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2152. Deli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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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2. Delilah.
발람 프라시스는 일리아드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며 매도당하고 있으나...
그로서는 약간 억울한 면이 있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책임이 없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저,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철저하게 뒤틀렸다는 사실에 화가 나버린다.
"모두 필요한 일이었다."
"... 뭐?"
"우리의 목적을 이뤄내기 위해선 전부 필요했던 일이란 말이다."
"하. 어린 것들이나 건드리는 게 필요했던 일이라고? 웃기는 소릴..."
발람 프라시스는 여러모로 작은 사람이다.
모든 것을 베어 넘기는 프라시스. 그런 가문에서 태어나 극한의 노력을 해왔지만, 글로리아라는 인간보다는 작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C급 재앙에 홀로 맞서고, B급 재앙을 토벌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나. 세간에서 그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누이에 비해 떨어지는 인간이었을 뿐. 프라시스의 결함품이라는 꼬리표는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를 뒤엎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지. 언제나 나를 아래로 여기며 업신여기던 놈들을 전부 죽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단 말이다."
"... 그러셔?"
"그래. 분명 내 계획은 완벽했다. 나 자신에게 낙인을 찍기 위해서는 그만한 일이 없었으니까. 덕분에 각지의 멍청이들을 한데 끌어모으고, 국정을 마비시킬 수 있었으며, 왕자는 조카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고, 공주는 궁에서 철저히 고립시켰지 않나."
"……."
"누이까지 쳐내고 당주 자리에 올랐으니, 이제 남은 건 행동뿐이었어. 한데..."
하지만 발람은 작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그는 눈앞의 사실을 부정하는 멍청이는 아니었으니까.
누이는 분명 뛰어난 이였으며, 대중이 그녀의 빛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발람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힘을 기르기로 했다.
가슴 속에 품은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참고, 인내하며, 버텨낸다. 그와 동시에 약자의 방식으로 강자들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이것이 그가 정한 길이었으니. 어찌 보면, 발람은 큰 사람이라 보는 게 올바를 것이다.
장식장을 쥔 발람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표류자 놈만 아니었다면..."
"그래. 결과적으로 그 표류자 덕분에 네 완벽한 계획은 망했지. 꼬맹이 몇 명을 뒤흔들어놓고 완벽하다 믿는 그 계획 말이야."
"……."
"특히 그 멍청한 결투가 치명적이었지."
결투.
그 한마디에 일리아드가 앉아 있는 소파 쪽을 돌아보았으나, 차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결투에서 졌는데. 뭐? 맹약의 조건이 둘? 덕분에 조카에게는 손도 못 쓰게 되었고, 얌전히 토벌이나 돕게 됐잖아? 네 누이가 왜 왕도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벌써 그때로부터 반년이 흐른 지금이지만, 그 결투를 생각할 때마다 상처를 쑤시는 느낌이다. 마법이 없는 세계에서 온 표류자가 자신을 이기다니. 아무리 그를 가지고 놀 생각에 방심했다 해도,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패배 후 자신에게 걸린 맹약도 문제였다. 재앙 토벌을 끊임없이 참가하는 것도 모자라, 기디언에게 걸어둔 모든 구속을 풀어내라니. 두 가지 조건은 자신의 계획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는 뼈저린 손실이었다.
그렇게 씁쓸한 심정으로 패전을 떠올리던 중...
'그나저나. 누이라.'
발림은 뒤늦게 그의 누이, 글로리아를 떠올렸다.
"누이 걱정은 마라."
"그 완벽한 계획도 실패하신 주제에. 우리 꼬맹이는 뭘 믿고 그런 말씀을 하실까?"
"비록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소홀하긴 했지만. 아들의 목숨을 판돈으로 쓸 사람은 아니니까."
"흐음..."
"지금은 일단 우리의 전력부터 파악해야지."
발람은 평소의 그 업신여기는 말투가 아닌, 사뭇 진지해진 어조로 고했다. 그의 의외의 모습에, 일리아드가 생각에 잠길 정도.
'가끔은 진중한 면도 있단 말이지...'
사대 가문. 에우데미아라는 체제에 불만을 품은 무능력한 고위 귀족.
사실 일리아드는 발람의 두 가지 소문만 알고 접근한 것이었다. 매료 마법을 사용하여 적당히 부려 먹다 죽인다. 이것이 일리아드가 떠올리고 있던 원래의 계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문 속의 발람 프라시스는 단순히 타락한 귀공자에 불과했으니까. 은연중에 '어린아이'를 아끼는 일리아드로서는 단연 최악의 상대였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발람의 계략은 썩 훌륭했다. 지금은 그를 타박하고 있긴 해도, 교단이 이 나라를 빠르게 잠식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발람의 공이었다.
그렇게 발람의 평가가 조금은 올라갔을 무렵...
"어이. 창녀."
"……."
"표정이 왜 그러나.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나?"
그의 다음 말에 다시금 평가는 바닥을 쳤고. 일리아드는 티 날 정도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왜."
"내게 새겨진 맹약. 지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죽음을 대가로 한 맹약 마법진. 원래라면 이 마법을 해주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한 쌍이 되는 해주용 마법진을 사용하거나.
마법진을 만든 가문에서 직접 해주하는 것.
전자의 방법은 해주용 마법진이 왕실의 엄중한 경계 속에서 관리되고 있기에 불가능한 일이다.
후자 역시 마찬가지. 마법진을 제작하는 그 가문의 충성심은 아직 건재하기에, 사용할 수 없다.
"분명 그랬지."
"지금 가능한가."
"... 지금 당장?"
"그래."
하지만.
일리아드는 그 가문의 비술을 재현해낼 수 있다.
그녀의 '매료'는 단순히 상대를 홀리는 선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일리아드는 관계를 맺은 이의 심상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으며, 얕은 수준에서 흉내 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성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애썼으니까. 자신을 좋아하게 만든 시점에서, 상대방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일리아드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한다.'
비록 이 명제의 의미는 뒤틀린 지 오래이나, 아직도 일리아드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중이다.
"후우..."
일리아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분명 이것도 말했을 텐데. 굳이 보채지 않아도 연습을 충분히 한 뒤에 해줄 생각이라고."
"그래. 하지만 시간이 없다."
"네 육신에 새겨진 마법진을 해주하는 거야. 나도 아직 익숙하게 쓸 수 없는 마법이라 위험해."
맥락에 결부하는 창조 마법.
마음속에 또렷하게 각인된 심상을, 마법진이라는 틀이자 맥락에 자아내는 마법이다.
하지만 일리아드는 베낀 마법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사용법에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 자칫 잘못했다간 발람을 죽이게 될 것이다.
아직 이용 가치가 있는 발람이 죽지 않으면 하는 것이 일리아드의 자그마한 바람이다.
하지만 발람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사도 딜라일라. 우리에게 시간이 없음은 네가 더 잘 알텐데."
"시간이 없으니 더욱 신중해져야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우린 끝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충분한 마력을 모으려면 넉 달은 기다려야 해."
"알고 있다. 하지만 내 꼬리는 이미 잡혔으니, 최소한 토벌 강제의 맹약은 미리 해주해야 한다."
"뭐...?"
"나를 숙청하기 위한 최고의 수는 토벌을 명목으로 나를 왕도 밖으로 끌어낸 뒤, 재앙과 싸워 지쳤을 때 죽이는 것이다. 차남회는 애초에 강한 놈이 없으니, 나 하나만 죽여도 끝이니까."
"……."
"지금은 아마 내 세력의 규모를 확실히 특정하려고 시간을 두는 것이겠지. 시간을 많이 끌어 봐야 건국제까지가 한계다."
'에우데미아 왕국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스러운 나라, 모든 왕국민을 위한 나라를 지향한다.'
얼핏 듣기엔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에우데미아는 쓸데없는 관대함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일리아드의 생각 속에서는, '왕실이 그 정도까지 하겠어...'라는 생각이 먼저 일었다.
"여기가 에퀼리아나 헬렌 교국이라면 몰라도. 에우데미아의 샌님들이 그럴리가..."
"확실히 그 순해 빠진 필레몬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그 표류자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
"이시하 임시 공작. 그 인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어쩌면 에퀼리아의 수전노들보다도 더, 수인국의 짐승들보다도 더, 교국의 광신도들보다도 더 잔인하고 악랄해질 수 있는 놈이다."
굴욕스러웠던 그날의 결투에서. 언제나 타인들을 관찰해온 발람은 알 수 있었다.
이시하가 빙검을 들었던 순간 보였던 눈빛은, 무언가가 결여된 인간의 것이라고.
... 그래.
마치 '벨 것'을 결심한 누이와 같았다.
그에게서 누이를 겹쳐본 탓에, 그는 추한 꼴이 되어 항복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리아드는 발람의 이야기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 그런 놈에게 겁을 먹다니. 꼬맹이답네."
"네년이 그 표류자를 직접 대면해봐야 한다."
"이미 한번 봤거든. 그저 수많은 남자 중 하나일 뿐이야. 조금 더 참을성이 많을 뿐이겠지."
"……."
역설적이게도, 일리아드는 인간을 온전히 사랑하면서도 남자만큼은 온전히 믿을 수 없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엔,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상처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다.
설령 매혹이 통하지 않은 남자라고 해도,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넘어가는 나무일 뿐이다.
"하지만 꼬맹아. 네가 그렇게나 걱정이라면 맹약 해주 정도는 내가 해줘야겠지. 죽어도 내게 불평은 하지 말라고. 나는 충분히 경고했어."
"애초에 죽으면 불평조차 못 한다. 걱정하지 마라."
이내 일리아드는 자신이 앉아 있는 소파의 옆을 톡톡 손바닥으로 두드렸고, 발람 프라시스는 결연한 표정이 되어 그곳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자리에 앉자.
사도 딜라일라는 장난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내가 힘 좀 더 쓰지. 뭐."
"무슨 뜻이냐."
"그 표류자는 내가 직접 상대해줄게."
"……."
축제의 한 가운데에서.
발람은 목숨을 마녀에게 걸었고, 끝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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