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80화 (180/215)

〈 180화 〉 2­144. 로란츠 블랭크 (3)

* * *

2­144. 로란츠 블랭크 (3)

로란츠의 물음에 나는 준비해두었던 서류탑을 꺼냈고, 수인국 사절단은 한참 동안 그 서류들을 읽어야만 했다.

그 서류들의 내용은 왕도에서 벌어진 '수인 차별 논란'들 중, 역갑질에 해당하는 사건을 조사한 것들이었다.

사실 에우데미아에서는 아주 흔하디흔한 일로, 대부분 사람은 난동 부리는 수인들과 엮이기 싫다는 이유로 합의를 하고 넘어가 버린다.

하지만 클로에가 이르길, 수인국 본토에서 살다 온 감성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으니, 로란츠 일행도 이를 넘기기는 힘들 것이다.

침묵을 지키던 불곰 수인, 마틴이 말했다.

"여기 적힌 것들. 다 사실입니까?"

"당연하죠. 뭣하면 그곳에 적힌 수인들을 이곳에 호출해서 자백제를 먹여봐도 됩니다."

"흐음..."

무표정을 유지하려던 그었으나, 지금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상황.

나는 문서를 읽고 있는 로란츠에게 말했다.

"사실 수인인권보호조약은 장벽 밖의 수인들이 타 종족, 주로 인간처럼 사회를 이룬 종족들과 비슷한 권리를 가지기 위해 체결된 것이죠."

"네. 알고 있습니다."

"허나, 에우데미아 왕국에는 이 조약을 무기로 휘두르는 수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왕실이 관용을 베풀고 있기에 망정이지, 언젠가 조약을 깨뜨려도 이상한 일이 아니죠."

"……."

로란츠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옆에 있던 여우 소녀 프란이 내게 날 선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걸로 공작께서 내뱉으신 발언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논점을 흐리지 마세요."

"프란. 그건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보는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랍니다. 그 문서들이야말로 제 견해를 대변하고 있는데, 어딜 봐서 제 논점이 흐려졌다는 건가요."

"……."

프란은 그 자리에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되려 당당한 어조로 발언하자,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의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서를 보며 담담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로란츠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이 문서들을 주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프란의 말을 빌리자면. 공작께선 수인 범죄자들이 '논점을 흐리기 위해' 국가 간의 조약을 들먹인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싶으셨겠지요."

"맞습니다. 범죄자란 법이 정한 선 위에서 줄타기하는 존재들이나, 수인 범죄자들은 다릅니다."

"일단 선을 넘고 나서 피해자에게 수인인권보호조약을 들이밀며 협박한다. 이런 맥락이군요."

"정확하십니다. 로란츠 님은 차분하신 분이군요."

"...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래도 공작께서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듯합니다."

역시 별난 수인.

타인의 말을 듣다가 감정이 앞서버리는 다른 수인들과는 다르게, 내 의중을 읽고 필요한 말만 선택하는 로란츠였다. 머리를 차갑게 유지하는, 그런 이색적인 수인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등받이에 허리를 대면서 말을 이었다.

"에우데미아의 공작에게는 즉결 처분권이 있습니다. 범죄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심판할 수 있는 권리지요."

"그렇군요."

"용병 길드의 부정부패를 적발하여 제가 현장을 급습한 적이 있습니다만, 당시 길드의 참모가 견인족이었습니다. 길드에 빚 진 수인을 상품으로 팔기도 하고, 갓 수인국을 나선 어린 용병들 상대로 사기를 치는, 그런 개새끼였지요."

"공작의 말씀만 들어보았을 때는 정당하군요. 하지만 저희가 접한 것은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카데미 거리에서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아. 그런 일도 있었지요."

...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때 그 일은 직권 남용을 '조금' 하긴 했다.

아무리 평등에 민감한 수인국이라고 해도, 차별적인 단어 한마디에 빙창을 꽂아버리진 않는다. 처벌해보았자 국내의 탄광으로 한 달간 채굴을 보내는 정도겠지. 어찌 되었건 빙창으로 신체를 꿰뚫어버린 내 행동은 수인국 기준으로 과잉방위인 셈이다.

그 당시에는 요나가 조약을 위반해서 처벌했다는 말에 넘어가 주긴 했어도, 까딱 잘못하면 저쪽 사절단에게 꼬투리가 잡힐만한 상황이다.

'그래도 솔직하게, 당당하게 말해야지.'

괜히 이런 이야기에 살을 덧붙였다가 말꼬리를 잡히면 더 귀찮아진다. 그리고 지금은 사법부의 허가가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니, 자신 있게 말해버린 후 시치미를 떼는 게 나을 듯하다.

"그 사건에서 제 직원, 지금도 제 뒤에 있는 저 묘인족 아이가 피해자였습니다."

"... 네?"

"제 직원이 피해자였습니다만..."

"……."

갑작스럽게 로란츠는 내 말을 끊으며 반문했고, 이어진 내 설명에 잠시 넋을 놓게 되었다. '잘 듣는' 그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이게 그렇게 큰일인가? 방금도 수인 아이들 쪽을 쳐다보다가 표정이 한 번 무너졌었는데.'

지금 내게 떠오르는 가능성은 두 가지.

먼저, 로란츠가 우리 아이들을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이건 이상하다. 클로에를 비롯한 아이들은 고위층과 접점이 없었고, 백호와는 일면식도 없다고 했었다. 환인족인 라나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데, 그녀 역시 어른이 아니었기에 백호와 직접 대면한 경험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수왕의 둘째 아들인 로란츠가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건 훨씬 더 이상한 일이다. 그가 아쉬울 게 무엇이 있어서 우리 아이들을 보고 표정이 흔들리겠나.

그게 아니라면 내 수하 중 어린 수인이 있다는 것에 놀라기라도 한 걸까. 그것도 에퀼리아식 정복을 입은 수인이니, 꽤 놀랄 만도 한 것 같다.

의아함을 느낀 나는 그에게 물었다.

"로란츠 님. 왜 그러십니까?"

"... 아닙니다. 계속 말씀해주십시오."

"흐음. 알겠습니다."

뭐라고 말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별다른 대답이나 반응은 없었다.

'확신은 못 하겠네... 그러니 로란츠가 수인 아이들에게 움찔거렸다는 사실만 기억해두자.'

그런 마음가짐과 함께, 나는 설명을 이었다.

"두 달 전이었을까요. 저와 갈 곳이 있어 함께 길을 걷고 있었더니. 어떤 견인족 수인 하나가 저 아이에게 약해빠진 고양이 년이라더군요."

그냥 고양이라 했나. 고양이 년이라고 했나. 확실하진 않으나, 내 머릿속엔 년이라는 접미사가 붙었노라고 기억하는 중이다.

내 말에 로란츠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어찌하셨습니까."

"저도 모르게 개새끼란 단어가 나오더군요. 그랬더니 수인 인권 조약에 따라 처벌받을 것이라 저를 역으로 협박하기에, 법대로 처벌했습니다."

"법대로요?"

"예. 그자는 조약을 먼저 위반했고. 에우데미아 공작인 저를 모욕했습니다. 거기가 저 아이와 그 견인족은 모험가였죠. 모험가 간에 모욕적인 언사를 한 시점에 규칙 위반입니다."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 정도야 이미 들으셨겠지요. 마법으로 손 좀 봐주고 치안본부에 넘겼습니다. 모험가 자격 박탈은 확정이고, 징역은 10년 이상입니다."

"……."

"전후가 어찌 되었건. 저는 범죄자에게 욕을 했을 뿐입니다."

이 정도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전부 했다.

적어도 내가 차별 목적으로 나쁜 말을 쓴 것도 아니고. 조약은 충실히 이행하고 있으며. 이쪽이 피해자라는 건 전부 밝혔으니까.

아마도 로란츠는 수인국 사절단장의 입장으로 내 행동을 국제적으로 비난할 순 없겠지. 하지만 내 행동이 과했다는 지적 정도는 할만한 것 같다.

다른 사절단원들도 비슷한 생각인 듯, 몇몇은 내게 눈총을 쏘고 있으며, 누군가 기대감이 잔뜩 서린 눈빛으로 고뇌하는 로란츠를 보는 중이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로란츠는 회의장 탁자 위의 한 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간간히 헤르만의 한숨 소리와 클로에의 끙끙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리는 가운데. 로란츠가 나를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고.

"잘하셨습니다."

"그리 말씀... 예?"

"공작님이 계셨기에 다행입니다."

나는 뜬금없는 칭찬을 듣게 되었다.

약간의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던 회의장에는 허탈감과 안도감이 교차하게 되었고, 로란츠는 제 말을 이어갔다.

"말씀대로. 이 문제가 지속된다면 국가 간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건들 역시, 건수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군요."

"예. 전부 두 달간 벌어진 사건이니까요."

"그렇군요. 공작께서 선례를 만드셨음에도 이 정도라면 큰 문제라 생각합니다. 제가 고국으로 돌아가면 폐하께 말씀을 올려 보겠습니다."

"그리 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감사에 로란츠는 미소와 함께 15도 정도 고개를 숙였다. 상하 관계에 따른 인사라기보다는, 감사나 예의에 가까운 인사였다.

그리고 로란츠는 내 뒤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쪽에 계신 동포 여성분께 묻고 싶군요. 피의자의 폭언에 마음 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괘... 괜찮아요오..."

"참 다행이로군요.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해보겠습니다."

저 미소는 타국에서 고생하는 동포를 향하는 것일까. 사건 피해자를 향한 심심한 사죄일까. 이 둘도 아니라면 혹시 클로에 개인에게 향하는 걸까.

나는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다.

.

.

왕도로 오는 도중 겪었던 썰풀이라던가.

처음으로 왕도를 방문한 느낌이라던가.

훗날의 아카데미 생활이 기대된다던가.

왕실 교사는 어떤 수업을 진행하냐던가.

내 욕설 이슈가 지나간 뒤로, 면담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게 완전한 끝은 아니었다.

말을 열심히 하다 보면 배가 고프기 마련이고. 나는 귀족으로서 귀빈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망신을 당하게 되는 입장.

자연스레 면담은 저녁 만찬회로 이어지게 되었고. 나는 맞은편에 앉은 로란츠에게 말했다.

"요리는 입맛에 맞으십니까."

"가히 환상적이군요. 수왕부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도 여기에는 따라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요즘은 이 요리 때문에 모험가가 되려는 귀족들도 생겨날 정도입니다."

"하하... 방금은 이 정도 요리를 대접해주시는 분께 제 수하들이 실례를 보였던 건 아닌지, 참 송구스럽군요."

사실 고블린은 먼 옛날 마족으로 분류되었으나, 마족 해방 당시 에퀼리아에 잔류하기로 한 유일한 종족이다. 어찌 보면 '에퀼리아'라는 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는 수인들에게는 최악의 종족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고블린이 쉐프라니. 그 탓에 소란이 생길 뻔했으나, 로란츠의 중재로 '일단 먹어보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입을 불룩 내밀고 안 먹겠다며 투정 부리던 수인놈들이 미친 듯이 음식을 입에 넣는 진풍경이 펼쳐지게 되었다.

"손님들께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에 힘을 얻는 분이시니 괜찮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래도 나중에 제 사과는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나와 로란츠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식사를 마친 클로에가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뒤에서 눈치를 보더니...

내 귀에 대고 귓속말로 물었다.

"공작님. 저 연습하러 가도 될까요..."

... 조금 전에는 회의장에 출석하기조차 싫어하더니. 이 연습벌레는 오늘 같은 날에도 궁도장에 틀어박힐 생각뿐이다.

그래도 축제 기간이라 오늘은 근무도 쉬는 날인데 자기 시간을 회의에 할애해주었으니,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된 것 같다.

"그래. 들어가도 돼."

"감사합니다..."

클로에는 어디 관절이 고장 난 로봇마냥, 딱딱하게 나와 로란츠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었고. 그 뒤로 궁도장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로란츠가 물었다.

"저분은 어디 가시는 건가요?"

"휴일에 꼭 하는 일이 있어서요. 원래 오늘은 직원들이 쉬는 날이랍니다."

"아... 이거. 제가 점점 더 죄송스러워지는데요."

"괜찮습니다. 직원들이 추가 근무 수당도 넉넉하게 챙겨주는 편이니까요."

"추가 근무 수당이라... 그건 혹시 표류자의 세계에 존재하는 개념인가요?"

혹시 클로에에게 관심이 있나 싶었는데... 당장 표류자의 세계에 관한 화제로 이야기를 돌리는 로란츠였다.

'내가 헛다리를 짚었나...'

그렇게 우리의 대화 주제는 내 세계에 존재했던 온갖 수당으로 흘렀고. 퇴직수당에 주휴수당에 야근수당에 취업 보조금까지, 내가 아는 수당이란 수당은 전부 나왔을 즈음...

로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화장실이 어디 있을까요."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가시면 됩니다."

"... 감사합니다.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로란츠가 자리를 비운 그 순간.

"헤르만."

나는 곧장 헤르만에게 신호를 전했고. 눈치 빠른 그는 그림자 속에 숨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