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61화 (161/215)

〈 161화 〉 2­125. 그림을 그려야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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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5. 그림을 그려야 한다 (1)

신속하게 회의장으로 침투한 왕궁부 그림자들은 각자 목표로 한 인물들을 잡아들였다.

북부를 제외한 각 거리의 상인회장들. 그리고 그들에게 협력적이었던 다른 단체장들.

여기에 한 가지 기준을 더해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 중 비밀 장부에 적혀있던 사람들이나 현 왕실에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들까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게 찜찜하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제일 안전해.'

이 세상에 도착한 뒤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위화감이란,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을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다. 그 게임에서도 엑스트라는 많았고, 그중에는 이름마저 나오지 않는 단역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이상하게 생각한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왕도를 움직이는 큰 손들 중, 내가 모르는 단체와 인물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점이었다.

게임의 특성상, 규모가 있는 단체들은 서브 루트라도 꼭 만들어 짚고 넘어가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게임에 5년을 갈아 넣은 내가 저 상인회장들이나 몇몇 고위 귀족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하나의 가설을 세웠었다.

게임 속 기록에 따르면, 본편 시작 전에 크나큰 사건이 벌어지는 건 확실하다. 그 시기에 필레몬 국왕은 게임 내 최악의 재앙에게 죽고, 왕국의 국력은 크게 쇠퇴한다.

그리고 그 흑막은 '루시아 여왕'이 언급한 데릴라. 왕국 내부에는 그 흑막의 협력자가 존재하며, 그 협력자들은 전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루시아 여왕'이 데릴라를 찾지는 못했더라도 왕국이 멸망하지는 않았으니까. 흑막의 협력자들 정도는 처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내가 모르는 사람들은 그 사건에서 아군 희생자이거나, 숙청당한 적들. 고로 나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전부 경계해야 한다.

이 가설에 확신을 더했던 것이 마크 테크니였다.

내게 있어 마크 테크니는 모르는 사람이고, 해방 교단을 도와 국가를 전복시킬만한 재앙을 기르던 인물. 거기다 마지막으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어떤 단체의 일원이기도 했다.

어렴풋이 내 마음 속에 존재하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준 인물이 그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지금의 나는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철저히 구분하고, 나아가 '모르는 사람' 중 누가 아군일지를 머릿속으로 고민하는 중이다.

'마크는 분명 악이다. 그럼 왜 테크니 가문은 살아남은 걸까. 왜 에딘은 본편에 없는 걸까.'

'에딘이 마크와 대립하던 중 전사했고. 그 덕분에 테크니는 양자를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게 제일 가능성이 큰 루트야.'

'소피아와 에피스템은 각자의 영애들이 본편에 나온다. 아마 두 가문은 선이나 중립이겠지.'

그렇게 그림자들이 쓰레기들을 치우는 모습을 구경하며 고뇌에 빠져있자, 왕궁부장 카일 티오리아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 선생. 자넨 괜찮나."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아직도 싸늘하게 느껴지는 표정을 띠고 있다. 그런 분위기와는 전혀 맞지 않는 염려의 말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대놓고 조준하는 모습을 다 보여주는데, 못 막으면 그게 더 이상하죠."

"……."

솔직히. 에퀼리아제 마도구를 사용하는 캐릭터들은 급습에 강한 편이었지, 조금 전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운영하면 지기 십상이었따.

거기다 호위병들의 소총이 민수용이었던 점도 크게 작용했지.

에퀼리아 마도구들은 민수용과 군용으로 나누어지는데, 민수용은 마법진이 그려진 총알을 한 발씩 장전하는 반면, 군용은 마법진이 내장되어 있어 연사할 수 있다.

만약 에퀼리아 상류층들이 사용하는 군용 마도구였다면, 나도 마냥 무시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 상처도 없는 몸을 보이고 있었더니...

"후우. 내가 자네의 몸 상태를 염려한 것 같나."

왕궁부장, 카일 티오리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 몸 상태 외에 그가 걱정할 일이 어디 있다고 저런 말을 하는 건가.

내가 아무 말 없이 있자, 왕궁부장은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 무슨 생각이라니요."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을 적으로 돌리고 있는 건가."

"……."

"용병 길드. 왕도 상인회. 이들의 뒤에는 수많은 귀족이 얽혀 있겠지. 자네는 지금, 그들 전부에게 선전포고를 한 셈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내 시원한 대답에 카일 티오리아의 싸늘한 얼굴은 무너져내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가 물었다.

"진정 그 의미를 알고 있는 건가...?"

"네."

"내 자네의 안목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네. 저들을 체포할 증거 역시 차고 넘칠 정도야. 이런 놈들과 결탁한 자들도 정상은 아니겠지."

"……."

"허나. 왜 하필 자네가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카일 티오리아는 이전에도 내게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의지하라는 듯한 말을 했었다. 이번에도 아마 비슷한 맥락에서 하는 말이겠지.

하지만 나는 이 부담을 오롯이 짊어져야만 한다.

"분명 저희가 의심하고 있는 적의 뒤에는, 흑막이 따로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

"그 흑막이 자리를 박차고 나올 만큼. 저는 놈들의 가장 큰 위협이 되어야 합니다."

의심하고 있는 적. 왕궁부장은 나와 하는 대화를 전부 방음 처리하고 있겠지만, 나는 굳이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너무 뻔하니까.

현 왕실에 비협조적이며, 내가 모르는 사람 중 가장 권력이 강한 인간은 하나뿐이다.

하지만 그 인간은 내게 막상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 오동통한 돼지는 결투에 패한 대가로 맹약 마법에 걸린 상태니까. 나는 그런 돼지 놈을 잡으려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 왕궁부장님은 오늘따라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행동의 이유 따위는 중요치 않네. 그 위협을 왜 하필 자네가 감수해야 하는가."

"제가 만만하니까요."

"만만하다니..."

"국왕 폐하나 다른 분들께서 이 역할을 맡으신다면, 아무리 그 돼지 놈이라 해도 냄새를 맡을 게 분명합니다. 흑막 역시 마찬가지죠."

"……."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표류자라면 말이 다릅니다.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눈을 돌리고, 저를 죽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제가 표적이 되어야 일이 쉬워집니다."

차남회를 비롯한 부패 세력을 위협하는 주체는 나여야만 한다. 그 말에 왕궁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이게 정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약간 화가 나 있는듯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자네의 목숨값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네."

"... 그런가요?"

"그래. 우리 왕국에 있어, 자네의 목숨은 너무나도 무거워졌어. 경거망동하지 말게."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

농담으로 응수하자, 왕궁부장은 오늘 회의장 문에서 보여주었던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 40년간 그림자로 활동해온 그의 관록 때문일까. 그 눈빛에 꿰뚫리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나의 존재는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생각이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숨기며 말했다.

"에이. 알았어요.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십니까. 안 죽으면 되죠. 안 죽으면."

그에 왕궁부장은 말 없이 나를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 수하들이 일을 마치자 그는 말했다.

"누구 덕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니 먼저 가보겠네. 자네도 하던 일 마저 하시게나."

"... 네. 오늘은 고마웠어요, 부장님."

"하아... 내 말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끝까지 그 차가운 표정은 그대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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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에 남은 단체장의 숫자는 방금의 절반에 불과했다.

특히 상인회장 정도의 지위를 가진 인물은 오직 북구 상인회장뿐. 나머지는 전부 제작 길드나 영세 점주들이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고지했다.

"자. 이제 쓰레기들은 전부 치웠고. 이제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모였군."

"내가 이후에 약속이 있다 보니, 회의는 최대한 빨리 끝냈으면 한다. 협조를 부탁하네."

내 말에 음슴체 드워프가 말했다.

"회의는 도대체 뭘 한다는 거고. 왜 빨리 끝내야 한다는 거임?"

몇몇 쓰레기들의 발목이 잘려나가는 꼴을 보고도 참 담력이 강한 드워프였다.

다른 상인들은 겁에 질려 나를 경원시하는 중인데, 룩스만이 나에게 대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게임에서도 조금 이상한 사람이긴 했지...'

룩스는 이방인이 온갖 비현실적인 일을 하더라도 묵묵히 장비만 제공해주던 대장장이였다. 그런 면이 이 회의에서도 나오는 듯 하다.

'뭐. 이유 정도는 먼저 밝혀두는 게 좋겠지.'그런 생각으로 나는 눈 앞의 사람들에게 고했다.

"먼저. 빨리 끝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나는 한껏 무게를 잡으면서 말하는 중이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

"... 뭐?"

"왕궁 정원에서 공주님과 그림을 그려야 한다."

"... 갑자기요?"

"아이와 한 약속이니까. 지켜야지."

""…….""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

하지만 사실인걸 어떻게 하나. 나라에 한 명 뿐인 공주님과의 약속이다. 이건 무조건 지켜야지.

방금 주방장 어르신의 방에서, 아셰리아 공주가 제안한 새로운 약속을 수락해버린 나였다.

'메디아 호수에서 꽃구경을 못 한 대신, 왕궁 정원에서 그림을 같이 그려주세요.'

그 부탁을 들은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야 꽃구경 약속은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까.

... 나도 사람인지라, 깜빡하는 게 있는 거다.

북부 상인회장이 조심스럽게 내게 되물었다.

"고... 공작님. 잘 못 들었습니다?"

"굳이 다시 말해야 하나. 공주님과 그림을 그리겠다는 약속을 했으니, 빨리 가봐야 한다고."

"... 죄송합니다."

내 고압적인 대답에, 각종 단체장들은 옆 사람과 눈을 마주하며 자기 귀를 의심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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