의 협곡으로 달린다면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제부터가 틀렸다는 게 문제다.
"회장. 저 마도구로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상인회가 취급할 수 있는 공격용 마도구의 위력은 끽해봐야 초급. 지금 저 모델은 악인기 시절 에퀼리아에서 유래한 리버티 소총이군. 마법진이 그려진 총탄을 한 발씩 장전한다는 단점이 있지. 저걸로는 내 방어 마법을 못 뚫어."
"허세부리지 마시오. 공작. 여러 방향에서 날아오는 마탄을 전부 막겠다는 뜻이오?"
"그래."
"하하하하! 이 세상에 온 지 고작 반년 된 인간이 그런 말을 해봐야 전혀 믿기지 않소!"
아!
나는 순간 이해해버렸다.
'소설 속 주인공이 힘을 숨김.'
왜 다른 사람들이 그런 부류의 소설에 열광하는지 공감할 수 없었던 나였다. 하지만 막상 내가 그런 상황에 놓여버리니, 깨달았다.
지금 내가 저 쓰레기 놈을 기만하고 있다는 자각에 마음 구석구석이 시원해졌다.
이것이 댓글에서 말하던 사이다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회장에게 말했다.
"쏴 봐."
"소원대로 해드리지. 쏴라!"
그의 말에도 경호대는 눈치를 볼 뿐, 쏘지 않았다.
그에 답답해진 아카데미 거리의 상인회장은 소리쳤다.
"이 자리를 탈출하게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주마. 쏴라! 쏴! 이 거지 같은 용병 놈들아!"
그제야 경호대는 방아쇠를 당겼고, 총구에서는 탕! 소리와 함께 응축된 마력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마탄들은 전부 내게 닿지 못했다.
'어딜 조준하는지를 다 봐버렸으니...'
전부 내 머리를 조준한 탓에, 내가 마력 장벽을 머리 높이에 집중시키니 전부 막아버린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검집 덕분에 다 막았겠지만.'
그리 생각하고 있자, 아카데미 거리의 상인회장은 넋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막혔어?"
그리고 그의 너머로 한 경호대가 마도구를 재장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재장전하지 마라. 경고했다."
하지만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도구가 그려진 총탄을 약실에 집어넣는 그였다.
'어쩔 수 없지...'
내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공중에 생긴 얼음창 하나가 조용히 날아가 그의 팔목에 꽂혔다.
"으아아아악!"
"말을 들었어야지."
여러 단체장들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믿기지 않는 모양. 몇몇은 실신했고, 나머지는 자리에 앉은 채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지켜볼 뿐이다.
조금 전까진 회장의 협박에 멈추어 있었다면, 지금은 그 공포의 원인이 내가 되어버린 셈이다.
나는 검을 뽑으며 상인회장에게 다가갔다.
"회장. 자네에겐 혐의가 하나 더 있어. 바로 이번에 생긴 따끈따끈한 죄목이야."
"가... 가까이 오지 마!"
"죄목의 이름은 재앙유도협조죄야. 근데 이 죄에는 특별한 조항이 있어. 백작 이상 귀족들은 이 죄를 저지른 놈들을 즉결 처분할 수 있거든."
"히이이익!"
그에 회장은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회의장의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저기로 가면 더 잔인한 사람을 만날 건데...'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미리 부탁해둔 일이니, 분명 지금쯤이면 이 건물을 전부 장악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겁만 줄 생각이었지만. 회장이 자초한 일이니 말릴 생각은 없다.
그렇게 회장이 회의장 문에 다다랐을 즈음,
끼이이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회장은 그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티오리아의 이름으로. 그림자들에게 명한다."
그 건너편에는 빳빳하게 다려진 집사복을 입은 갈색 머리 미중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 평소라면 옅은 미소를 띠고 있을 그의 얼굴은, 오늘따라 유독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왕궁부장, 카일 티오리아가 말했다.
"이곳에 있는 역도들을 체포하라."
이내 그의 형상은 일렁거리듯 움직였고.
"아아아악!"
앞에 있던 회장의 몸은 지면으로 쓰러졌다.
"도망치려는 자들은 발목을 자르도록."
그의 선고와 함께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살수들이 회의장에 들이닥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