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2126. 그림을 그려야 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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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6. 그림을 그려야 한다 (2)
"자. 이제 진짜 회의를 시작하지."
어수선해져 있던 분위기는 내 한 마디에 모두 정돈되었다.
사실 조금 전의 회의는 쓰레기 수거를 위한 함정이었을 뿐, 진짜 회의는 지금부터다.
... 그래봐야 방금보다 할 것도 적겠지만.
나는 나를 보는 대중들에게 말했다.
"조금 전 잡혀간 놈들은 시온 자작령의 재앙 출몰에 연루되어있는 자들이다. 그 기사는 며칠 뒤 왕도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참고하도록."
내 말에 다시금 회의장에 웅성거림이 강해졌다. 일개 상인들이 재앙 출몰과 연루되어있다니, 그 말 자체를 믿을 수 없는 심각한 이슈니까. 지금 이 자리의 단체장들은 그 연루라는 게 무슨 뜻인지에 대하여 수군수군 토론하는 중이다.
반쯤은 억지 논리이긴 하지만, 그 상인회장들이 운영하는 상회에서 시온 자작령에 화물을 실어 보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거기다 어떤 프레임으로 그들을 공격할지는 전부 정해둔 상황인지라, 별 차질은 없을 것이다.
"조용."
나는 다시금 회의장에 남아있는 상인들을 조용히 시키고 말을 이어 나갔다.
"먼저. 가장 큰 쓰레기들을 치워냈으니, 그 자리에 앉을 자를 정해야겠군. 좋은 방법을 가지고 있는 자는 없나?"
"……."
"없는 것 같군. 그렇다면 일단 임시회장을 지명하지. 남문은 룩스 발렌카야. 아카데미 거리는 미샤 베이커리의 점주. 서문 거리는 티오리아의 약초원에서 대리하지. 이의 있는 사람?"
"없습니다."
"찬성합니다."
"공작님의 뜻에 따릅니다."
조금 전에 피를 봐서 그런지, 정말 고분고분하게 내 말에 따르는 단체장들이었다.
특히 아카데미 거리에서 미샤 베이커리가 상인회장이 된다면 내가 직접 감시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들마저도 반대가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단 한 명, 음슴체 드워프는 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는 손을 들고 말했다.
"이의 있음."
"그래. 룩스 발렌카야. 말해라."
"난 쇠를 두드린다고 바쁨. 다른 사람 시키셈."
시키셈이라니. 현실에서 저런 말을 쓰는 이를 만났다는 사실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하지만 내가 말해봐야 저 말투는 영원히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대장장이 정신 때문이다.
철을 두드리는 일 외에 모든 일을 간단히. 그 집념에서 나오는 행동 중 하나가 저 음슴체니까.
어찌 보면 전임 상인회장들을 신고한 이유도 대장장이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겠지. 게임 속 룩스는 그때도 각종 길드와 신임 상인회장의 견제에 당해 의뢰 수주도 못 할 정도였다.
실력은 있는데 사회생활을 못해서 썩고 있는 장인. 그것이 룩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다. 달리 말하자면, 실력 하나만으로 대장장이 길드 중 하나의 수장을 떠맡은 자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룩스가 임시 회장직을 맡아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는 대장장이 일에 열중할 뿐, 다른 일은 최소한만 수행하고 허튼짓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
굳이 이런 방법까지는 쓰기 싫었지만, 게임 속 지식을 이용해 그를 건드려봐야겠다.
"룩스. 방금 그런 놈들이 회장직을 맡게 된다면, 또 대장장이 일에서 손을 놓는 날이 올 텐데."
"나라가 잡아 주면 되잖음."
"이번 일은 저 쓰레기 놈들이 반역에 동참했으니 내가 직접 온 거고. 원래 상인회는 자율성을 인정받은 집단이라 왕국에서 건들기 힘들어."
"……."
내 말에 룩스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으나, 그래도 회장직을 맡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대장장이 길드장 일도 하기 싫은데 왜 억지로 시키냐는 거겠지.
나는 그가 물만한 미끼를 던졌다.
"하아. 저택 창고에 악인기 시절 무구들이 잔뜩 있는데, 개량이 필요할 것 같단 말이지."
반응은 있었다.
움찔움찔 떨리고 있는 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 이건 조금만 더 뿌리면 확실히 문다.
"검. 너클. 완드. 방패. 종류가 너무나도 많은데. 이걸 맡길만한 믿음직한 대장장이가 없네."
여기까지 말하자, 룩스가 말했다.
"그럼 내게 맡기셈."
"뭘 맡기라는 거지?"
"그 악인기의 무구라는 것들."
"아니. 상인회장도 못 하겠다는 무능력한 인간이 그 무구들을 제대로 만질 수나 있겠나."
"……."
룩스는 게임에서, 지나가던 여행자라도 그의 실력을 폄하한다면 열을 받기 쉬운 성격이었다.
거기다 상인회의 개입으로 일도 제대로 못 하던 이가 악인기의 무구라니. 내 말이 거짓 같아도 눈이 돌아갈 만 하다.
나는 그에게 연이어 공격을 날렸다.
"상인회가 할 게 뭐 있다고. 이번처럼 권력 휘두르는 게 문제였지, 발전 기금으로 거리 청소와 질서를 유지하는 거뿐이잖아. 그런 일도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악인기의 무구를 두드려."
"... 할거임."
"어허. 악인기 무구들은 못 맡긴다니까."
"상인회장 따위, 함. 그러니 악인기의 무구들도 내게 맡기셈."
"에이. 대가를 바라고 회장직에 지원하다니. 내 의뢰만 맡은 다음 내려놓으려는 속셈 아냐?"
내 말에 땅딸막한 음슴체 드워프는 나쁜 짓을 들킨 아이처럼 몸을 들썩였다.
'저 인간. 진짜 그러려고 했네.'
역시 성격 어디 안 간다고. 룩스의 대장장이 일을 향한 집념은 광기에 가까웠다. 그런 면모를 제일 잘 보여주는 부분은 바로 이방인에게 주는 첫 퀘스트였었지...
'무기 하나를 공짜로 줄 테니, 돈을 벌어서 내게 더 좋은 무기를 주문하라.'
클리어 조건은 오직 룩스의 대장간 방문하기. 그곳에서 이방인은 튜토리얼 무기를 받게 된다.
사실 이 의뢰를 이방인에게만 주는 것도 아니다. 일감이 없었던 룩스는 거리의 새내기 용병들 모두에게 이 일을 맡겼고, 오직 이방인만이 그의 대장간을 찾게 된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룩스가 말했다.
"회장. 하겠음. 뭘 하면 됨?"
"그 전에 그 말투부터 고치자."
"……."
"에휴. 그래.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역시나 말투만큼은 죽어도 못 고치겠다는 듯 입을 다물어버리는 룩스였다.
"이제부터 의문이 생긴다면 즉시 말하도록."
나는 회의장 전체를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부로 각 상인회나 길드는 왕궁부의 감찰을 받게 될 것이다. 감찰 내용은 별거 없어. 왕도 내의 단체들이 일부 부패 귀족과 결탁했다는 증거를 찾아서 말이야. 그걸 막으려는 거다."
내 말에 북부 상인회장이 물었다.
"정확히 어떤 결탁을 막는다는 것입니까. 저희들은 일부 귀족들의 후원도 받는 중입니다."
"좋은 질문이야. 후원을 받는 건 문제가 안 돼."
"그렇다면 어떤..."
"상인이나 기술자들이 귀족에게 상납을 바치게 되면 해당 귀족을 벌한다. 이 상납에는 금전과 재화 모든 것이 해당하지. 또한 귀족과 상인 간의 거래는 전부 왕실의 허가가 필요하다."
앞부분은 상인들에게 너무나도 큰 이득이 되는 조항이나, 뒷부분은 판매 내역을 왕실에 전부 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권 개입이 될 수 있다.
그에 회의장이 술렁거리자, 북부 상인회장이 다시 한번 대표로 물었다.
"공작님. 전자의 조건은 저희에게 너무나도 유리하군요. 하지만 후자의 조건을 받아들이기엔, 우리가 이해할만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이유라..."
"예. 어찌 보면 이는 왕국법마저 침해하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어떤 부분에서?"
"... 제 11조. 모든 왕국민들은 국가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그렇지. 그런 법이 있었지."
나는 회의장 의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내게 말을 걸었던 북부 상인회장은 혹시라도 자신이 도를 넘은 건가 긴장한 상태.
하지만 나로서는 고마운 질문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밝힐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 회장. 내가 방금 시온 자작령에서 재앙 출몰 사건이 일어났다고 했었지."
"예."
"그 사건은 계획적으로 발생한 것이네."
"... 뭐라구요?"
그 순간, 회장에는 침묵만이 감돌게 되었다.
... 모든 시선이 내 입을 향해버린 탓이었다.
"누군가가 재앙을 키워냈다. 그 방법은 이곳에서 밝힐 수 없으나,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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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그 발언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각 단체장은 내 말을 애써 부정하려고 하면서도, 너무나 태연한 내 반응을 보며 절망할 정도였다.
"북부 상인회장. 남은 일은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선처에 감사드립니다."
"자네가 그 쓰레기들 사이에서 청렴했기에 살아남은 것이다. 나에게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
"... 예."
그래도 이 사람이 회의장을 진정시키고, 당장 해야 할 일을 우선시한 덕에 회의가 빨리 끝났다.
거리에서 대기 중인 마차 근처로 나오니 낮 네 시.
'이제 길드로 돌아가서 공주님을 만나고. 왕궁에 도착하면 대략 여섯 시쯤 되겠네. 아니면 저녁을 먹고 출발하는 게 나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에게 부탁한 내용을 환기했다.
"다른 거리의 경우, 상인회장들이 신임이라 자네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네. 임시 상인회장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최대한 돕고, 도움이 필요하면 내게 말하게. 왕가에 거래 내역 승인을 요청할 때 쓸 양식도 통일해두고."
"예. 맡겨 주십시오."
"북부는 자네 덕에 꽤 깨끗한 문화가 형성되었다던데. 한번 만나보니 그 이유가 있었군."
"하하. 과찬이십니다. 저희 북부 상업 구역은 관리분들께서 여러 이야기를 해주시니, 거기에 미리 대응할 뿐입니다."
"그런가."
하긴. 왕궁과 바로 붙어있는 거리니까 그럴 만도 하지. 역시나 공공 기관 근처에 살면 치안이나 생활면에서 큰 이득을 보는 법이다.
그나저나...
'내 평판이 어떻길래 그렇게 겁을 먹었던 거야?'
나에게 창백한 얼굴로 다른 상인회장과 다른 입장이라고 말할 때나, 조금 전에 질문을 할 때도 상당히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관리들 사이에서 내 평판이 어떻게 되는가."
"... 예?"
"방금 자네의 태도를 보아하니, 영 좋은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
내 질문에 북부 상인회장은 진땀을 흘렸다.
"부담 갖지 않고 말해도 되네. 딱히 그 관리들을 찾아 벌하려는 의도는 없다네. 그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볼 뿐이야."
"하... 하하하하... 하하하..."
... 묻고 보니 떠오른 건데. 지금 이 상황은 교육부 장관 즈음 되는 사람이 갑자기 한 사업가에게 찾아와 민감한 질문을 건네는 게 아닐까.
아니. '공작'이라는 단어의 어감을 고려하면, 체감상 장관보다는 내가 더 높은 지위일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방금 상당히 꼰대 같은 질문을 해버린 셈인데...
북부 상인회장은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며 답했다.
"여러 의미로 날카로우신 분. 하지만 좋은 분이라고들 하셨습니다. 하하하하하!"
"... 그런가."
"예. 하하하하하!"
... 내 질문 하나로 이 사람의 사회생활 난이도를 너무 높여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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