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64화 (164/215)

〈 164화 〉 2­128. 그림을 그려야 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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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8. 그림을 그려야 한다 (4)

공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짐을 잔뜩 짊어진 아샤가 도착했다.

"공주님. 다녀왔습니다."

"이걸 혼자서 다 들고 온 거야?"

아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을 편하게 그릴 수 있도록 도화지를 고정할 이젤. 아무리 봐도 너무 많은 도화지. 수많은 고체 물감이 들어있는 가방까지. 혼자 들고 오기에는 영 많아 보이는 양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샤가 들고 있는 것들을 내려다 주었다. 이젤은 근처 바닥에 고정하고, 도화지나 물감은 티테이블 위에 둔다.

어느 정도 정리를 끝마치자 아샤는 퉁명스레 말했다.

"감사."

"감사 표현은 끝까지 하자."

"감사함다."

"……."

내 마음에 쏙 들법한 인사는 아니었지만, 한 단어로 말하는 것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나는 티테이블에 앉아 있는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님. 이제 그려볼까요."

"네."

내가 앉을 의자는 직접 옮기고, 아셰리아 공주가 앉을 의자는 아샤가 옮겨주었다.

이후 공주와 나는 의자에 나란히 앉자, 아샤는 공주의 등을 지키듯 그녀의 뒤에 섰다.

그 상태로 정원을 바라보면 마치 그날처럼 마력등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하늘이 그리 맑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이 정도만 해도 꽤 운치 있는 풍경이라 할 만 하다.

나는 아셰리아 공주에게 물었다.

"어떤 그림을 그려보실래요?"

"아직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면 평소에 그려보고 싶으셨던 건 없나요."

"으음..."

내 물음에 아셰리아 공주는 도화지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그림을 그려보자 해서 따로 생각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공주가 말했다.

"인물화는 어떨까요."

"어떤 사람을 그리고 싶으신데요?"

"... 전부요."

"네?"

"제 주변 사람 전부를 그려보고 싶습니다."

내가 알기로 아셰리아 공주는 지금껏 풍경화만을 그려왔다. 반년 전에 부모님께 드렸던 가족 그림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 그녀가 인물화, 그것도 자기 주변 사람들을 전부 그리고 싶다니. 참 의외의 제안이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들어가야 할까요. 일단 국왕 폐하나 왕비 전하는 꼭 들어가야겠죠."

"알렉산더 오라버니도요."

"아샤나 기디언도 들어가야겠네요. 사람 수가 많아질 것 같은데, 일단 종이 한쪽에 명단을 쭉 적어볼까요?"

"네. 좋습니다."

우리들의 대화에 자기 이름이 나오자, 아샤는 슬쩍 더 뒤쪽으로 가버렸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아도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샤. 빨리 와서 너도 의견 좀 내봐."

"... 내가 왜요."

"이런 건 사람이 많을수록 생각하기 쉬우니까."

"……."

입을 비쭉 내민 채로 되돌아온 아샤. 이내 그녀는 자기도 생각을 보태겠다는 듯 말했다.

"망할 헤르만 오라버니도 넣죠."

"공주님. 아샤가 부디 자기 오라버니를 이 그림에 넣고 싶다고 하는군요."

"알겠습니다. 아샤가 원한다면 당연히 넣어야죠."

"... 이유는 모르겠지만 열 받는데요?"

"아샤. 네가 열받을 이유가 어디 있어."

"맞아요. 당신의 가족인 헤르만님을 넣고 싶다고 한 것이 어딜 봐서 이상한가요."

"……."

문맥상 아샤가 브라더 콤플렉스 말기 환자가 되어버린 것 같지만, 나와 공주는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문제 제기를 넘겼다.

아셰리아 공주는 말을 이어갔다.

"헤르만님이 여기 들어가는 이상, 한나 님을 그리지 않으면 서운해하실 게 분명합니다."

"그렇겠죠. 저번에도 연말 파티에 초대하지 않았다고 그 난리를 피워댔으니..."

"요나 님도 넣어야겠네요. 혼자 그려지지 않으면 서운해하실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정확히는 헤르만이 그려진 그림에 본인이 없다고 좌절할 것 같다. 매번 헤르만과의 경쟁만큼은 물불 가리지 않는 요나이기 때문이다.

세로로 쭉 적힌 명단에는 왕가와 사대가문 자제들의 이름이 전부 올라갔다.

나는 공주에게 물었다.

"공주님의 가족분들과 사대가문의 자제들은 전부 들어갔네요. 이제 누구를 더 그려야 할까요."

"오라버니 옆에 유나 언니를 그리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네요."

내 대답에 공주는 자그마한 손으로 유나의 이름을 적었다. 위치는 알렉산더의 바로 옆이었다.

그걸 본 나는 말했다.

"구도는 나중에 연필로 잡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밑그림 없이 바로 그리진 못할 것 같아요."

"네. 그럼 다른 분들을 더 생각해보죠."

이후에도 '그릴 사람 명단'은 계속해서 불어났다.

사대가문의 수장 중 어떤 쓰레기를 제외한 다른 어른들의 이름도 전부 나오고. 기사단장이나 그의 아들딸의 이름도 나왔다.

이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주 봤을 테니까. 항상 공주를 괴롭히던 어떤 쓰레기만 제외한다면 어느 정도 애착이 생겼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 정도면 다 나온 거겠지.'

나는 아셰리아 공주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이름이 다 나온 건가요?"

"아뇨. 아직 많이 남았어요."

"많이 남았다고요...?"

지금 적혀있는 사람들만 해도 스무 명에 가깝다.

혹시 생일을 맞이해 사교계에서 친해진 사람들이라도 있는 걸까.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자니, 의외의 이름들이 나왔다.

"아일라 씨와 아모스 씨도 넣죠."

"둘은 왜요?"

"매번 수업을 참관하시니까요. 두 분 모두 선하신 분이라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둘 다 착하긴 한데, 아셰리아 공주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단순히 내가 데리고 다닌다는 이유로 착할 것이라 믿고 있기라도 한 걸까. 만약 그런 이유라면 겉만 보고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공주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댁의 사아 씨도 넣고 싶어요."

"갑자기요?"

"저번에 요리를 가르쳐주실 때 친절하셨으니까요. 그 후에도 잘 대해주셨어요."

"그렇군요."

"여기에 클로에 씨와 라나 씨도."

"... 그 둘은 언제 만나보신 거예요?"

"아카데미 거리의 베이커리에 갈 때마다 만났어요. 꼬리를 살랑거리시는 게 귀여우셨어요."

"미샤 베이커리에 자주 오셨나 보네요?"

"네. 가끔 주말에 아샤와 함께 갔습니다."

생각해보면 나와 필로네의 맞선 때도 친구를 데리고 왔었지. 베이커리에서 공주와 만났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다른 날에도 왔었나 보다.

'그나저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주변 사람들과 엄청나게 친해지셨나 보네...'

클로에는 웬만해서 남에게 꼬리를 흔들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꼬리를 흔들었다는 걸 보면 꽤 친해졌다는 뜻이다.

공주는 약간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온 자작령에서 클로에 씨에게 힘든 일이 있었던 것 같더군요. 약간 걱정되기도 합니다."

마땅히 내가 해야 할 걱정을 대신해 주는 공주. 그녀의 말을 들은 내 마음은 참 복잡해졌다.

내가 할 일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왕도에 돌아온 뒤로 아직 클로에를 직접 찾아가지 못했다. 그 아이가 믿고 따르던 사람이 죽었기에 다른 누구보다 챙겨줘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었다.

만났을 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기운 차리도록 하려면 무엇을 해줘야 할지. 둘 다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고민하던 사이...

"그래도 저는 선생님을 믿습니다."

"네?"

공주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내가 이해한 그 말이 맞을까. 나는 내 옆에 앉은 아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하지만 아셰리아 공주는 내 시선을 깨닫지 못한 듯, 하얀 캔버스를 바라보며 대화를 이었다.

"시하 선생님께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시니까요. 클로에 씨를 북돋아 주실 수 있을 겁니다."

"글쎄요. 저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

내 대답에 공주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 공주는 내가 전지전능인 줄 아는가 보다.

…….

아. 그런건가.

유아기에서 아동기 초반의 아이들은 보호자를 만능 히어로로 여기고, 그 환상은 또래 아이들을 만나며 점점 깨지게 된다. '결국 우리 부모님도 인간이더라.'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마음 한편으로는 나를 보호자로 여기고 의지해주는 건가 싶지만. 미래가 심히 두렵다.

'이 시기가 지나면 보호자에게 실망하고 친구들만 찾는다던데. 그다음은 바로 사춘기고...'

사춘기. 질풍노도의 아셰리아 공주. 두 단어를 떠올려보면 꽤 위험하게 느껴진다.

교복 스커트 길이를 조금 더 줄이겠다며 나와 싸우는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나를 빤히 보고 있던 공주가 말했다.

"선생님께선 자신을 심하게 낮추실 때가 있으십니다."

"사람은 겸손하게 살아야죠."

"아뇨. 여기서 문제는 과하다는 겁니다."

"... 과하다니요?"

"제 생각에 선생님은 겸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반문하자, 아셰리아 공주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리고 공주는 천천히 왕궁 정원을 둘러보았고, 약간 감상적인 어조로 내게 고했다.

"요즘 들어 제게 어떤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인가요."

"만약 선생님께서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선생님께서 다른 나라에 오셨다면, 제가 직접 구해드리지 못했다면, 왕실 가정교사의 직책을 받지 못하셨다면."

"……."

"저는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내가 대단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세계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고양이 수인을 걱정할 정도로 사려 깊은 아이가, 게임 속 '아셰리아 여왕'처럼 커버릴 것이다.

그 냉철하고 이지적인 여왕은 어린 나를 구원했으나, 적어도 그 모습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 그녀는 언제나 고독했으니까.

공주는 말을 이어간다.

"어찌 보면 제 행복은 선생님께서 주신 거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공주님께서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행복해지신 거죠."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만약 시하 선생님께서 제 곁에 와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저는 행복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

"시하 선생님은 제게 있어 대단한 분이셔요."

나는 그 자리에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열두 살 꼬마에게 말씨름을 지다니. 상대가 공주님이 아니었다면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잠시 그림이나 그리면서 놀아주려고 왔는데...'

나를 믿어주는 아이에게 이런 말을 들어버렸으니, 눈치 없게 부정적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네. 선생님이라면 해내실 거예요."

공주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클로에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걸 해낸다는 건지. 아니면 보다 큰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난 몇 주간 무거웠던 내 마음은 잠깐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었다.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이름을 추가했다.

길드에서 일하고 있을 주방장님.

낮에 만난 친위대장과 친위대원들.

사교계 때 친해졌다는 지방의 자작가 영애.

왠지는 모르겠지만, 종이 맨 끝에 적힌 필로네.

마지막엔 내가 전혀 모르는 왕궁의 시녀들까지.

... 결국 명단의 수는 끝내 오십을 넘겨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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