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77화 (177/215)

〈 177화 〉 2­141. 사절단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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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1. 사절단의 정체.

왕도 신문에서 명명한 '대청소 사건'으로부터 어느덧 일주일의 시간이 흐르고. 왕도는 해방제 주간을 맞이해 축제 분위기로 가득하게 되었다.

전 세계인이 즐기는 축제답게, 여러 인종이 모인 거리에서는 연주자들의 공연이 흥을 돋우고 있으며, 수많은 음식이 사람들의 침샘을 자극한다. 평소라면 이를 갈며 싸울만한 수인들과 북쪽의 장사꾼들도 오늘만큼은 휴전. 같은 음악에 서로 다른 춤을 추며 신경전을 벌인다.

하지만 그 분위기에 낄 수 없는 이가 있었으니. 모험가 길드의 집무실에서. 재상부의 재녀, 한나 프로네시스가 긴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한나는 현재 회의용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상태다. 내게 예법 수업을 할 때는 똑 부러지게 행동하던 그녀였는데. 오늘따라 영 힘이 없어 보인다.

"얘는 오랜만에 얼굴 보는데 무슨 한숨이래."

"그런 게 있어요..."

에코니아에 떨어진 뒤로 여러 도움을 주었던 한나지만. 요즘 들어 통 만나기 힘든 편이다.

업무 분야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한나는 재상부에서 아버지를 보좌하는 반면, 나는 가정교사 일을 제외하고 왕궁에 있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끔 지나가다 손 인사를 하는 것이 전부인 셈인데. 그나마 오늘은 내게 꼭 전할 말이 있다고 해서 찾아온 것이다.

헤르만이 나른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쟤는 해방제마다 저러니까 그냥 신경 쓰지 마."

"헤르만 오라버니. 내 사정 뻔히 알면서 너무해."

"그 사정이 뭐길래 한숨을 쉬는 건데?"

"그게요. 선생님..."

한숨만 푹푹 내쉬던 한나는 이제야 사정을 설명했다.

"제가 예전에 해방자님이 저희 가문의 집사였다는 건 말씀드렸었죠."

"그랬지. 샤크티란 사람이 주워 왔다며."

"주워왔다니... 조금 어감이 이상한데요. 아무튼. 저희 공작저 근처에는 해방자님께서 독립하기 전까지 머무시던 집사 가문용 저택이 있어요."

"... 그럼 그것도 200년 전 저택이라는 거잖아."

"네. 그런 셈이죠."

프로네시스 가문은 그런 옛 저택을 엄청나게 잘 보존해두는구나. 해방자가 200여 년 전에 근원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 저택도 상태가 좋았었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해방자의 저택'도 처음 입주할 때는 벽면에 이끼 같은 것도 전혀 없었고. 몇몇 방에 먼지가 쌓여있을 뿐이었다.

문득 내 저택을 떠올리고 있자니, 한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후우. 그거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에요."

"도대체 왜?"

"그 저택은 세계적인 유산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럼 좋은 거 아냐?"

"……."

전 세계인이 축제까지 만들어 기리는 인물의 생가라니. 그런 역사적인 저택을 소유하고 있으면 가문의 위세가 절로 오르는 셈이지 않나. 나로서는 한나의 고민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나는 내 반응에 표정이 굳어 버렸고. 그녀 대신 헤르만이 설명을 덧붙였다.

"형. 해방제 때만 되면 그 저택 하나 보겠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찾아오겠어. 그리고 그 사람 중에서 비정상은 얼마나 많겠냐고."

"아. 진상들이 많다는 건가."

"그렇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호위 병력을 붙이는 것도 다 인력이잖아. 거기다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야."

"또 뭐가 있길래."

"돈에 미친 북방 놈들은 그 저택을 사람들에게 개방해서 돈을 받을 생각으로 팔라고 하거든."

순간, '황금만능주의의 폐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해방자가 섬기던 가문, 프로네시스 공작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 소유하고 있으니 그 저택은 더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하지만 돈에 미친 장사꾼들 눈에는 방문객 수만 보이겠지. 만약 그들에게 저택이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하다. 내가 살던 세계의 관광지 상술처럼. 입장료는 기본이요, 저택 주변에서는 해방자와 별 상관도 없는 기념품에 프리미엄을 붙여 팔겠지.

역사적인 인물의 생가가 그런 모습이 될 바엔, 프로네시스에서 관리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고개 숙인 한나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년 해방제마다 부담하는 보수 비용도 만만치 않고. 사병들만으로는 경계가 뚫릴 수 있으니 현장 확인도 해야 하고. 그렇게 가문 사람들의 피로감은 점점 쌓여가고. 재상부 일도 많아져서 죽겠는데, 그 저택까지 신경 쓰다 보면 죽고 싶을 정도예요."

"……."

"그렇다고 그걸 팔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나. 네가 고생이 많다..."

에우데미아의 고위 귀족들은 왜 이렇게까지 과로사 위기에 놓여 있는 걸까. 당장에 국왕 내외만 해도 시간 여유가 없으며. 사대 귀족의 자제인 한나는 이 모양 이 꼴이다. 마냥 남 일 같지도 않은 게. 기간제 임시 공작에 불과한 나도 며칠 전까지는 꽤 위험하지 않았나.

몇몇 판타지 게임이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새로운 삶을 느긋하게 즐기거나 연애에 정신이 팔려 있어도 영지는 알아서 굴러가던데, 나에게는 그런 것 따위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

그러고 보면.

여긴 나한테 이건 현실이잖아...

한나와 이야기하다 보니, 스스로가 비참해졌다.

"하아..."

"형은 또 왜."

"그냥. 과로가 남의 말 같진 않아서."

"그렇게 말하면 나까지 슬퍼지잖아."

나와 헤르만마저 고개를 숙인 순간. 아일라가 우리에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나 아가씨. 이거 마시고 힘내세요."

"... 고마워요. 아일라."

아일라가 내온 차는 시원하게 식힌 자몽차.

요즘 들어서 내 속이 답답해질 때가 많다고 말하자, 아일라가 고향 생각을 하며 직접 담근 것이다. 귤 종류의 과일이 화병에 좋다나. 고향에서 자주 만들어 마셨다고 한다.

한나는 시원한 자몽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새콤달콤한 게, 홍차와는 다른 매력이네요."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기분이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네. 조금이나마 그녀의 표정이 밝아진 듯하다.

'이제 일 얘기를 다시 해도 되려나...'

그런 생각으로 나는 한나에게 물었다.

"한나. 그런데 길드에는 어쩐 일로 온 거야?"

"...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사실 내일 비공식 담화에 관한 내용으로 찾아뵙게 되었어요."

"아... 수인국 사절단이 날 지명했다며."

"네."

7월의 첫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해방제. 이는 세계적인 영웅인 해방자를 기리는 축제인 동시에, 오개국이 서로 친목을 다지는 기간이기도 하다.

한 주 동안 왕국에서는 오개국 사절이 모이는 회담이 열리고. 장차 각국 지배 계급으로 성장할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초청하는 연회도 열린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으니. 공식회담에 참여하러 온 수인국의 높으신 분이 나를 사적으로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사절단은 오개국 회담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텐데. 왜 굳이 나를 보겠다는 거야?"

"보나 마나 형이 개새끼라 말한 것 때문이겠지."

"역시 그건가. 사실 그거 말곤 없지..."

"선생님. 진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에요?"

"많이는 안 했어. 딱 두 번이야. 두 번"

"두... 두 번 씩이나..."

내 말에 한나는 얼빠진 모습으로 잠시 굳어버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선생님. 그게 얼마나 위험한 단어인지는 알고 계시죠?"

"알고는 있어. 대표적인 수인 차별 용어로서, 고위 공직자가 함부로 입에 올리면 자칫 전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단어지."

"그걸 알면서도 말했다니. 도대체 왕궁 밖에서 무슨 정신머리로 다니시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이 대화를 들으면 고작 욕 한 번에 유난들을 떤다고 하겠지만, 사실 한나의 반응이 당연하다. 내가 살던 세계 기준으로, 나라의 장관급 인사가 일본에 쪽소리 나는 단어를 쓰고, 중국에 짱소리 나는 단어를 쓴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게임에서는 에우데미아 왕국의 국력이 쇠퇴했을 무렵, 수인국이 이 단어 하나를 빌미로 삼아 전쟁을 선포하는 루트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내 발언에 당당하다. 나 자신이 지금 얼마나 당당하냐고 묻는다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 정도.

"그 개놈들이 우리 애한테 고양이 년이라고 하는데. 그럼 가만히 있어야 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께서 그런 단어를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괜찮아. 요나도 내 말 듣고 이해해줄 정도였어."

"요나 오라버니가요...?"

"그래."

"……."

한나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나 규범을 부르짖는 요나가 납득했다니. 아마 한나로서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멍해진 그녀에게 나는 내 말을 이었다.

"만약 사절단이 그 이야기를 꺼내기라도 한다면. 바로 수인 역차별 사례들을 선별해둔 자료를 그쪽에 건넬 거야."

"... 언제 그런 명단까지 만드신 거예요."

"당연히 내가 그 말을 한 순간부터지."

나로서는 에우데미아 왕국이 멸망할 수 있는 루트는 전부 차단해둬야 하니, 수인국과의 조약도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사절단이 내게 면담을 신청한다니.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걱정과 귀찮음이 솟았으나, 지금은 반갑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내 한나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휴. 일단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야기는 재상님과 폐하께 말씀드릴 거예요."

"상관없어. 나는 당당하니까."

"...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오늘 제가 길드에 온 이유는, 선생님께서 사절단장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뭐야. 벌써 누군지 알아낸 거야?"

"네."

사절단의 인선은 회담 당일이 되어서야 밝혀지는 게 보통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만큼 단장의 신분은 중요하니까. 누가 파견되었는지에 따라 각국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회담에 참여하는지 알 수 있다 보니, 각국은 단장의 신원을 최대한 숨기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사절단장의 정체를 알아냈다니. 왕실에서도 꽤 노력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누군데?"

"놀라지 마세요. 무려 백호족 직계 인사니까요."

"직계라 해봐야 수왕의 자식 두 명에. 용병이 되겠다고 가출한 동생뿐이잖아."

"그렇죠. 이번에 선생님께 담화 요청을 한 인물은 바로..."

무슨 방송 프로그램에서 1등을 발표하는 것처럼 잠시 동안 뜸을 들이는 한나. 그 모습은 마치 '광고 후에 뵙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것만 같다.

"바로오오...!"

"빨리 말하기나 해라..."

"에이. 이렇게 뜸을 들여야 재밌죠."

"……."

"칫. 말하면 되잖아요."

내가 눈으로 째려보자, 한나는 그제야 움찔거리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수왕의 둘째 아들. 로란츠 블랭크에요."

"걔가 왜 지금 오는 거야?"

"뭐야. 선생님이 아는 사람이에요?"

... 알지.

너무 잘 알지.

로란츠 블랭크.

훗날 아카데미에서 알렉산더와 같은 반에 배정되는, 두 번째 침울 왕자의 이름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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