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79화 (179/215)

〈 179화 〉 2­143. 로란츠 블랭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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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3. 로란츠 블랭크 (2)

그래. 이게 로란츠의 진면목이지.

수왕이 될 욕심조차 없으며, 한없이 우울하고 무기력하기만 한 수인국의 작은 도련님.

하지만 그는 자기 욕심이 적은 것일 뿐. 자신의 옆에 지켜주는 수하들에게는 관대하다.

알렉산더에 이은 '두 번째 침울 왕자'라는 별명도 역시, 이런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도 게임에서 보여주던 그 순둥순둥한 성격이랑 비슷하긴 하네.'

내가 여우 소녀, 프란 르나르를 자극한 이유는 이 자리의 분위기를 유리하게 가져옴과 동시에. 로란츠의 태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온 뒤로 이 세상 사람들의 역사와 성격이 너무나도 바뀌어 버렸으니까. 지금 내 앞에 있는 백호 소년의 성격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딱히 키 작은 여우 꼬맹이가 괘씸해서 놀리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건 아니다. 진짜로. 궁서체다.

"괜찮습니다. 프란 양께서는 로란츠 님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앞섰던 것이겠지요. 아닙니까?"

"하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공작님.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지요."

"어떻게 프란의 이름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당연히 게임에 나왔으니까.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루트에서 전교생의 이름을 표로 만들어 저장했었던 나다.

지금과 다름없는 키로 깐죽거릴 저 여우나, 그녀의 반대편에 앉은 우직한 곰탱이의 이름도 잘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작께서는 반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표류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당신께서 수인국 밖으로 나온 적도 없는 프란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니. 참 신기하군요."

"제가 아는 게 좀 많답니다."

"하하. 다른 세상에서의 지식을 갖추셨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하지만 제가 묻는 것은..."

"프란 양께서는 르나르 일족 당주님의 하나뿐인 딸이시고. 거기 계신 우람한 분의 이름은 마틴 우르수스라는 것 정도는 알지요."

"……."

순간. 수인국 사절단의 표정은 다시 한번 굳게 되었고, 조금 전까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로란츠 역시 긴장하게 되었다.

'둘째 도련님의 첫 외출이라 그런가. 사절단의 경험이 부족하네. 이런 말에 너무 긴장하는데.'

차세대 수왕 후보들은 수하들과 함께 성장해나가기에, 이들을 인솔해온 사람을 제외하면 전부 초짜일 것이다.

나는 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일 중요한 건 3년 뒤..."

"……."

"프란 양의 키는 153cm에서 멈추십니다."

"... 뭐?"

"슬픔을 이겨내지 못한 나머지. 10cm에 이르는 킬 힐을 신고 다니시다 허리를 다치게 돼죠."

"그럴 리 없어..."

"프란. 힐은 되도록 낮게 신으세요. 당신이 먼 타국 땅에서 다치게 되면 큰일이니까요. 로란츠 님과 마틴이 요통에 좋은 약재를 찾아, 에우데미아의 왕도 거리를 헤매시게 된답니다."

"닥쳐어어어어!"

꼬맹이 여우는 내 말을 듣기 싫다는 듯, 머리 위로 솟은 두 귀를 막고 소리쳤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 만약 그녀가 끝내 힐을 고집한다면, 로란츠는 추운 왕도 거리를 이방인과 함께 헤매며 약초를 찾게 될 것이다.

내 옆에 있던 아일라와 헤르만이 말했다.

"공작님."

"왜 그래."

"너무 하셨습니다."

"형. 내가 봐도 진짜 너무 했어."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게 더 나쁘십니다. 공작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대부분 실제로 일어나지 않습니까. 저기 계신 소녀분께서 실제로 키가 거기서 멈추신다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그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조곤조곤 프란을 조리돌림을 시전하는 아일라였다.

...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직원들이 날 뭐라 하다니. 혹시나 싶어 내 뒤를 보면 수인 꼬맹이들은 슬픈 눈으로 프란을 보고 있었으며, 가면을 쓴 윤흠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런 우리 측 반응을 본 사절단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아일라의 발언이나 다른 이들의 반응이 너무나 그럴듯 하다 보니, 내 말이 실제로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나 보다.

이런 상황이 전화위복이라는 걸까. 비록 직원들은 나를 못된 놈 취급을 하고 있으나, 회의장의 분위기는 전부 나에게 넘어온 셈이다.

'은근슬쩍 목적이나 떠볼까...'

기껏 미래의 정보를 흘려가며 기선을 잡았으니, 지금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때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로란츠 님. 그런데 저도 모르는 게 있습니다."

"... 그게 무엇입니까."

"로란츠 님께서 왜 저 같은 표류자를 만나려 하셨는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이 세상에 온 지 반년밖에 안 된 표류자. 그런 저를 만나 무슨 말씀을 하려고 오신 건지요."

"……."

내 물음에 로란츠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그리고 내게 머물러있던 그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아일라의 방향. 아니. 정확히는 우리의 뒤에 있는 수인 녀석들 쪽이다. 이내 그의 시선은 그쪽으로 잠시 고정되었고, 눈에 실렸던 힘이 풀림과 동시에 입술이 열렸다.

그 모습은 마치 숨겨둔 보물을 찾아낸 어린아이와 같았으나. 수인국의 고위종답게 찰나의 순간 보였던 그 흐트러짐은 금세 정돈되었다.

침을 넘기는 척하면서 자기 표정의 변화를 숨기는, 어찌 보면 뻔한 술수다.

"왕국에 도착한 사절단으로서, 저희는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왕도 내의 수인들에게 어려운 일은 없는지. 조약은 잘 이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죠."

"그렇군요."

"하지만 몇몇 동포들 중, 시하 공작께서 밝으신 행보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행보입니까."

"가령, 견인족을 혐오하는 발언을 하셨다던가."

높은 확률로 저건 구실이다.

작중 로란츠는 행동을 위한 당위성을 충분히 확보한 뒤에야 본래의 목적을 추구하는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세간의 평가에 따르면, 로란츠는 마초이즘에 쩔어있는 보통의 수인들과는 다르게 '별난 수인'이었지. 그런 그가 내 발언을 두고 시시한 논쟁을 벌일 리 없다.

그리고. 표정은 그렇게 갈무리하면 안 되지. 상대방이 보고 싶어 하는 표정을 골라 취하고, 내가 가진 생각과 감정을 감각으로부터 유리시켜야만 한다. 뒤늦게 표정을 갈무리해봐야, 눈썰미가 좋은 사람에게는 전부 들키게 되어 있다.

'바로 나처럼 말이지.'

나는 지금의 로란츠가 원하는 반응... 이 상황이 난처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표정을 연출했다.

왼팔로 오른팔을 지탱하고. 손으로는 입을 가리며 고민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건 덤이다.

"그 일을 어찌 조사하셨나요."

내 반응을 지켜보던 로란츠는 물음에 답했다.

방금보다는 표정에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다.

"해당 피해자들은 공작께 갖은 모욕을 당했다고 저하더군요. 허나. 이는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예. 그렇기에 공작과 대면하고, 오해를 푸실 기회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치우친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제시하고, 상대방에게 베푸는 입장이 되겠다. 참으로 모범적인 대화 방식이다. 이 프레임에 맞춰서 해명을 하다 보면, 어느샌가 나는 프레임에 갇힌 죄인이 되어 있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기존의 '프레임'을 깨야만 하는 사람이다. 이 부조리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틀'을 전부 깨버리고, '창'을 갈아치우며, '인식'을 뒤바꾸어야만 하니까. 그러니 지금 저 백호 꼬맹이가 내게 씌우려는 프레임 역시 부숴버릴 것이다.

"확실히. 제가 개새끼란 단어를 썼었죠."

"그러신가요."

"하지만 로란츠 님. 그게 뭐가 나쁩니까."

"... 네?"

내 말에 회의장의 모든 사람은 귀를 의심했다.

아니. 두 사람은 예외였다. 헤르만은 '이 인간 또 저질렀네.'라는 느낌으로 날 흘겨보고 있으며, 아일라는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내 말뜻을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똑같은 말을 다시금 반복했다.

"다시 묻죠. 개새끼란 단어가 왜 나쁩니까."

"당연히 견인을 차별하는..."

"분명 그리 사용되는 단어기도 하죠. 허나, 저에게는 '나쁜 견인'을 칭하는 단어일 뿐입니다."

"……."

"제 앞에 쓰레기들이 몰려와 행패를 부린다면. 저는 몇 번이고 개새끼란 단어를 쓸 것입니다."

내 말에 호위로 들어온 사절단 놈들의 얼굴은 시시각각 붉으락푸르락 변하고 있었다.

곧장 자리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발끝에 힘을 줬다가 뺏다 하는 놈들도 있을 지경.

하지만.

로란츠는 한 손을 펴들고 그들을 진정시켰다.

"진정들 하라."

"……."

"공작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으니, 양측의 말을 들어봐야겠지요."

"제가 말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로란츠 님께 저는 한낱 용의자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리 물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모든 말들은 전부 계산된 것이었으나. 지금 이 물음만큼은 내 가슴이 시킨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임 속에서... 그가 '별난 수인'이었던 이유를.

"이유라..."

게임의 아카데미 루트에서는 각국의 차세대 통치자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너무나도 어둡다는 것이다.

부모와 친우를 잃은 알렉산더는 슬픔에 잠겨 버리고. 그의 정의는 길을 잃어 방황하게 된다.

언니의 행방을 찾아온 혜선이 이곳에서 마주한 건 절망뿐. 그녀는 악역 여왕이 되어버린다.

알렉산더와 혜선. 그 두 사람에 대응하는 수인국의 캐릭터가 바로 내 눈앞에 있는 로란츠다.

그는 본편 시점에 무기력에 빠진 수인국의 도련님이지만, 실낱같은 본성이 아직 남았으니.

게임을 어느 정도 플레이한 이들은 그의 타고난 매력에 '별난 수인'이란 별명을 붙이게 된다.

작중 다른 잘나신 수인들과는 다르게, 오직 로란츠 블랭크만이 가지고 있는 단 한 가지 매력.

그 매력이란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대단하다.

"지금 듣지 않으면. 후회할 것만 같습니다."

수왕의 두 번째 아들. 로란츠 블랭크. 그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별난 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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