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 2148. 게임물 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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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8. 게임물 규제.
해방제가 오기 전만 해도 내 일상은 하루하루가 전쟁에 가까웠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길드에 출근하고, 왕궁에서 학생 수업도 진행하고, 저녁엔 실패한 의뢰 뒷수습과 상인회 방문까지. 이 세상에 분신 마법은 없나 찾고 싶은 정도였다.
하지만 두 가지 사건이 내 삶을 바꾸었다.
먼저. 모험가 길드의 대청소 사건.
단순하게 진상을 확실하게 벌한 사건으로 볼 수 있었지만, 그 파급력은 의외로 대단했다. 이게 어느 수준인가 하면, '청소'라는 은어의 의미가 '258인의 모험가들이 함께하는 자택 방문 서비스'로 바뀌었을 정도다.
덕분에 길드에 소속감을 느낀 원로 모험가들이 스스로 자원하여 신입 교육을 자처하게 되었고, 의뢰인들은 한층 더 공손해졌다. 그리고 대청소의 당사자가 에퀼리아 고위층 자제라는 소문이 돌자, 또다시 해이해져 가던 왕도 상인들의 기강이 다시 한번 잡히었다.
그야말로 일거양득. 아니, 일거삼득의 효과. 이 기세를 몰아 인력을 충원하기도 했으니, 모험가 길드는 비로소 안정기에 진입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수인국 사절단과의 면담.
오개국 회의가 개최되기도 전에 수인국 사절단장이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은 금방 퍼져버렸다. 거기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반항했던 몇몇 수인들이 탄광행을 당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고, 대사관 앞에는 인권 조약을 악용하면 자국에 송환하겠다는 공고가 붙었다고 한다.
하루 사이에 로란츠가 큰일을 한 셈인데. 덕분에 모험가 길드는 이전 주보다도 더 편해졌다는 소식을 내게 전해왔다. 덕분에 내 악명은 높아지겠지만, 이것도 내 일을 줄이는 결과가 됐으니 나름 만족하는 중이다.
대청소 사건과 로란츠와의 면담
분명히 이 두 가지 사건은 좋은 바람을 불러일으켰으나, 내게는 아직 고민이 남아 있다. 그 고민은 바로, 내 행보에 입질이 오지 않는다는 거다.
그 게임에서. 곧 강대한 재앙이 왕국을 습격하고, 그로 인해 국왕과 기사단장이 죽을 것이라는 단서는 매우 많았다. 그리고 지금 왕국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 특히 '쿠데타를 일으킬만한 이들'이 꽤 있으니, 그 단체가 바로 차남회다.
여기에 시온 자작령에서 차남회의 일원인 마크가 해방 교단과 엮여있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차남회 역시 해방 교단과 결탁했을 가능성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걸 깨달은 이후부터. 나는 부패 귀족들의 수족이라 볼 수 있는 용병 길드를 축출하고, 부패한 상인들을 치워내 그들의 자금줄을 끊었다. 다른 한편으로 차남회를 규탄할 증거도 충분히 모은 상태이기에, 지금 당장 발람을 비롯한 차남회 전부를 구속하고 죽여버릴 명분도 있다.
하지만. 미처 쳐내지 못한 단 한 가지 가능성이 내 결정을 가로막고 있다.
과연 시온 자작령에서 처리한 뵈브가 이 나라 해방 교단의 전부일까. 차남회의 뒤에 숨어있는 해방 교단이 더 있지 않을까. 만약 차남회를 섣불리 쳐버린다면, 그 쓰레기들은 모습을 감추지 않을까. 이 가능성이 나를 망설이도록 한다.
사실, 당장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서는 차남회를 처분하는 게 옳다. 하지만 내가 바라고 있는 건 아셰리아 공주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행복과 삶. 차남회 같은 덜떨어진 놈들을 처리하다 해방 교단을 놓친다면, 내 바람을 달성하지 못한다.
발본색원.
뿌리를 뽑고 원인을 색출한다.
그 게임에서, 가지치기를 할 때면 꼭 지켜야 했던 원칙 중 하나. 이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언젠가 후회하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게임이 아니게 된 이 세상에서 그 원칙을 굳이 지켜야만 할까. 원칙을 지키다 오히려 후회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어느 쪽이든. 나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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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저녁.
학생들이 해방제 기념 파티를 하자고는 하지만, 작년도 연말 파티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이번에도 아모스와 아일라는 높으신 분들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집을 비웠고. 나와 사아씨는 작년 연말 파티처럼 음식을 미리 준비해두었을 뿐.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셰리아 공주가 이번에는 제때 도착했기에 심장 쫄깃한 요리체험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고.
'애들 편하게 놀려면 자리를 비켜줘야겠지...'
나와 가장 나이 차이가 적은 학생은 알렉산더와 유나로, 두 사람은 올해로 14살. 나와 비교하면 무려 10살 차이다. 거기다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다 보니, 귀족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 줄 모른다.
세대 차이도 모자라 세계 차이마저 나버리는 이 상황에, 감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시하 선생님."
"왜 그러시나요. 공주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아셰리아 공주가 갑자기 나를 불러세웠다.
공주님이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그녀 뒤에 묵묵히 서 있던 아사가 메이드 스커트 속을 뒤적거렸다.
... 아무리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익숙하다고 해도, 저런 행동은 조금 자제해줬으면 좋겠는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헤르만이 아샤에게 적당히 핀잔을 주었다.
"동생아. 밖에서 그러는 거 아니다."
"닥쳐. 일하는 중이니까."
"하아..."
하지만 헤르만은 아샤의 말 한마디에 격침당했다. 묘하게 여동생에게는 약한 녀석이다 보니,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나저나 일이라니... 아셰리아 공주님이 무언가를 들고 오라고 시킨 건가?'
모두의 이목이 아샤의 롱스커트에 쏠린 가운데, 그녀가 그곳에서 꺼낸 것은...
김빠지게도 책 크기만 한 상자 하나였다.
"그건 또 뭐야."
"보드게임."
"... 보드게임?"
에코니아에도 보드게임이 있었구나. 평소 학과 친구들이 적당한 수로 보이면 보드 게임방에 놀러 가는 경우도 있었기에, 조금은 반가운 느낌이다.
아샤가 꺼낸 상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에코니아 대륙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경제 침략으로 세계정복'이라는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 고등학교 시절, 국사책의 조선 말기 파트에나 나올법한 단어가 게임 제목이라니. 저 게임을 제작한 놈은 어딘가 돌아버린 게 틀림없다.
'저딴 제목을 붙인 게임이 정상일 리 없어. 일단 검수부터 해보자. 나는 이 아이들의 교사니까. 뭘 하고 노는지 정도는 알아야 해.'
나름대로 사명감을 품고 아샤가 꺼낸 상자를 집어 포장을 살피자, 그곳에는 내 눈을 의심하게 되는 문구 하나가 쓰여있었다.
[ 7세 이용가 ]
…….
그 다섯 글자에 내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아샤는 어디선가 커다란 배낭을 들고 왔다. 아셰리아 공주와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못 본 가방인데, 그 크기는 어린애 하나가 들어갈 정도다.
그 크기를 본 유나가 아샤에게 물었다.
"아샤. 그건 뭐예요?"
"보드게임들."
"종류가 꽤 많나 보네요."
거실 테이블 옆에 그 가방을 털썩 내려놓은 아샤는 그 안에서 상자를 꺼내 탑을 쌓기 시작했고. 아셰리아 공주는 그 모습을 보다 내게 말했다.
"왕도민들은 축제 기간에 가족들과 모이면 이런 보드게임을 하면서 친목을 다진다고 합니다."
"이... 이걸 가족끼리 한다고요?"
"네. 남녀노소 모든 이들이 즐겨 한다더군요."
"……."
아셰리아 공주의 말에, 나는 반신반의한 상태로 [경제 침략으로 세계정복]의 포장지를 뜯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지도 한 장과 게임 말 여섯 개. 주사위 두 개와 행동 및 도시 카드들. 실제 금화와 은화를 본딴 가짜 동전들. 전형적인 모노폴리류, 그러니까 땅따먹기 게임들에 있을법한 구성이었다.
만약 함정이 있으면 행동 카드겠지. 나는 50개 정도 쌓여 있는 행동 카드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 마광석 수출 제한 : 2턴. 나를 제외한 '마도구 생산 공장 보유자'들의 '공장 월 수익' 50% ]
[ 부동산세 상승 : 영구. 모든 플레이어의 토지 보유 세금 부담이 10% 오릅니다. 단리 계산 ]
[ 투기 과열 지구 선정 : 보유한 토지 중 가장 지대가 높은 땅의 건축물 설치가 금지됩니다. ]
[ 재앙 출현 : 선택한 토지에 재앙이 출현했습니다. 그 토지의 건축물은 모두 파괴당합니다. ]
[ 경제 보복 : 나에게 적용된 부정적인 효과를 시전자가 함께 받습니다. ]
…….
이게. 설날 추석 명절에 남녀노소 온 가족이 모여서 즐기는 게임...?
다른 이의 경제 기반을 파탄 내는 게임이 왜 7세 이용가가 되어버린 거지. 거기다 재앙 출현은 말 그대로 재앙인데, 그걸 게임에 넣은 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이거 만든 제작자 놈은 내가 꼭 찾아내서 따져야겠다. 경제 관념을 가르치는 건 좋지만, 도대체 7살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쳐선 안될 것을 왜 이렇게 많이 넣었는지 꼭 묻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공주가 내 이름을 불렀다.
"시하 선생님..."
"아. 네."
혹시 다른 학생들과 이 게임을 하는 걸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어조에는 약간의 긴장과 우려가 담겨있었다.
"혹시. 같이 하면 안 되나요?"
"음. 내용상으로 조금 애매하네요."
"선생님과 함께 즐길만한 걸 엄선한건데..."
"... 네?"
다른 학생들과 즐기는 게 아니라, 나까지 포함해서 즐길 생각으로 골랐다니. 의외의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연말 파티에도 선생님께서는 먼저 들어가 버리셨지 않습니까."
"... 그랬죠."
"올해는 다 함께 파티를 즐기고 싶어서 게임을 준비했습니다. 선생님도 같이하면 안될까요?"
공주는 반쯤 애원하듯이 내게 물었고. 다른 학생들 역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
사실 고민이 많아서 방에 들어가 쉬고 싶지만, 공주가 저런 말까지 해버린데다 분위기마저도 이러니, 거절하기가 영 곤란했다.
"같이 하는 대신. 제가 허가한 종류만 해야 해요. 몇 개는 영 부적절한 내용이 많네요."
"네. 시하 선생님!"
공주는 그제야 환한 웃음을 보였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샤가 열심히 쌓아둔 보드게임 탑을 둘러보았다.
그곳에 쌓인 게임의 수는 40개 이상. 그것들의 제목을 본 나는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 세계 철학의 숲 철학과 성애의 상관관계 ]
[ 잃어버린 유적 속으로 ]
[ 전란의 세계 ~ 범람하는 위협 ]
[ 에퀼리안 마피아 ]
[ 연인 젠가 12세 이용가 ]
[ 연인 젠가 17세 성인용 ]
철학, 역사, 정치, 경제, 세계. 심지어 연애까지. 수많은 장르에 붙은 어질어질한 타이틀에, 참 수상한 연령 제한이 걸려 있는 제품이 많았기 때문.
'일단 당장 빼야 할 게 두세 개 정도 보이는데...'
도대체 세계 철학과 성애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 연관성 자체도 의문이지만, 풋풋한 연애를 막 시작한 것이나 다름 없는 알렉산더에겐 너무 이른 내용일 게 확실하다.
거기다 제일 밑에 저건 내가 살던 세계의 SNS에서 수위가 높은 걸로 유명했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어느 표류자가 저딴 걸 도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무조건 압수다.
... 이세계에서.
뜬금 없이 게임을 규제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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