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2145. 로란츠 블랭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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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5. 로란츠 블랭크 (4)
클로에의 일과는 활쏘기로 시작해 활쏘기로 끝난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소홀히 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 역시 모험가 길드 일을 돕거나 치안 유지에 힘쓰고 있기에, 자투리 시간을 전부 활 연습에 투자할 뿐이다.
그렇게. 오늘도 나름의 업무를 마친 클로에는 밤이 되어서야 궁도장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하아... 이제 마음이 좀 풀리네."
이제는 이 숙소에서 자기 방만큼 편한 공간이 되어버린 궁도장. 그곳에서 클로에는 긴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먼발치에서 보는 게 고작이었던 고위종들과 한 공간에서 대면했으니까. 면담 내내 느껴졌던 부담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클로에는 하늘이 트인 궁도장에서,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일할 때조차 백호족은 보지도 못했는데."
사실 클로에는 수왕부 산하 기관에서 일한 적이 있으나, 높으신 분들을 본 기억은 좀처럼 없다. 그랬던 자신이 수인국을 나와서야 이런 기회가 생기게 된다니. 마음 한편으로 설레기도 하는 반면, 씁쓸함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듯 한 기억이 떠올라 정신을 차렸다.
"연습이나 해야지. 연습하자. 연습..."
굳은살이 박히기 시작한 손에는 은인께서 선사해준 장갑을 착용하고. 남겨진 유품에는 시위를 매달고. 기억을 되새기며 화살을 뽑아 들었다.
지이이익
화살이 걸린 시위가 늘어나는 이 감각은 어느 샌가부터 익숙해졌다. 이렇게 시위를 당기는 동안 근육에 전해지는 묘한 긴장감.
티잉!
이 긴장감은 시위를 놓는 순간 해방되고. 활줄이 제자리를 찾아감과 동시에, 화살은 끊임없이 나아가 과녁 정중앙에 부딪힌다.
클로에는 언젠가부터 이 느낌을 즐기게 되었다. 시위를 타고 손에 전해져오는 감각은 약간의 성취감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로 만족하는 건 아니다. 특히나 오늘처럼 달이 밝은 날이라면 더더욱.
'그날. 인환 아저씨는 엄청 매끄럽게 쏘셨는데...'
눈을 가린 채로도 물 흐르는 듯한 느낌으로 담담하게 화살을 쏘던 그 동작. 그 모습. 그 기억.
그 당시에는 멋지다, 신비롭다, 아름답다, 대단하다는 감상만이 전부였으나. 이렇게 직접 활을 잡고나서는 그 어려움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그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며 정진하게 된다.
그 뒤로도 한 발. 한 발. 클로에는 모든 시도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화살을 쏘았고. 준비해둔 화살이 동나버린 직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한 번만 더 쏘고 잘까...'
평소에는 하루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활을 쏘다 잠들지만, 오늘은 회의가 길어진 탓에 그러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클로에가 과녁을 향해 다가가려 할 즈음... 뒤에서 짝. 짝. 짝. 느린 박수 소리가 들렸다.
"로란츠 님...?"
궁도장에 소리소문없이 들어온 로란츠는 한편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었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클로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클로에에겐 두 달 전, 거리에서 시하가 난동을 부린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으니까.
그 뒤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의류점 주인장이 준 케이스에 활을 곱게 넣어 다녔는데. 하필 오늘 같은 날, 수인들의 수장에 가까운 백호족 도련님에게 이 모습을 보이다니. 일전에 겪었던 그 일이 떠올라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말문이 막혀버린 클로에에게, 로란츠는 친근하게 말했다.
"훌륭하네요. 제가 비록 활에 대한 것은 잘 모릅니다만. 저도 모르는 사이 빠져들었네요."
"여긴 언제 들어오신 거예요?"
"그리 오래 지나진 않았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오던 도중 어떤 소리에 이끌려 와보니,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네요."
"그... 그렇군요."
무시하는 기색은 없었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클로에는 긴장하게 되었다.
평소처럼 과녁의 화살이나 뽑아내러 가야 할까, 아니면 로란츠를 밖으로 안내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슬쩍 숙소로 도망쳐야 할까. 제자리에서 어영부영 갈피를 못잡고 있으려니, 로란츠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언제부터 왕도에서 활동하셨나요?"
"이 년 정도 되었어요."
"공작님과 함께 일하시게 된 것도 그쯤인가요?"
"아니요. 이제 반년 째네요."
"그래도 오래 일하셨네요. 공작님 밑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길드 업무를 돕기도 하고. 거리 치안 유지나 자잘한 심부름도 하고 있어요."
조금 위험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직접 선택한 일이다. 그런 일을 괜히 말했다가 백호족에게 오해를 사긴 싫었던 클로에였다.
그 뒤로도 로란츠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수인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다른 묘인족과 비슷했죠. 조금 다른 일이 있었다면, 종족 간 갈등조정 위원회에서 근무했었던 경험이 있긴 해요."
"아. 갈등위에서 근무하셨었군요. 수왕부 직속 기관이라 복지 면에서 모자람은 없으셨을 텐데, 왜 수인국을 나오신 거죠?"
"그건..."
꿈을 찾아서. 더 인정받고 싶어서. 용병 여왕의 소문을 듣고, 그녀만큼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런 말을 수왕의 아들 앞에서 함부로 꺼낼 수는 없었다.
클로에가 곤란해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란츠는 한층 더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사정이 곤란하시다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함이 클로에 노르 필라인. 맞으십니까."
"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왕도에서 사는 동포들의 이름 정도는 수인국 대사관에서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
"사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시하 공작의 밑에서 일하는 수인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나 확인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네?"
정당한 대우라니. 그건 시하가 자신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고 있음을 의심하는 표현이 아닌가.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 받은 급료와 거처, 각종 마법진 새겨진 보호복, 손을 다칠까 염려하여 사주신 장갑, 마지막으로 이 숙소의 궁도장까지. 이 모든 것을 받고 있음에도 시하에게 의심이 쏟아진다고 생각하니, 이것만은 부정하고 싶어졌다.
"그런 확인은 안 하셔도 돼요."
"흐음."
"공작님께서는 과분할 정도로 저흴 잘 대해주고 계시니까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클로에의 단호한 대답에, 로란츠는 궁도장에 쏟아져 내리는 달빛을 보며 고민했다. 줄곧 유순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로란츠는 물었다.
"수인에게 에퀼리아의 제복을 입히고. 어울리지 않는 활을 쥐여주는 게 부당한 행위 아닌가요. 이런 대우를 받으실 바엔 저와 수인국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에요."
"사양하실 것 없습니다. 당신을 포함한 다른 일행분들의 처우나 일자리 정도는 제가 충분히..."
"그런 게. 아니라고요."
어느샌가 클로에의 어조는 단호한 것을 넘어, 날이 서 있는 수준까지 격앙되어있었다.
"이 제복은 공작님께서 저희의 안전을 생각해서 제공해주신 소중한 옷이에요. 이걸 입는다고 제 종족이 바뀌지는 않아요. 거기다 제가 활을 든 것은 제 선택이에요."
"하지만 그 선택 자체가 강요된 것일 수도 있겠지요. 돈, 계약, 조건. 바깥세상에서 하나 같이 중요한 것들 아닙니까."
"아뇨. 강요나 속임수 따위는 없었어요. 시하 공작님께서는 그런 저열한 분이 절대 아니세요."
"... 시하 공작의 일행이 재앙의 습격에 맞서 싸웠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큰 위험이 닥칠 수도 있겠지요. 그 사실을 알고도 계약했다는 건가요? 당신이 그런 위협에 애써 맞설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저희가 선택한 일이에요. 로란츠 님께서 저희의 자유를 부정하실 수는 없습니다."
내가 백호족의 앞에서 무얼 믿고 소리 지르고 있는 걸까. 마음속에 두려움이 일었으나, 그런 것 따위는 사소한 일이었다. 애써 찾아낸 자신의 길을, 이 사람이 너무나도 쉽게 부정해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미 떠나버린 그 사람처럼 타인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 사람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분야에서만큼은 끝을 보고 싶다. 누군가는 길을 남겼고. 클로에는 그 길을 간직하고 싶었고. 은인은 그런 자신을 인정해주었다. 수인국으로 돌아가서 어떤 자리에 이른다고 해도, 마음속 소중한 것과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수왕의 둘째 아들, 로란츠는 자기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작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내뱉었군요."
"……."
"클로에 님께서 그 정도로 이 장소를 아끼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클로에는 사과를 듣고도 치켜뜬 눈으로 노려보기만 할 뿐, 그에게 답하지는 않았다.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던 로란츠는 이내 시간이 촉박함을 깨닫고 할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 만일 힘겨운 일이 생기신다면 수인국 대사관을 찾아가십시오. 제가 미리 일러두겠습니다."
"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그럼. 실례했습니다."
다시 한번 약식으로 인사한 로란츠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궁도장을 빠져나왔다. 화장실을 간다며 시간을 빼긴 했지만, 연회장에 늦게 도착하면 의심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음을 재촉해야 함을 알면서도, 로란츠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멈춰 서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지금 그녀가 있는 궁도장에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에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하아..."
그렇게 아무도 없는 복도에는.
소년의 한숨만이 자리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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