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 2154. 아무것도 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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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4. 아무것도 하지 않기.
해방제 기간이 찾아오기 전까지. 프라시스의 가주, 발람에게 적용되어 있었던 맹약은 차남회의 '족쇄'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차남회의 구성원은 지방의 영세 호족이나 중앙의 하위직 관리들의 비중이 높았다. 비록 낮은 지위에 있는 이들을 끌어모았을 뿐이나. 발람은 이들을 바탕으로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고, 자신의 발언력을 틈틈이 높여왔다.
하지만 맹약에 따라, 발람이 재앙 토벌에 항상 참여하도록 상황이 바뀌었고. 왕도 밖으로 나갈 일이 많아진 발람은 차남회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차남회의 구성원 대부분은 발람 프라시스라는 뒷배를 얻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차남회 세력이 휘청거리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이로 인해 발람의 간접적인 국정 개입 능력 역시 감소하였고, 그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져버린 상황.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이따금씩 지방 영주들의 땅을 찾아가기도 한 발람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손실을 메꾸기 어려웠다.
이렇게. 맹약이라는 족쇄는 발람의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낮추도록 기능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일리아드의 손에 풀려버린 상황.
이제부터라도 발람은 대책을 마련해야 했으니, 그가 선택한 대책은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였다.
발람은 맹약이 해주된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재앙 토벌만을 꾸준히 수행하며, 귀족들을 향한 국왕파의 끝없는 견제에도 입을 다물었다.
발람이 차남회에게 전한 것이라고는 때를 기다리라는 한 마디 말 뿐. 이런 발람의 태도에, 차남회의 내부에는 균열이 생길 정도였다.
누군가는 발람의 말에 따라, 지금은 왕실에게 고개를 낮추고 몸을 사려야 할 때라 하였고.
누군가는 이시하의 견제에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다며, 지금이라도 발언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다른 누군가는 결투 이후로 발람이 달라졌다고 하며, 차남회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런 내부의 잡음에도 불구하고 발람의 반응은 전무. 결국 해방제가 끝난 이후로, 차남회의 참가자들은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
누군가는 조용히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으며,
누군가는 이시하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했고,
누군가는 정치적인 중립을 선언해버린 상황.
그야말로 콩가루가 되어버린 차남회였으나, 오히려 이 상황은 누군가에게 큰 고민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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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제로부터 3달이 지난 가을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중앙 정원을 걷고 있을 무렵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나를 정문까지 배웅해주겠다고 나선 아셰리아 공주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시하 선생님."
"네. 공주님."
"이번 수업에서 다루신 하이엘프 왕조의 후계자 쟁탈전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있습니다."
"... 어떤 부분이 궁금하신가요?"
아셰리아 공주의 질문이라니...
사실 아셰리아 공주는 내가 가르치기 과분한 아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원리 하나만 가르쳐도 그 너머의 전체를 깨달아버리는 아이다. 사고 자체가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면이 강하다 보니, 정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는 금방 풀어낸다.
그나마 그녀에게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아직 감정에 대한 생각이 깊지 않다는 것 정도. 타인의 감정을 유추할 수는 있지만, 그 이유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런 이유로, 공주에게 수업이란 단순히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의견을 차근차근 듣고 이해하는 훈련에 가깝다.
여하튼 그런 아이가 내게 질문을 해오니, 나는 조금이나마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세계수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네?"
"고대의 하이엘프 왕조는 세계수를 다룰 정령왕을 뽑기 위해 살육전을 벌였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런 희생을 치룰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었는가. 그게 궁금해서요."
"흐음..."
에코니아가 여러모로 정신 나간 세계인만큼, 이곳의 엘프들 역시 정신이 나가 있는 종족이다.
아니... 정확히는 정신 나간 종족이'었'지. 지금은 그나마 상식적인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니까.
먼 옛날.
엘프의 왕족이라 일컬을 수 있는 하이엘프는 총 세 가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각자 딸을 한 명씩 뽑아 당대의 정령왕과 결혼시켰다.
그리고 정령왕과 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자제들은 훗날 장성하여 혈투를 벌이는데, 오직 한 사람만이 차기 정령왕 자리에 오른다.
어디 무협지의 마교에서나 나올법한 강자존 사회. 그것이야말로 고대 엘프들의 왕국이었다.
'뭐. 지금은 돈에 눈이 먼 귀쟁이들이지만...'
일반적인 판타지에서의 엘프라고 한다면 자연, 평화, 채식 따위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곳 에코니아에서 현대 엘프는 총, 술, 전쟁, 육식의 화신들이다.
... 옛날 엘프들에 비한다면 약과긴 하지. 그래도 정신 나간 사람들임은 틀림 없다.
공주의 질문에 잠시 고민한 나는 답했다.
"세계수의 능력은 하이엘프 사이에서만 구전되는 기밀이니까요. 저도 그건 잘 모르죠."
"... 그런가요."
"하지만 그런 살육을 벌일 가치가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는 어떻게든 답할 수 있겠네요."
약간 아쉬운 기색을 보이던 공주는, 이내 초롱초롱한 눈빛을 회복했다.
"언젠가 수업 때 말씀드렸잖아요.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요."
"네. 저희는 역사를 통해 삶이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도 하셨죠."
"오. 기억하고 계셨네요."
"선생님의 말씀은 기억해야죠."
"하하하..."
내 말을 전부 기억해준다는 사실이 고맙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 따위가 가르치는 지식을 전부 흡수한다는 뜻이니까. 이 아이는 평범하게 자라서 평범하게 행복했으면 하는데, 내 안 좋은 면까지 흡수해버리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
그래도 당장은 지금에 충실해야겠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늦추던 나는 말을 이었다.
"일단 넘어가서. 지금은 역사를 볼 때의 유의점을 생각해봅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과거의 결과일 뿐이에요. 그리고, 상황에 따라 가치의 무게는 다르답니다. 개인의 목숨, 종족의 보전, 국가의 흥망, 심지어는 세계의 존립까지.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가치는 미뤄지기 마련이에요."
"... 네."
"하지만 지금의 엘프들은 그런 살육전을 더이상 벌이지 않고 있죠. 이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아셰리아 공주는 하늘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잠시 후 나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럴 가치가 없어서 관둔거겠죠."
"네. 과거에는 살육전에서 잃게 되는 생명보다 세계수의 가치가 높았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엘프들은 결국 그 나무를 버리고 숲을 나왔잖아요? 지금의 가치와는 동떨어진 존재일거에요."
사실 지금의 내 설명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질문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을 가져와 둘러댄 것에 불과하니까. 어찌 보면 아이를 속이는 치사한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내 말을 곱씹던 아셰리아 공주는, 이내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굳이 역사에 매몰될 필요는 없는 거네요."
"네. 결국 우리는 지금을 살아가니까요."
"지금을 살아간다라. 좋은 울림입니다."
"하하하..."
대화가 끝날 즈음이 되자.
나와 아셰리아 공주, 그리고 우리 뒤를 따르던 헤르만과 아샤는 어느새 왕궁 정문이 도착했다.
"... 도착했네요."
"배웅 감사합니다. 공주님."
내가 감사인사를 건넸으나... 아셰리아 공주는 영 아쉬웠던 모양인지, 그 자리에서 입을 삐죽 내밀고 있다.
'처음 봤을 때는 참 단정한 공주님이었는데...'
가끔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노라면 내가 약영향을 주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평범한 아이 느낌이 들어 뿌듯해지기도 한다.
"공주님. 참 시간이 빨리 가죠?"
"그런가요..."
"네. 이제 금방이면 건국제니까요."
이전 세상에서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가서 불만이었는데. 이곳에 온 뒤로는 시간이 쏜살 같이 흘러간다. 해방제가 끝난지 언제라고, 벌써 건국제가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
그리고 올해 건국제에는 작년에 이루지 못한 공주님의 소원이 한 가지 남아 있다.
"올해는 꼭 은방울꽃 장식을 사러 가야죠."
"아..."
"건국제 전까지 힘내서 남은 일정을 마쳐 두고. 느긋하게 다녀 옵시다."
내가 유명해진 탓에 인파가 걱정되긴 하지만... 나도 지난 해의 아셰리아 공주처럼 변장이라도 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조금이나마 아쉬움은 풀어졌는지, 아셰리아 공주가 옅은 미소를 띄우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알겠습니다. 시하 선생님도 힘내세요."
"네. 공주님.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
.
그렇게 왕궁 밖으로 나선 나였지만...
"하아..."
공주의 모습이 저멀리로 사라지자 마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형. 왜 또 한숨이야."
"세 달 동안 뜻대로 된 일이 없어서."
해방제로부터 평화로운 3달이 흘렀지만, 나로서는 매일이 한숨만 나오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해방교단은 나라에서 아예 종적을 감추었고.
발람 프라시스는 재앙토벌에 성실히 임하고.
차남회의 위협적인 인사들은 조용히 지내고.
몇몇은 내게 아첨만 하다 감옥에 쳐박히고...
"세상이... 너무 평화로워..."
"그거 좋은 거 아냐...?"
"아니. 평화롭지 않아야 할 때 평화로우니까. 걱정 돼서 잠도 안 오고 쉬지도 못하겠어..."
"그거 병이다. 병. 평화로운 시간을 즐길 줄도 알아야지. 인간이 너무 바쁘게 살아서는..."
헤르만은 한심하다는 듯이 내게 말을 이었다.
"방금 아셰리아 공주님께 말씀드렸잖아. 현실이 어쩌구... 지금을 저쩌구..."
"어쩌구 저쩌구라니. 말 똑바로 해라."
"일단 나는 잘 모르겠고. 당장에 현실이 평화로운데 뭘 어떻게 하겠어. 걱정 말고 쉬지?"
"후우..."
"또 한숨이다. 또."
현재는 과거의 결과일 뿐.
그렇다면 지금 이 예상치 못한 현재는 어떤 과거의 결과일까.
현재가 이어져 '차남회의 쿠데타'는 없는 일이 되기라도 할까.
…….
'그것만큼은 절대로 아닐건데...'
나는 풀리지 않는 고민을 한가득 안고 마차에 오르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