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85화 (185/215)

〈 185화 〉 2­149. 소원권 배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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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9. 소원권 배틀.

다 함께 게임을 즐겨요!

라는 아셰리아 공주의 제안을 수락하고 잠시 후. 내 침실에서 게임을 분류하던 헤르만 녀석이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형. 무슨 놀이 주제가 다들 이렇게 무서울까."

"그러게 말이다..."

아이들 나이에 맞지 않는 게임부터 먼저 쳐내고. 닳을 대로 닳은 연애에 빠진 커플이나 할법한 게임도 쳐내고. 무언가 주제가 위험해 보이는 게임도 쳐내고. 여러 이유로 거르다 보니, 멀쩡한 게임은 별로 남지 않게 되었다.

사실 별로라고 말하기도 참 애매하지. 40개 이상이었던 게임 중 남은 건 오직 세 개뿐이니까.

[ 왕이 되는 자 ]

[ 경제침략으로 세계정복 ]

[ 전란의 세계 ~ 범람하는 위협 ]

하나는 한 때 유튜브에서 뭣 같은 광고로 유명했던 '그 대륙'의 게임과 같은 이름이지만, 주제가 왕의 의무와 왕도 사상이었기에 겨우 생존.

하나는 경제침략이라는 불순한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자극적이긴 하지만, 아이들의 경제 관념 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살아남았다.

마지막으로 저건 평범한 용사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악인기를 배경으로, 마을에 살던 꼬마가 영웅이 되어가는 모범적인 게임이었다.

타이틀, 내용, 수위. 모든 것이 정상인 게임은 어째서인지 하나뿐인 것 같은 느낌이지만, 다른 게임에 비하면 저 둘은 참 양호한 편이다.

내가 주섬주섬 세 게임팩을 챙기고 있자,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헤르만이 절규했다.

"쓸데없이 연애랑 관련된 게임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그리고. 도대체 왜 동성애 주제가 여기 있는 건데. 동성 간의 결혼은 불법이라고...!"

"헤르만. 입에 올리지도 마라. 그건 저주야."

"이건 요나 녀석에게도 꼭 말해야 해..."

... 참고로. 보자마자 내 손안에서 불타버렸지만. 여기서도 영 그렇고 그런 취향은 존재했다.

아무리 내가 취향 정도는 존중한다고 해도, 7세 이용가는 진짜 선 넘었지. 순간 열이 차올라서 에퀼리아에 있는 제조사를 찾아가 테러를 감행할 뻔했다.

"일단 내려가자. 이거 세 개는 할만해 보이니까."

"... 이런 게 재밌긴 한 거야?"

"취향이 갈리긴 해도 같이하면 재밌을 거야."

"음... 일단 처음에는 구경만 할게."

"그래도 되고. 너 편할 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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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과 함께 1층 거실에 나서자, 알렉산더가 내가 들고 내려온 게임에 눈을 밝히고 있었다.

"이게 왕도민들 사이에 유행한다는 거군요."

"네. 오라버니. 세라는 축제 기간마다 이런 게임들을 한다고 하더군요."

"세라라면. 일전에 내 고민을 들어준 그 시녀인가."

"네."

아무래도 백성들의 관심사가 궁금해서 게임에 흥미를 느꼈나 보다. 역시 낙담에 빠져서도 백성 걱정에 잠 못 이루던 왕자님답다고나 할까. 참 성실한 녀석이다.

그의 옆에서 유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렉에게 고민이 있었다고?"

"아..."

"……."

"무슨 고민이었길래 시녀에게 상담까지 한 거야?"

그녀의 물음에 알렉산더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으며. 아셰리아 공주는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거기다 이 두 사람도 모자라서, 아샤마저 홱 하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건 누가 봐도 수상하지...'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하고. 역시나 수상함을 감지한 유나는 추가타를 넣었다.

"왜 두 사람 다 말이 없어진 거야. 나한테는 말 못 할 고민이라도 돼?"

"아뇨. 언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 그게! 반년 전 일인데! 그 당시 거리에서 유명한 다과점을 물어보느라...!"

"맞습니다. 오라버니는 유나 언니와 함께 갈만한 데이트 스팟을 물색하려고 하셨어요."

"리아! 거기까지 말해버리면..."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바엔 유나 언니께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흐음..."

오...

알렉산더 녀석. 거짓말이 늘었다. 게임에서는 17살이 될 때까지 거짓말도 하나 못하는 꽉 막힌 왕자였는데. 지금은 평화를 위한 거짓말을 애써 생각하는 모습이 참 대견스럽다.

거기다 아셰리아 공주는 그런 알렉산더를 위해 탈출구를 제공한다니. 게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남매 사이가 저 정도로 좋아졌다는 것에 코끝이 찡해질 정도다.

'거짓말에 뿌듯해하는 선생이라니. 이거. 나 완전히 교사 실격이지 않을까.'

'아. 거기다 지금 속는 애가 내 의붓딸이네...'

반강제로 떠맡게 된 10살 차이 의붓딸이라 해도, 딸이 속고 있는데 사기 피의자에게 뿌듯함을 느낀다니. 교사 실격에 아빠 실격이다.

그리고. 알렉산더와 아셰리아 공주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고 있던 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그럼 봐줄게. 다음은 없다."

"... 네. 유나 언니."

"가... 감사합니다."

…….

유나가 내뱉은 말에서는 '이번엔 내가 한번 속아준다.'라는, 그런 냉랭한 기운이 잔뜩 느껴졌다.

... 내가 굳이 딸을 걱정할 필요가 있는 걸까. 아주 어른스럽게 자라준 아이 같은데. 내 마음속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사그라들었다.

그 모습을 관조하던 기디언이 내게 물었다.

"선생님. 그런데 수가 많이 적어진 것 같군요."

"아. 연령대에 안 맞는 게임이 섞여 있어서요."

"... 연령대라니요?"

"여기 다섯 분은 17세의 생일을 맞이하지 않았잖아요. 성인용 게임도 몇 가지 섞여 있던 터라, 헤르만과 함께 전부 골라냈답니다."

"아... 그렇군요."

나는 보드게임 상자 세 개를 내려놓으며 학생들에게 말했다.

"자. 일단 오늘은 이 셋 중 하나로 가봅시다."

"경제침략이라. 제목이 조금 무섭긴 하군요."

"뭐. 조금 불편한 내용이 섞여 있긴 해도, 의도는 좋은 게임이라 판단했습니다."

"의부님. 저기. 전란의 세계는 무엇인가요?"

"자그마한 마을에서 시작하여 악인기를 헤쳐 나가는, 그런 용사의 이야기더군요."

"흐음..."

보드게임을 보고 고민하던 아이들은 한 곳을 가리켰다. 그 타이틀은 바로 '왕이 되는 자'. 무언가 대륙의 냄새가 나는 그 게임이었다.

"이게 제일 무난할 것 같습니다."

"음. 일단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하고."

"저건 침략이라는 단어가 영 거슬리네요."

"배경이 악인기면 즐기기 힘들 것 같아요."

학생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늘어놓았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들이었다.

"그럼 이 게임으로 합시다. 먼저 제가 설명서부터 확인해볼게요."

아무래도 학생들은 보드게임을 처음 해보는 걸 테니까. 내가 직접 게임에 참가하기보다는, 사회자가 되어서 다른 아이들을 이끄는 게 좋을 것 같다.

게임의 룰북을 꺼내어 확인해보니, 게임의 종류는 TRPG. 이미 정해져 있는 세계관에 몰입하여 역할극을 하는 듯이 진행되는 게임으로, 스토리는 각자 다른 출생의 캐릭터들이 왕좌에 오르기 위해 경쟁하는 느낌이다.

나는 게임판을 세팅하며 줄거리를 설명했고. 주사위를 아이들에게 건넨 뒤 말했다.

"자. 이제 여러분의 출생을 결정할 때입니다. 모두 주사위를 한 번씩 던져주세요. 주사위의 눈금에 따라 당신의 지위가 달라집니다."

"주사위 눈에 따라 출생이 결정된다니. 현실처럼 태생을 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네요."

"하하하. 아셰리아 공주님. 게임이니까 그 정도로 깊게 생각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 네. 알겠습니다."

아셰리아 공주는 첫 야외 수업이었던 분수에서도 저런 말을 했었지. 노력보다 집안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 맥락의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울면서 왕궁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는 말까지 하던 아이였는데...'

아직도 눈만 감으면 그녀의 우는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그랬던 아이가 지금은 오빠와 잘 어울리고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자. 주사위 두 개를 굴려봅시다. 알렉산더부터."

"저는 9입니다."

"저는 4예요. 의부님."

"7이네요."

"저는 2..."

"5."

안타깝게도. 공주는 1만 두 개가 나와버렸다.

하지만 게임의 세계는 냉정한 법. 나는 그들에게 각자의 말을 분배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는 왕자. 기디언은 공작가의 도련님. 아샤는 백작가의 도련님. 유나는 상인의 아이. 아셰리아는 개척촌 농민의 아이네요."

"저희 셋은 변한 게 없는 것 같네요."

"상인이라..."

"……."

다른 이들은 말을 받고도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했으나. 마른 체구에 허름한 옷을 걸친 농민의 아이가 된 아셰리아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혹시나 자기 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그래도 운이 좋으면 게임에서 이길 수 있으니, 너무 낙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셰리아 공주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저기. 시하 선생님."

"네. 공주님. 왜 그러시나요."

"왕이 꼭 되어야 하나요?"

"네?"

"왕이 된다고 꼭 좋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아. 허를 찌르는 질문이네요."

우리 공주님은 내가 짐작한 그런 시시한 이유로 고민한 게 아니라, 이 게임에서 왕이 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게임에서는 반쯤 억지로 왕위에 오른 거고. 지금도 딱히 왕위에 관심은 없는 편이지...'

알렉산더는 '아바마마를 이어 훌륭한 왕이 되어야 한다.', '왕족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반면, 아셰리아 공주는 그런 것에 무관심한 편이다.

어찌 보면 지금의 아셰리아 공주는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바라는, 그런 소박한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아이인 셈이다.

하지만. 게임이란 자고로 목표 의식. 그러니까 승리에 대해 간절함이 있어야 재밌어지는 법. 나는 한 가지 조건을 걸기로 했다.

"이 게임에서 왕이 된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건 어떨까요."

"혜택이라니요?"

"여러분은 원하는 것 대부분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고위 귀족이다 보니, 금전이나 선물은 딱히 동기 부여가 되지 않겠지요."

"흐음..."

"그럼 어떤 혜택인가요?"

어린 시절, 어버이날이 되면 '효도 쿠폰'이라는 이름으로 안마권 같은 것을 발행하기도 했었다. 거의 반쯤 학교에서 시킨 거긴 해도, 그걸 받은 어머니께서는 기뻐하셨었지.

나는 그 추억을 떠올리며 고했다.

"우승자는 제가 들어줄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어떤 부탁이든 한 가지 이뤄드리죠."

하지만 청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아. 혹시 내가 너무 어린애 같은 감상으로 말해버린 걸까. 내 발언을 후회하게 되었을 즈음...

헤르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형... 그럼 나는 휴가 써도 돼?"

"우승만 하면 가능."

"그럼 나 당장 할래."

"안 돼. 이번 판은 역할 배정 끝났어."

"그럼 다음이 있다는 거군. 바로 한다."

왜 네가 불타오르는 건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다른 학생들도 저마다의 반응을 보였다.

"흐음. 스승님꼐서 부탁을 이뤄주신다고 하면. 일단 우승하는 게 나을지도..."

"이건 충분히 가치가 있겠군요."

"왕자님을 막아달라는 소원을 빌 수 있다니. 이건 엄청나게 큰 기회야."

"나도 휴가..."

일단 따고 보자는 느낌의 알렉산더와 유나. 무언가 소박하고 짠한 소원을 생각하는 기디언과 아샤. 네 사람은 각자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아셰리아 공주는...

"선생님."

"네."

"빨리 시작하죠."

"……."

자기 말을 콩­ 하고 내려놓으며 나를 채근했다.

조금 전까지는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파티에 임하고 있었다면, 지금 그녀는 왠지 모를 박력마저 느껴질 정도다.

분명히 '들어줄 수 있는'이라는 조건을 명시하기도 했는데, 이게 이 정도로 달아오를 일인가...

내가 멍하니 서있기만 하자, 아셰리아 공주는 다시금 말을 톡톡 내려놓으며 나를 독촉했다.

"빨리요."

"... 네. 시작합시다."

그렇게.

왕실 가정교사 배 소원권 배틀이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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