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72화 (172/215)

〈 172화 〉 2­136. 해방제를 준비하자.

* * *

2­136. 해방제를 준비하자.

목놓아 울었던 것이 마음에 위로가 되었던 걸까. 최근 클로에는 나름대로 일상생활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규칙적인 수면과 식사, 기초 체력 단련과 활쏘기 연습. 이제는 목표를 잡고 꾸준히 달려간다는 느낌이다.

많이 걱정하고 있었던 일이 해결된 덕분에, 나는 새로운 나의 일상생활, 일 더미에 깔려 지내는 씁쓸한 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다.

왕실 가정교사로서 수업을 진행하고.

수업 준비는 그 전날마다 미리 해두고.

모험가 길드의 대소사도 해결해두고.

가끔씩 상인회의 보고서도 검토하고.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왕도에는 또다시 축제 분위기가 돌아왔다.

건국제와 더불어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축제.

해방자를 기리기 위한 그 날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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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드 개혁 후 2달이 지나, 6월의 마지막 주.

수업을 마친 나는 왕궁 중앙 정원의 잔디밭에 누운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헤르만은 그런 날 내려다보며 물었다.

"형. 오늘은 다른 일정 없어?"

"없겠니..."

"……."

"한 시간 있다가 또 모험가 길드에 나가 봐야 해. 축제가 다가오니까 더 죽을 맛이야..."

나를 특히나 힘들게 하는 것은 모험가 길드다.

문제아가 있다던가 사건·사고가 많이 생겨서 힘들다는 건 아니다. 단지, 모험가 길드의 규모와 업무량이 너무 커져 버린 것이 문제다.

매일 네 시간만 자는 생활을 하길 3달째. 이렇게 가끔 취하는 휴식이 너무나도 달콤하다.

"그럼. 한 시간 뒤에 출발이란 거지?"

"어..."

"에휴. 그럼 나도 좀 쉬어야겠다."

한숨을 내쉬며 내 옆에 앉은 헤르만. 그는 조금 불만스러운 듯이 내게 말했다.

"근데 형."

"왜."

"용병 길드를 혁파하고 모험가 길드를 세우면, 실질적인 업무량은 없을 거라지 않았어...?"

"나도 그럴 줄 알았지."

사실. 진짜 그럴 줄 알았다.

옛 용병 길드의 주 고객은 잘나가는 상인이나 귀족이었으니까. 그들은 '떳떳하지 못한 음지의 일'을 맡길 때면 용병 길드를 주로 찾았다.

상대적으로 멀쩡한 용병들이 멀쩡한 의뢰를 받긴 했어도, 실상 길드에 돈이 되는 의뢰는 전부 익명 의뢰나 기밀 의뢰 뿐이었다.

나로서는 그걸 전부 알고 있다 보니. 내가 모험가 길드장으로 부임하면 그런 의뢰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부 내 짧은 생각이었지...'

헤르만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도대체 왜 계속 일이 늘어나는 건데. 왜 자꾸 의뢰가 계속 들어오는 건데!"

"……."

이유는 잘 알고 있지만. 차마 그에게 말할 수 없다.

아니. 사실 헤르만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왜 우리가 이런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3개월 전. 모험가 길드 면접을 마치고. 내가 제일 먼저 행한 일은 의뢰 랭크의 설정이었다.

기존에는 의뢰 난이도가 길드장의 재량으로 정해졌다면, 지금은 '그 게임 속 퀘스트 난이도'를 기준으로 전부 재설정해둔 것이다.

덕분에 모험가들은 위험도와 보상을 확실히 분별해 '분수에 맞는 의뢰'를 수주할 수 있게 되고, 의뢰 성공률도 전체적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의뢰 성공률이 올라가 버리니, 이번에는 '떳떳하게 받을 수 있는 양지 의뢰'가 넘쳐나는 지경에 이르러버렸다.

조금 비싸지긴 했지만, 예전처럼 먹튀가 빈번했던 용병 길드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럽고, 공작이 보증하는 기관이니 맡길 수 있다는 논리였다.

"형. 너무 일을 잘해서 문제 아닐까."

"하하하... 일 잘하면 좋긴 하지."

"내 생각엔 모험가 관리를 너무 잘 해버렸어. 거기다 의뢰량이 늘어난 탓에 모험가들의 벌이도 나아졌으니까. 지원자들이 더 늘어나고 있잖아!"

"모험가가 늘어나면 좋지. 왕도 경제가 활성화되고, 모험가 중에 쓸만한 사람은 영입하고, 혹시 모를 재앙의 습격에 맞설 사람도 늘어나잖아."

햇빛이 주는 노곤함 속에서 평온한 목소리로 말하자, 헤르만이 답답한 듯 가슴팍을 두드렸다.

"아니. 우리의 본 목적은 따로 있었잖아! 찾는 사람이 있다며. 그 사람은 전혀 못 찾고 있잖아!"

"그건 우리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야. 그 사람이 제 발로 찾아와야지. 그리고 부차적인 목적에 모험가들의 숫자를 키우는 것도 있었어."

"아이고오. 내가 다른 사람한테 일을 잘한다는 이유로 잔소리할 날이 오다니. 이 인간아..."

참. 웃긴 상황이긴 하지.

일을 너무 잘해서 문제라니. 어떤 영화 속에서 왕갈비 통닭을 팔던 형사들이 떠오를 지경이다.

'그나저나. 찾는 사람이라...'

소식이 영 없어서 한동안 잊고 있었다. 나는 헤르만에게 부탁했던 일을 물었다.

"헤르만."

"왜!"

"내가 말해준 물건들은 구했어?"

"전부 구해뒀지. 상인들도 모르게 구해달라며. 내가 아는 녀석에게 직접 다녀오게 시켰어."

"... 그럼 다행이네."

"근데 그걸 도대체 어디다 쓰려는 거야."

"때가 되면 알려줄게."

"……."

헤르만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이걸 왜 시키나 싶은 거겠지. 쓸데없는 걸 구해 달랬으니, 의아하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다 계획이 있어서 그런 거니, 적당히 이해해줬으면 한다.

내 추론이 틀렸다면 작은 해프닝으로 끝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주 큰 일이 되어버릴 테니까. 지금은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 뒤로 내가 피곤한 내색을 하며 눈을 감았더니, 헤르만 녀석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형...?"

"... 선생님."

따스한 햇볕 속에서 잠에 들었던 걸까.

잠결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아직 꿈속을 헤매는 건 아닐까. 아마도 헤르만과 아셰리아 공주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너무 피곤해서 더 자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 사이로, 냉랭한 여자애의 목소리가 하나 끼어들었다.

"확 물을 부어버릴까요?"

"아샤. 그 물통은 언제 가져온 거예요...?"

"물 정도는 언제나 가지고 다닌답니다."

... 쟤는 무슨 스커트 속이 차원문인가.

안 그래도 저 안을 털어보면 암기가 우수수 떨어져 나올 건데, 물통까지 들고 다닌다니. 이것만 해도 충분히 신기한데, 심지어 찬 물이라고 한다.

다행히 아셰리아 공주는 아샤를 말렸다.

"안 돼요. 아샤. 당신은 가끔 시하 선생님을 심하게 대할 때가 있어요. 조금은 자제하세요."

"공주님. 저도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 뭔가요?"

"냉수마찰은 피곤한 사람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는 통계가 있어요."

"동생아. 정확히는 여러 이유로 뻗어버린 사람을 강제로 기상시킬 때 도움이 되는 거겠지."

"……."

헤르만의 말이 백번 옳지. 아샤가 말하는 통계란, 왕궁부 그림자들의 지하 본부에서 고문으로 뻗은 사람들을 냉수로 깨우는거니까.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게도 육감이라는 게 있는 건지, 눈을 감고 있는데도 아샤 녀석의 눈총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자고 싶었는데...'

나는 하는 수 없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일어났고, 세 사람 앞에서 방금 깬 척을 했다.

"아함. 잘 잤다..."

"선생님. 일어나셨나요."

"안녕하세요. 공주님. 어쩐 일이세요."

"해방제 기간에 따로 일정이 있으신지 궁금해서요."

"……."

... 아셰리아 공주는 내 아픈 구석을 찔렀다.

7월의 두 번째 일요일을 기점으로 한 주 동안. 해방제 기간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쉬게 된다.

하지만 이는 일반인들의 이야기고, 축제 기간에는 오히려 더 바빠지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오개국 회담을 비롯한 여러 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필레몬 국왕과 루시아 왕비.

여러 행사를 준비해야 하는 왕궁부와 거리 순찰을 강화해야 하는 치안 본부.

왕도를 찾아온 여행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상인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사람. 바로 나다.

'나만 아니면 돼'라고 외치며 저택에 틀어박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축제 기간에는 모험가들 단속을 더 철저히 해야 하고. 각 상인회에서는 축제 관련 최종 결재를 나에게 받아 간다. 거기다 Puppy를 직역한 단어를 너무 쓴 탓인지, 수인국 사절단에서 나를 콕 집어 만나자고 했다.

여기까지 읊은 것은 전부 '이시하 임시 공작'으로서 처리해야 할 공식적인 일이고. 개인으로서 내가 수행해야 할 일도 따로 있다.

내가 다가올 미래를 떠올리며 절망에 차 있자, 아셰리아 공주는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바쁘신가요?"

"조금. 아주 조금 바쁘긴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로 물어보시는 건가요?"

"수업을 마치고 다 함께 의논해보았습니다. 저희는 왕성 연회에 참여할 의무는 없으니, 지난해 연말 파티처럼 선생님 댁을 찾아뵙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아..."

해방제 기간에는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전부 왕성에 초대하는 큰 파티가 열린다.

에코니아 오개국의 구심점인 에우데미아의 왕과 차세대 리더들이 함께하는 연회. 그 자리에서 국제적인 혼담이 오가기도 하며, 정치적인 교류도 꽤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의 팔불출 국왕께서 말씀하시길.

'아들에게 유나 외의 불여우가 들러붙는 것은 싫고. 딸에게 돼먹지 못한 놈들이 다가오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라고 하셨다.

두 사람을 연회에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옆에 있던 루시아 왕비가 '본인은 비를 둘이나 뒀던 주제에 무슨….'이라는, 달콤살벌한 태클을 걸었으나, 국왕의 다짐은 너무나도 확고했다.

사실 나로서는 이게 아이들에게 좋은 결정인지는 모르겠다.

남들 다 노는 축제 기간에, 지위가 너무 높다는 이유로 조용히 후궁에서만 지내야 한다니. 그것 나름대로 참 억울한 처사이지 않나.

그러니 아이들은 내 집에 오고 싶다는 생각도 들겠지. 내 저택에는 유나도 있고. 왕궁에서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내 상황이 여의치않다.

"연회가 사흘째 수요일이었지요?"

"... 네."

"그때는 제가 너무 바쁠 것 같아서..."

내가 완곡하게 거절하려고 하니...

공주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끼였다.

대놓고 울면 차라리 내 마음이 편할 텐데.

이미 촉촉해져 버린 눈망울을 숨기려고 고개를 돌려버리니, 나로서는 더더욱 보기가 힘들었다.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공주가 말했다.

"이번에 여러 일을 맡게 되셨으니. 시하 선생님도 어쩔 수 없으시겠죠."

"……."

"알겠습니다. 올해 해방제는 아쉽지만..."

"공주님. 제 말이 아직 안 끝났잖아요?"

"... 네?"

아.

수요일과 목요일에 쉬려면 얼마나 일해야 할까.

과로사로 죽을 각오로 일을 미리 해두어야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마련해볼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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