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78화 (178/215)

〈 178화 〉 2­142. 로란츠 블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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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2. 로란츠 블랭크.

수인국의 왕자. 아니, 도련님인 로란츠 블랭크는, 면담 장소로 내 직속 부하들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를 택했다. 나는 내 저택이나 왕궁 아니면 수인국 사절단이 머무르고 있는 별장을 선택할 줄로만 알았는데, 약간 의아한 일이었다.

숙소 회의실에 이런저런 가구들을 들여와 적당한 회담장으로 꾸며두고 대기하던 중, 헤르만이 미심쩍은 듯한 말투로 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더 저지른 건 아니지?"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보냐?"

"이건 수인국에서 형 뒷조사를 한거나 마찬가지잖아. 형이 사고 친 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여길 면담 장소로 선택하겠어."

이곳은 아카데미 숲 초입에 있는 작은 별장으로. 언젠가 '공주님 납치극'을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며, 알렉산더와 유나가 납치당했던 그 숲의 초입이기도 하다. 워낙 흉흉한 소문이 많이 도는 곳이다 보니, 주변에 사람도 잘 지나가지 않고, 동네 자체가 조용한 편이다.

하지만 이런 입지가 오히려 직원들에게 안성맞춤이라고 해야 할까. 아카데미 근처라서 내 집과 가깝기도 하고, 뒤로는 너른 공터가 있어 용지 확보도 쉽다. 그리고 우리 중엔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될 사람도 있으니, 사람의 통행이 적다는 것은 큰 장점이 된다.

그렇게 이 집을 사서 잘 쓰고 있었는데. 왕도민들조차 제대로 모르는 이곳에 타국의 사절단이 관심을 보인다라. 이건 분명 헤르만의 말처럼, 내 뒷조사를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추론이 영 탐탁지 않았다.

"네 말이 맞기는 한데. 난 사고 친 거 없어."

"형. 나 없을 때 호랑이까지 욕했던 건 아니지?"

"내가 호랑이랑 만날 일이 뭐가 있냐. 용병 중에 그런 고위종은 없을거고. 수인국 유학생들은 아카데미에만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잖아."

"그럼 왜 백호족의 둘째 아들이 찾아오는 거야..."

"나도 그건 모르겠다."

내가 한국인으로서 가장 익숙한 욕을 쓴 탓이지 않을까, 의심도 해보았지만, 이 회담과 관련된 통보를 받은 직후부터 약간의 의심이 생겼다. 이 별장을 회담 장소로 지정한 것도 미심쩍지만, 사절단 측에서 다른 조건까지 붙였기 때문이다.

내가 고민을 이어 나갈 즈음, 회의장으로 몇몇 직원들이 들어왔다. 이 회의에서 호위 역을 맡은 윤흠서. 헤르만과 함께 비서를 맡은 아일라. 두 사람의 뒤로는 클로에와 라나, 루이가 들어왔다.

클로에는 내게 물었다.

"공작님. 저희를 부르셨어요?"

"그래."

"높으신 분들이 만나시는 회의라고만 들었는데, 갑자기 왜 저흴 부르신 거에요?"

"글쎄다. 수인국에서 너희를 지명했어."

"... 네?"

이게 바로 수인국 사절단의 두 번째 요청이다.

정확하게는 '익숙한 분위기에서 면담을 진행하고 싶으니, 공작께서 고용한 수인들도 회의장에 동참시켜주셨으면 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지.

나로서는 도대체가 이 의중을 모르겠다. 아무리 클로에와 다른 아이들이 수인국의 벽을 넘어온 이들이라 해도, 지금은 왕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런데 아이들을 콕 집어 회의장에 참석시키라니...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따로 없다.

갑작스러운 말에 클로에와 루이는 부담을 느낀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라나 역시 조금 긴장한 모습이다만, 두 사람 정도까지는 아니다.

'하긴. 얘들 처지에서는 평생 만나보지도 못할 고위층을 만나는 셈이니까...'

라나는 환족이다보니 가끔 고위종과 만날 때가 있었겠지만, 다른 두 녀석은 수인국에서도 가장 흔한 종족인 견인족과 묘인족이지 않나.

나는 그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말했다.

"긴장할 거 없어. 무슨 수왕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둘째 아들을 만나는데 왜 그러는데."

"그렇게 말씀하셔도..."

"특히 클로에 너. 저번에 아셰리아 공주님과는 잘만 대화하더니.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거야."

"그야, 공주님은 곱고 예쁘고 귀엽고 친절하시잖아요. 백호족은 조금 무섭다고 해야 하나..."

그래. 공주님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니. 역시 클로에는 보는 눈이라는 게 있다. 감히 얼음공주란 멸칭을 몰래 써대는 몇몇 멍청이들에게 비하면 훨씬 낫지 않나.

그렇게 조금이나마 흐뭇해진 마음으로 클로에를 보고 있으니, 내 눈에 밟히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루이에게 이리 오라는 양 손짓하며 말했다.

"아일라. 클로에 브로치가 조금 삐뚤어졌으니까 조금 고쳐줘. 그리고 루이 너는 넥타이가 이게 뭐냐. 이 옷 입은 지 반년 정도 되지 않았어?"

"아. 죄송합니다..."

"죄송한 거 없고. 다른 남자애들도 다 비슷하지?"

"... 네."

"에휴. 나 따라서 왕궁에 들어갈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아모스한테 꼭 배워둬."

"알겠습니다."

평소 임무를 나갈 때는 답답하다는 이유로 옷만 입고 나가도 된다고 허락해주었지만, 오늘은 격식을 차려야 하는 회의장이다 보니 이런 것도 꼼꼼히 점검해야만 한다.

앉은 채로 넥타이를 고쳐준 나는 루이의 등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자. 다 됐어."

"감사합니다."

"클로에. 루이. 라나. 잘 들어. 이번 면담은 어찌 보면 내가 로란츠보다 위에 있는 셈이야. 나는 에우데미아 왕실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고 있지만. 저쪽은 알렉산더 왕자님과 비슷한 지위라고 볼 수 있잖아?"

"그렇죠."

"그리고 저쪽 요청이 있긴 했어도 너희는 내 보좌야. 저쪽에서도 보좌관을 데려올 건데, 너희들 세 사람이 잔뜩 긴장해있으면 내가 밀리는 느낌이 돼버린다고. 무슨 느낌인지 알겠지?"

"... 네. 알 것 같아요."

"상대측에 고위종이 온다고 해서 쫄 필요도 없어. 여긴 수인국 밖이고. 같은 사람일 뿐이니까."

그렇게 아이들을 타이르고 있자니. 바깥에서 경계를 사던 무인 하나가 들어왔다.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의실로 안내해주세요."

"예."

"아일라. 손님 대접할 차도 좀 내오고. 나중에는 면담 내용 메모도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위치로."

그 침울 왕자가 무슨 생각으로 찾아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절단으로 찾아와서 나한테 깽판을 놓기라도 하겠어.

나는 게임 속 로란츠를 떠올리며, 그를 기다렸다.

.

.

잠시 후.

일곱 명의 수인국 사절단이 회의장에 등장했고. 그 선두에는 백호족 소년 하나가 있었다.

'게임이랑 별 다를 바가 없네...'

하얀 머리칼 사이로 조금씩 섞여 있는 검은색 브릿지 헤어. 고양잇과 특유의 뾰족하게 솟은 귀. 약간 졸려 보이는 듯한 특유의 표정까지. 내가 기억하던 로란츠 블랭크였다. 그래도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아는 시점보다 3년 전이라 그런지 체구가 조금 작다는 점일까. 그것 말고는 전부 그 게임 속 모습 그대로였다.

이윽고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한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수왕국의 사절단장 로란츠 블랭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에우데미아의 왕실 가정교사, 이시하입니다."

"갑작스러운 면담 요청이었을 텐데,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간단한 다과를 준비했으니, 자리에 앉으시죠."

그가 자리에 앉자, 양옆으로 키 작은 갈색머리 여우 소녀와 회색곰 수인 소년이 함께 섰다.

'벌써 저 둘을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구나...'

'수왕'이 되기 위한 요건, 그것은 분명 힘이다. 수왕 선출전에서 후보들은 힘을 증명해야 하며, 결투의 최종 승리자가 왕으로 선출되기 때문.

하지만. 그 힘이 뜻하는 바는 너무나 다양하다. 본신의 무력, 파벌을 이끄는 정치력, 한 나라를 이끌만한 지혜까지. 선출전에서는 이 모든 것을 시험받아야 하며 후보들은 자신들의 추종자를 내세워 대리전을 치를 수도 있다.

가끔은 선출전의 규모가 커져 고위층이 전부 참여하는 내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어찌 보면 인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로란츠의 양옆에 선 수인들도 게임 속 등장인물로, 종족적인 연줄이 이어져 로란츠의 행보를 보좌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와 로란츠의 착석을 확인한 아일라가 곁으로 다가왔고, 우리 앞에 찻잔을 하나씩 놓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키 작은 여우 소녀가 움직였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그 찻잔에 마법진이 그려진 작은 종이를 담갔고. 이내 로란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의 유무를 판단하는 충성스러운 심복의 행동. 하지만 그걸 본 나와 헤르만은 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아. 저년은 꼭 저런단 말이지...'

알고 저런 행동을 한 거라면 나를 우습게 본 것이고. 모르고 하는 행동이면 철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저 여우년은 그 게임에서도 능청맞기 그지없는 년이었으니, 알고 한 것이 분명하다.

로란츠가 찻잔에 손가락을 옮길 즈음. 나는 회의장 의자에 몸을 맡기며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프란. 제가 그 차에 독이라도 탈 것 같았나요."

"……."

"……."

그 순간.

회의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로란츠는 찻잔의 고리에 손가락을 끼우지도 못하고 멈췄고. 여우 귀 소녀는 나를 사나운 눈으로 노려본다. 곰족 소년을 비롯한 다른 사절단 역시, 한껏 경계하여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들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르만은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고. 그런 점은 아일라도 마찬가지였다. 뒤쪽에서 미세한 옷자락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다른 이들도 긴장한 듯하다.

회의장을 둘러본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긴장들 푸시죠. 내가 싸우자고 한 것도 아닌 걸요, 뭘. 거기 여우 꼬마가 설쳐대서 아주 약간 화가 났을 뿐이랍니다."

"꼬마라니..."

부들부들 손에 주먹을 쥔 채 떨고 있는 여우 꼬마. 그런 그녀에게 나는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오. 꼬마가 화를 잘 참네."

"꼬마 아니거든요...!"

"화내는 것 보니까 꼬마 맞네."

"아니거든!"

"떼쓰는 것 보니까 완전 꼬마야."

"으윽..."

아...

이 분위기야말로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키 작은 꼬마를 놀리면 너무 재밌으니까.

작중에서도 이 간사한 여우에게 단 한 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작은 키를 건드리면 앞뒤 생각 하지 않고 폭주한다는 것이었다.

키 작은 여우, 프란은 부들거리며 날 노려보았고.

그 모습을 멍한 눈으로 지켜보던 로란츠는...

"푸흡."

웃음을 참지 못하고 뿜어버렸고.

"... 도련님?"

"사과드려라. 프란. 네 실수가 맞다."

"그래도..."

"이거. 제가 대신 사죄를 올려야겠군요. 죄송합니다. 시하 공작님. 아직 저희가 배울 것이 많은 나이인지라, 공작님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자기 수하 대신 사과를 건네는 그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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