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82화 (182/215)

〈 182화 〉 2­146. 로란츠 블랭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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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6. 로란츠 블랭크 (5)

저녁 만찬회가 끝나고 어느덧 시간은 밤이 되어 사절단은 떠날 준비를 하게 되었다. 마당에서 마주 선 시하와 로란츠는 서로에게 약식으로 예를 갖추었다.

"대접이 부족한 건 아니었나. 송구스럽네요."

"하하. 아닙니다. 오히려 바쁘신 와중에 찾아뵈었는데도 극진히 대접해주셔서 놀랐습니다."

"그럼 다행이군요. 오개국 회담을 마치시면 곧장 수인국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일정이 바쁘시군요. 시간 여유가 있으면 왕도 아레트를 조금 더 보고 가셔도 됐을 텐데..."

"그 부분은 저도 아쉽습니다."

로란츠는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시하의 뒤편을 힐끔힐끔 바라보았지만, 찾고 있는 이는 모습을 비추지 않은 상황. 로란츠의 마음속에는 씁쓸함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수하들이 쓰는 숙소라 보기 힘든 대저택, 맛 좋은 요리가 제공되는 식당, 수평적인 근무 분위기. 휘하 수인이 모욕당했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마법을 난사하는 고용인.

시하 공작이 클로에를 비롯한 수하들을 아낀다는 증거는 눈앞에 충분히 널려 있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이 앞서버린 탓에, 눈앞에 있는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로란츠가 자신의 실언을 되새기고 있을 즈음, 시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란츠 님."

"네. 공작님."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달성하셨습니까."

"……."

회의장에서부터 여러 인물의 정보는 물론, 그들의 미래마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던 시하다.

로란츠는 '설마'라는 단어 하나로 시하가 나열했던 말들을 부정하고 있었으나. 이번 물음만큼은 의미심장하게 들여왔다.

"공작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쓸데없는 걱정일 수 있지만, 로란츠 님의 표정에 서운함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듯 해서요."

"하하. 그저 밤이 되어 피곤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로란츠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답하자, 사절단원이 신호를 주었다. 마차가 출발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였다. 그에 로란츠는 두 비서와 함께 마차 객실에 오른 뒤 말했다.

"그럼 시하 공작님. 가보겠습니다."

"네. 그럼 다음에 봅시다."

"다음이라니요?"

"2년 뒤. 그때는 세분 모두 왕도에 오시지 않습니까. 아카데미 유학생으로서 말이죠."

"아..."

"그때가 오면 제자들과 사이좋게 지내주셨으면 합니다. 모두 착한 녀석들이거든요."

정확히는 2년하고도 반년 뒤. 해방력으로 200년. 그때면 로란츠도 성년이 되어 아카데미에 입학해야만 한다.

이번이 완전한 끝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로란츠였다.

"그때가 오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예.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됩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얕게 고개를 숙이자, 수인국 일행을 태운 마차는 숙소 저택을 출발하여 수인국 대사관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차의 모습이 저택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헤르만이 시하에게 물었다.

"형. 그냥 보내도 되는 거야?"

"왜. 쫓아가서 죽이기라도 하려고?"

"그건 아니지만. 클로에에게 그런 수작질을 부렸는데도 가만히 놔둬?"

"괜찮아. 그건 수왕국의 사절단장으로서 한 행동이 아닐 테니까."

"... 그건 또 무슨 뜻이야?"

"로란츠는 아주 별난 수인이야. 다혈질이 많은 수왕국의 문화 속에서, 타인의 말을 듣고 깊게 생각하는 '별종'으로 자라났거든."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일라가 말했다.

"확실히 회의장에서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공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탓에 더더욱 위험한 상황이지 않을까요."

"이번엔 아일라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이번엔 사절단의 사전 조사가 부족해서 다행이었지. 저쪽에서 더 파고들었다면 위험했을 겁니다. 어쩌면 클로에를 데려가려던 것도 증인 확보를 위한 수가 아니었을까요."

"그래. 나도 아일라와 생각이 비슷하다고. 형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돌아서서 등에 칼을 찌르려고 한거나 마찬가지잖아."

평소 한나로부터 국제정세와 여러 가지 상식을 배운 탓인지. 아일라는 지금 상황에 대해 안 좋은 전망을 늘어놓았다.

'하긴.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게 당연하긴 하지.'

겨우 개새끼 한 마디에 호들갑을 떠는 것일 수도 있으나. 게임 속에서는 수인의 노예화나 욕설 등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만큼 수인국과의 조약은 해석하기에 따라 훨씬 더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시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이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비록 로란츠가 조약 재검토를 약속하긴 했지만, 그 약속을 실제로 이행할지는 모르니까. 만약 클로에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시하의 약점이 잡히는 꼴이었다.

아일라와 헤르만의 견해가 정론인 상황.

하지만 동시에, 아는 것에 따라 정론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시하는 게임 속 로란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말했다.

"로란츠는 단순히 잘 듣기만 하는 건 아냐. 회의에서도 봤잖아. 듣고 나서 자신에게 합리적인 말을 골라서 하는 놈이지."

"그랬지. 그래서 더 위험한 거잖아."

"끝까지 들어. 만약 로란츠가 오늘 정치적인 이득을 추구하고 움직인 거라면, 훨씬 더 까다롭게 준비해서 왔을 거야. 오늘처럼 허술하게 오지도 않았겠지."

"그 말씀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건가요?"

"그래."

"저로서는 짐작 가는 게 없습니다만..."

시하의 말에 아일라가 머릿속으로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는 헤르만 역시 마찬가지.

시하는 갈피를 잡기 못하고 있는 둘에게 말했다.

"방금 말했잖아. 로란츠는 '타인의 말을 듣고 깊게 생각하는' 호랑이라고. 그런데. 헤르만 네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타인의 말을 듣고 깊게 생각하는' 그 자세가 한 번 깨져버렸잖아?"

"아."

"클로에를 꼬드기려고 했을 때..."

"지금쯤 로란츠는 자기 말을 후회하고 있을걸."

시하는 '그 게임'을 하면서, 수많은 인물이 어떤 성격인지, 각 루트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극한의 상황에서 어떤 면을 보이는지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로란츠가 실수하는 조건 역시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소중한 누군가에게 큰일이 닥쳤을 때. 하지만 제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을 때...'

'로란츠는 클로에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 하지만 정작 클로에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결론을 내린 시하는 헤르만에게 말했다.

"헤르만. 클로에가 수인국에서 근무했다던 그 조직. 조사할 수 있겠어?"

"수왕부 직속 기관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건 클로에에게 물어보는 게 훨씬 낫지 않아?"

"걔는 그 기관이 싫어서 그만둔 애잖아."

"헤르만 님. 섬세함이 부족하시네요."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헤르만은 힘없이 말했다.

"진짜. 둘 다 너무하네."

"특히 채용 과정이라던가. 자격 요건을 위주로 조사해줘.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지?"

"... 알았어."

"이제 우리도 슬슬 돌아가자."

사실. 시하는 미래의 로란츠가 어떤 아픔을 겪고 무기력한 사람이 되는지 모른다. 게임 속에서 혜세국의 제2 공주 혜선은 '언니를 잃은 슬픔'이라는 주제가 있었지만, 그녀 외의 차세대 통치자 캐릭터들의 과거사는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시하는 그 숨겨진 과거사야말로 중요한 단서라 생각한다. 앞으로 마주할 시대가 악인기임을 알게 되었으니 다른 나라의 사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결함이 가득한 차세대 지도자들이야말로 각 나라의 암울한 배경과 체제를 보여주는 셈이니까. 겉으로 드러나기 어려운 부조리를 찾기 위해 사람을 관찰하는 셈이다.

'알렉산더 같은 사례가 더 있을 수 있으니까.'

사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단 한 사람. 바로 알렉산더 왕자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 처음으로 왔을 무렵, 시하는 알렉산더를 무시하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 알렉산더는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작은 사람'에 불과했으니까. 아무리 일국의 왕자라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하는 왕국의 어두운 면을 목도하며 깨달았다. 알렉산더는 '그렇게 클 수밖에 없었던' 아이였다고. 자신에 비해서 능력이 뛰어난 동생. 그 동생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귀족들. 그 사이에서 갈등하다 기디언과 아버지를 잃었으니, '작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며. 시하는 낮게 읊조렸다.

"하아. 세상 살기 참 힘들다."

"나한테 일은 다 시키면서 그래."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거든."

"아. 그러셔?"

"그러고 보니..."

일을 다 시킨다. 헤르만의 그 말에, 시하는 문득 공주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내일 파티 일정은 맞출 수 있겠네."

"하아... 일 다 시켜놓고 파티 걱정이야."

머릿속은 무거웠으나, 발걸음만은 가벼워진 시하였다.

* * *

수인국 대사관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여우 귀 소녀 프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저 인간 진짜 재수 없어."

"그래?"

"완전 재수 없죠.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요. 초면에 남의 키를 멋대로 말하대고. 하는 말마다 빙빙 쳐돌리기만 하고. 완전 별로였어요."

"하하. 그래도 공작의 말대로 힐은 신지 마. 프란은 키가 작아도 매력 만점이니까."

"도련님까지 절 놀리시면 어쩌자는 거예요!"

빼액 소리를 지르는 프란이었으나. 그 옆에 앉아 있던 웅인족 수인 마틴은 그녀를 신경 쓰지도 않고 로란츠에게 보고했다.

"로란츠. 방금 네게 미행이 붙었다."

"괜찮아. 그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주의를 돌릴 순 있겠지. 오히려 잘 된 거야."

"……."

담담하게 답하는 로란츠였으나. 프란과 마틴은 차마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자신들이 따르는 도련님은 어느새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그 눈빛에서 담담함을 넘은 아련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축제를 맞이한 에우데미아의 왕도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으며, 형형색색의 빛이 떠올라 환하게 빛나고만 있다.

그 거리를 보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생각을 마친 로란츠가 두 사람을 불렀다.

"프란. 마틴."

"네. 도련님."

"예."

"우리에게 공작을 고발했던 그것들 말이야."

"……."

... 2년 뒤면 이 거리에 돌아올 수 있겠지.

하지만.

그동안 자신의 옛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한 가지 선물을 하고 싶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대사관으로 불러들여. 수왕국으로 송환시킨 다음 탄광에 박아버리게."

""알겠습니다.""

그 후. 로란츠는 잠시라도 이 거리를 눈 안에 담기 위해. 창밖을 멍하니 내려다보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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