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89화 (189/215)

〈 189화 〉 2­153. Delilah.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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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3. Delilah. (2)

한 차례 '시술'을 마친 일리아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다..."

마법 사용의 부작용 때문인지 어느새 발람은 누운 채로 정신을 잃은 상태. 그래도 일리아드는 나름대로의 뿌듯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발람의 마력과 하나가 되어버린 맹약을 지워내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으니까.

시온 자작령이 함락당한 뒤, 일리아드는 부정 마력을 끌어모으기 위한 공장을 새롭게 세워야만 했다. 덕분에 마법진을 조작하는 이 심상 마법을 조금이나마 연습할 수는 있었지만... 발람에게 걸린 맹약 마법을 해주할 수 있을거란 확신은 없었다.

"정말 대책 없는 꼬맹이네."

만약 일리아드가 실수로 맹약의 발동부를 건들이기라도 했다면 발람은 죽은 목숨이었겠지.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해주를 강요하다니, 일리아드로서는 발람에게 기가 차는 상황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목숨을 거는 남자라..."

분명 이는 낭만적인 표현임에 틀림 없다.

그 사람은 목숨 보다 소중한 꿈을 품고 있는 셈이니까. 그런 담대한 꿈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헬렌 교국의 성녀로서 지내던 시절의 기억 대부분을 잃었지만, 지금의 일리아드 역시 자신만의 꿈을 품고 있다 보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정도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는 발람에게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그 놈에게 자신만의 꿈이 있었나? 정해진 역사를 이끌 수 있도록 주입된 기억 뿐이거늘."

일리아드가 한 마디를 읊조린 순간, 응접실의 창문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연미복에 중절모로도 모자라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그는 어둠 속에 빠져있는 듯 하다.

하지만 눈을 가리는 하얀색 가면은 복장과 대비를 이루며, 이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낼 정도로 돋보이고 있다. 또한 그의 주변에 응접실 커튼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으니, 방금 막 창문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일리아드는 곁눈질로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이내 가시 돋힌 어조로 그의 이름을 말했다.

"휴브리스..."

"가면을 쓰고 있어도 잘 알아보는군, 딜라일라. 그나저나 왜 그런 무서운 눈으로 날 보는거지? 못 볼 사람이라도 본 듯 한데..."

"못 볼 사람이긴 하잖아. 너는 지금쯤 에퀼리아의 세계수림에 있어야만 하니까. 지금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거야."

휴브리스.

그 역시 해방 교단의 사도인지라, 큰 틀에서 보자면 일리아드의 동료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리아드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더러, 사도 간에 싸움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보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 일리아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브리스는 그저 팔짱을 낀 채, 일리아드와 발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뭐. 네 말이 맞긴 하지. 사실 지금 이 몸은 내 분신체일 뿐이야."

"... 역시나 본체가 아니었군. 평소의 그 재수 없는 느낌이 덜해서 이상하다 싶더라니."

"재수 없다니. 무슨 농담을! 하하하하!"

"……."

농담이 아닌 진담이었는데.

일리아드는 속으로 생각한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저 인간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상대방의 신경을 긁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한참을 웃고 있던 휴브리스가 조용해지자, 일리아드는 그때서야 본론을 꺼내었다.

"그래서. 여긴 도대체 왜 온 건데?"

"그야 당연히 '정해진 역사' 때문이지. 내가 준비해야 할 역사는 아직 시간이 널널한 반면, 너는 당장 역사의 특이점을 마주해야만 하잖아?"

"……."

"딜라일라. 준비는 잘 되어가나?"

"준비야 잘 되고 있지. 하지만 일정이 꼬여서 두 달 정도 지체될거야."

"흐음?"

일정이 꼬였다.

그 말에 휴브리스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들었다는 듯이 일리아드를 쳐다보았다.

"정해진 역사대로라면 9월에 거사를 치뤄야할텐데."

"그래. 나도 교주께 그리 보고했었지. 하지만 사고가 많이 생겨서 말이야."

"사고? 무슨 사고를 말하는거냐."

"왕국의 표류자 한 명이 계속 발목을 붙잡더군."

"표류자. 표류자라..."

신중한 고민에 빠진 휴브리스.

그의 낯빛에서는 약간 당황한 듯한 기색이 감도는데, 조금 전만 해도 경박한 웃음을 내보이던 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네 '정해진 역사'에는 표류자 따위 없는가보네?"

"... 그래. 내가 아는 역사 속에는, 왕국에 표류자 따위 존재하지 않았어. '이방인'이라는 존재가 있긴 했지만, 그 사람은 3년 뒤에나 올텐데."

"애초에 델피니아도 표류자잖아. 왕국에 표류자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아니. 중요한 건 '정해진 역사' 속에 없었다는 거야. 내가 아는 역사는 네가 필레몬 국왕을 죽인다, 왕도는 불탄다. 이 두 가지 뿐..."

"하아..."

말이 전혀 안 통하는 미친놈.

일리아드는 마음 속으로 휴브리스를 욕했다.

일리아드가 이 세상에 다시금 수육했을 때, 그녀의 눈 앞에 있던 이는 두 사람이었다.

해방 교단의 교주. 그리고 휴브리스.

'그때는 그나마 멀쩡했던 놈이었는데... 어쩌다 이런 병신이 되어버린 건지..."

분명 그때 당시에는 괜찮은 인간이었다. 교주를 충직하게 보필하는 집사이자 비서, 일리아드의 시선에서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정해진 역사'라는 단어만을 부르짖으며, 눈 앞의 일을 전혀 보지 않는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마치 헬렌 교국에 차고 넘치는... 능력도 없으면서 경전을 외울 뿐인 사제들을 보는 것만 같다.

헬렌 교국을 망치기 바쁜 벌레들. 성녀회를 이용해 음습한 욕구를 뿜기 바쁜 쓰레기들. 위에서 군림하며 인간을 제멋대로 휘두르기 바쁜 위선자들...

'하아... 짜증나네.'

교국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자, 일리아드의 마음 속에는 귀찮음과 짜증이 함께 솟아올랐다.

"그 정해진 역사라는 거. 모든 인간들의 이름이 남아있기라도 한거야?"

"... 그건 아니지.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되는 법. 하찮은 패자들의 이름은 남아있지 않아."

"그렇다면 별 일 아니겠지."

"뭐?"

"어차피 내가 이긴다는 뜻이잖아."

"……."

"계획을 약간 지연시켰다고는 해도. 하찮은 패자가 될 예정이니 '정해진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거겠지. 네 역사는 정확하다며?"

일리아드의 단호한 발언에, 휴브리스는 그 자리에서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사실 일리아드는 이시하라는 표류자를 꽤나 높게 평가하고 있다.

자신의 매혹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B급 재앙 힐데스비니를 토벌한데다, 단숨에 발람을 비롯한 자기 세력을 옥죄어오고 있지 않나.

어쩌면 자신이 질 지도 모르는 상황. 그러니 일리아드는 섣불리 시하에게 접근할 생각이 없다. 되도록 신중하게, 이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인간을 발 밑에 두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일리아드가 생각하는 시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눈앞의 인간을 쫓아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일리아드의 의도대로.

휴브리스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섰다.

"하하하! 일리아드. 네말대로야. 역시 너와는 말이 통한다니까! 이건 전부 우리가 '에우데미아 편'의 파트너인 덕분이지 않을까!"

"... 이제 알았으면 꺼져."

"섭섭하게 왜 그러시나. 조금 더 이야기를..."

"닥쳐."

그 순간.

일리아드는 허공에 손을 휘익 ­ 내저었고. 검은 마력이 직선이 되어 휴브리스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푹 ­ 소리와 함께 휴브리스의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허어. 오늘은 기분이 안좋나 보네."

"꺼지라고."

일리아드의 차가운 목소리에 두 눈을 껌뻑이는 휴브리스. 이내 그는 두 손가락으로 경례를 하듯이, 소위 똥폼 잡는 모습으로 윙크를 날렸다.

"... 뭐. 너란 여자가 신경질적인 것도 역사의 일부겠지. 그럼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휴브리스의 분신체는 붕괴해버렸으며, 그 잔해는 빛나는 마력이 되어 공기중으로 사라져간다.

일리아드는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고, 그 마력 먼지가 전부 빠져나갈 즈음 탁 ­ 문을 잠그고 치익­ 커튼까지 쳐버렸다.

"저게 진짜 멋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일까..."

너란 여자가 신경질적인 것도 역사의 일부라니. 다른 사람의 앞에서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걸 상상만 해도 토가 나올법한 표현이었다.

"후우..."

절로 나오는 한숨. 지끈지끈한 두통. 마음 속에 답답함이 가득하지만, 일리아드에게는 생각을 멈출 시간조차 없었다.

'이시하 임시 공작에게 매혹은 통하지 않아. 그렇다고 자빠트린 다음 매혹을 걸기엔... 주변에 티오리아 가문의 그 주변에 티오리아 가문의 후계자가 있다 보니 접근조차 힘들지.'

'지금 이 저택을 감시하는 놈들은 매혹으로 어찌저찌 무마시킬 수 있었지만. 고위 귀족의 피가 짙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지...'

창가에서 고민을 이어나가던 일리아드는 응접실을 돌아보았다. 소파에는 기절하듯 잠들어버린 발람이 있었다.

'아무리 멍청이라 해도. 한번 데였으면 실수하진 않겠지. 실제로 그 표류자가 이 왕국에 오기 전까지는 잘해주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지금의 필레몬 국왕은 '빛'을 제대로 뿜어낼 수 없는 상태니까. 상급 재앙만으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충분한 부정 마력을 모으려면 앞으로 네 달. 아마도 나를 비롯한 교단까지 엮기 위해서 때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소파를 향해 걸어나간 일리아드는 담요 한 장을 펼쳐 발람에게 덮어준 뒤, 응접실 문을 나서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 그렇다면 남은 건 정면 승부 뿐."

일리아드의 특기 마법은 '매혹'이지만. 그녀가 성녀로서 살아온 세월 동안 전투를 경험해보지 못한 건 아니다. 아니. 사실 전투야말로 그녀의 특기라고 볼 수 있다.

발람의 패배는 방심에서 비롯된 것. 그렇다면 방심하지 않고 그를 쓰러트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일리아드에게는 한 가지 욕심도 있다.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 그래도 죽이진 말자. 자빠뜨리기만 하면 매혹에 걸릴 수 밖에 없어"

'정해진 역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에우데미아 왕국이든. 북방의 에퀼리아든. 동방의 혜세국이든. 서방의 수인국이든. 성스러운 헬렌 교국이든. 그 어떤 곳에서도 적용되는 법칙 정도는 알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타락해버린 그녀가 믿는, 수단으로서의 사랑이다.

"남자란 다 그랬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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