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2127. 그림을 그려야 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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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7. 그림을 그려야 한다 (3)
서쪽 상인회에서 모험가 길드 본청까지 삼십 분을 달려 도착하자, 면접을 진행하던 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할 줄 알았었는데, 벌써 왔냐는 반응이었다.
면접 결과를 물어보면, 내가 간 뒤로 참가자들이 고분고분해져서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몇몇 용병들은 면접에 불참하고 도망간 것 같다고 하던데... 미리 요나에게 부탁해둔 것이 있으니, 그런 놈들은 성문을 나서기 전에 치안본부에 잡혔을 것이다.
이후 나와 아셰리아 공주는 모험가 길드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출발했고. 왕궁에 도착하니 시침은 벌써 여덟 시를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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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 입구 근처의 정원.
언젠가 밤하늘을 함께 구경했던 티테이블에서, 아셰리아 공주가 아샤에게 말했다.
"아샤. 저와 선생님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후궁에 가서 캔버스를 가지고 와주실래요?"
"……."
공주의 부탁에, 귀차니스트 메이드 아샤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처럼 그날 밤의 추억을 떠올린 듯했으나, 서로가 기억하고 있는 의미가 영 다른 것 같았다.
... 그 시선이 내 검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 해. 안 한다고. 그런 거 이제 할 필요가 없는데 내가 왜 하냐고. 너도 그땐 이해했었잖아."
"……."
"빨리 공주님 말대로 캔버스나 가져와."
"아샤. 시간이 없어요. 빨리 다녀와 주세요."
내 말에 이어 아셰리아 공주까지 채근하자, 아샤의 눈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 후 아샤는 다음과 같은 손동작를 취했다.
나.
너.
지켜보고 있다.
허튼짓 하면 죽는다.
그러고 나서는 후궁을 향해 뒷걸음질, 정확히는 문워크로 물러나는데, 나로서는 저 재능을 왜 여기서 썩히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공연이라도 한다면 일약 스타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아샤가 시야에서 사라지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에휴..."
공주와 둘만 남게 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저러니, 나로서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반년간 교사 노릇을 해왔다 보니 수업에는 잘 참여해주는데, 유독 이럴 때만 저런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만 있나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게...
'그 기억이 뇌리에 박혀있을 만도 하지.'
자기 주인에게 칼을 휘두른 사람을 경계하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나. 머리로 받아들여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세상에 많은 법이니, 아샤에게 나는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
내 한숨에 아셰리아 공주가 말했다.
"제가 나중에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
"그러실 것까지는 없어요. 이유가 있는걸요."
"아무리 그래도 반년이나 지난 일이에요. 그리 큰일도 아니었고요."
"공주님. 같은 일이라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법은 전부 다르답니다. 그게 공주님께는 별일 아니었어도, 아샤에게는 큰일이었을 수도 있어요."
공주는 내 말을 곰곰이 고민하다 답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마음속에 새겨두겠습니다."
"... 계속 서 있기도 뭣하니까, 아샤가 돌아오는 동안 저 테이블에나 앉아 있죠."
"네."
언젠가 별하늘 아래에서 아셰리아 공주가 엎드려 울고 있었던 티테이블. 그곳에서 나와 공주는 마주 앉았다.
...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이 아이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한 것 같다. 아샤에겐 트라우마를 남겼고, 아셰리아 공주가 어릴 적부터 품고 있던 희망을 부순 셈이니까. 당시 아셰리아 공주의 마음은 산타를 부정당한 아이와 같았을 것이다.
상념에 잠겨있자니, 공주가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오늘 밤하늘은 그날 같지 않네요."
"네?"
"구름이 너무 많아서인지, 별이 잘 안 보여서요."
"아..."
나도 그녀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얀 구름이 밤하늘 캔버스를 덮고 있었다.
지금은 봄이지만, 밤하늘을 보던 때에는 가을이었지. 에우데미아가 대륙 중앙에 있긴 해도, 큰 맥락에서 한국과 날씨가 비슷한 편이다
나는 공주에게 말했다.
"아마 계절 때문이겠죠."
"계절이요?"
"지금은 여름을 앞둔 봄이고, 제가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는 가을이었잖아요."
"네. 그랬었죠."
"에우데미아는 여름의 끝에 우기가 오죠. 비와 함께 하늘의 먼지가 전부 씻겨 내려가면, 가을 하늘이 더 높고 깨끗하게 보이는 거예요."
아셰리아 공주는 머릿속으로 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이런 걸 어떻게 알고 계신 건가요?"
"제가 있던 세계에서는 이게 상식이랍니다. 공주님 나이 정도가 되면 모두가 배워요."
"그렇군요. 역사서에서도 본 것 같습니다. 표류자들의 세계는 이곳보다 문명 수준이 높다고요. 선생님과 대화하다 보면 그게 정말인 것 같아요."
"으음... 그건 아닐 거예요."
내 기준으로는 중학생 때나 배울 과학 상식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온 세상을 마력으로만 보니 자연 과학이 그리 발달해있지는 않다.
이곳에 자연 마법이 존재하기는 해도, 그건 자연에 존재하는 마력을 어떻게 움직일지 연구하는 학문. 순수한 과학 연구는 덤일 뿐이다.
그렇다고 에코니아의 문명이 덜 발전했나 하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제 세계는 마력이 없잖아요. 이곳 사람들은 마력을 연구해서 필요한 걸 만들지만. 거긴 이런 지식을 넓혀야 인간의 삶이 편해질 수 있었어요."
"그렇군요."
"그러니 서로 발달하는 방향이 다를 뿐, 문명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선생님의 저택에 가보면 신기한 물건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보면 문명이 발전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 물건들도 해방자가 에코니아의 마법진으로 만든 거잖아요?"
"아..."
"에코니아는 더욱 편안한 삶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거에요. 제가 있었던 세계의 기술 정도는 이곳의 마법으로도 충분히 재현할 수 있답니다."
내 말에 아셰리아 공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냉장고. 오븐. 가스레인지. 식기 세척기. 심지어 로봇 청소기까지. 내 저택에는 현대에서 넘어온 느낌의 마도구가 정말이지 많다.
하지만 그게 고도의 마법 기술로 만들어진 건가 하면, 그런 건 또 아니다.
2층 서재에 남아있는 해방자의 기록을 살펴본 적이 있는데, 나도 마법진 공부만 한다면 저택의 마도구쯤은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말해, 이 세계나 저쪽 세계나 도구를 만들기 위한 기술 차이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차이가 나는 건 사회 구조 정도. 하지만 나는 이것도 감히 함부로 비교해선 안 된다.
마법이 존재하고, 여러 종족이 공존하며, 재앙이라는 큰 위협이 존재하는 세계니까. 오개국이 각자 다른 형태로 발전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렇니 이 구조를 마냥 도태되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게 최선이지...'
악인기에 가까워져서 그렇지. 에우데미아도 썩어빠진 몇몇 귀족들만 제거한다면 정말로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생각에서 깨어난 아셰리아 공주가 말했다.
"즐거울 것 같아요."
"... 네?"
나로서는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혹시라도 내가 살던 세계가 재밌을 것 같다는 걸까.
이 세상도 꽤 막장이지만, 저쪽 세계도 지옥인 건 마찬가지다. 나는 이 아이가 두 가지 지옥을 체험하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마음속으로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공주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만약 선생님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기술을, 이 땅에서 함께 재현해낸다면 즐거울 것 같아요."
... 과연 그게 즐거운 일일까. 바로 핵전쟁 같은 암울한 단어가 떠올라버린 나였다.
하지만 공주의 말속에 한 단어가 신경 쓰였다.
"저와 공주님이요?"
"네. 선생님께서 고향에 존재하는 여러 도구를 말씀해주시면, 둘이서 함께 만들어 보는 거죠."
"만들어 본다..."
"혹시. 이 땅에서 불편함을 느끼신 부분은 없나요. 정말 필요한데, 이 세상엔 없는 거라던가."
불편함이라. 나는 이 세상에 오자마자 왕실 가정교사가 되어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벼락부자까지 되어버렸다. 그 탓에 이렇다 할 불편함은 못 느끼고 산 것 같다.
굳이 따지고 보면...
"마차 승차감이 별로네요."
"그런가요?"
"네. 제 세계에는 마차의 다섯 배로 달려도 흔들리지 않는 차량이 있거든요. 엄청 편해요."
"신기하네요. 그럼 그 차량을 만들어 보죠."
"아하하... 그건 꽤 어려울 것 같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일단 저는 그 차량을 잘 몰라요. 거기다 왕국 전역에 도로도 깔아야 하는데, 그 도로를 깔기 위해서는 재앙이 없어져야 하겠네요."
"아..."
내 말에 조금 풀이 죽어버린 아셰리아 공주였다. 내가 내건 조건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니까. 괜히 철없는 말을 꺼냈다가 아이에게 현실의 벽을 느끼게 해버린 셈이다.
'빨리 다른 걸 떠올려보자. 쉽게 마도구로 만들만한 현대의 가전제품이 뭐가 있지...'
고민 끝에 나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한 가지 떠올랐어요."
"……."
"공주님. 제 저택에서 함께 요리해보셨죠."
"... 네."
"그때 기름에 튀겨냈던 요리들 기억하세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튀김 요리는 정말 귀찮아요. 기름이 튀면 다칠 수도 있고, 주방은 더러워지니까요."
"그때는 사아 씨의 손등에도 기름방울이 튀었었죠. 적응이 돼서 괜찮다고는 하셨지만요."
지금은 공주가 태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큰일이 나나 싶어서 진심으로 걱정했었다.
거침없이 재앙을 얼음창으로 꿰뚫던 아이가, 고작 기름 데인 걸로 왕실 치유사를 부르려 하는 그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지.
나는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제가 살던 세계에는 재료를 넣기만 하면 튀김을 완성시켜주는 기계가 있답니다. 주변에 기름이 튀지도 않고, 손을 다칠 일도 없어요."
"와아. 그것도 정말 신기하네요."
"거기다 이건 만들기도 쉬울 것 같아요."
"그럼 당장 만들어 보죠!"
에어 프라이어를 만드는 게 뭐가 그리 신난다고. 왜 이렇게나 들떠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직 제가 마도구 공부를 덜 해서요. 나중에 준비가 되면 같이 만들어 보죠."
내 말에 공주의 눈은 잠시간 흔들렸다.
"... 선생님."
"네?"
"이것도 약속하신 거예요?"
약속. 그 단어를 조심스럽게 말하는 공주의 모습에, 약간 가슴 한쪽이 쓰라리다.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떠올린 탓이다.
'헤르만처럼 메모라도 해야 하나...'
헤르만 녀석은 작은 수첩 하나를 들고 다니던데, 나도 하나 구해달라고 해야겠다.
"그럼요. 언젠가 꼭 만들어 봅시다."
"네."
그 순간 아셰리아 공주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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