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94화 (194/215)

〈 194화 〉 2­157. 들어맞는 불행한 짐작들.

* * *

2­157. 들어맞는 불행한 짐작들.

헤르만과 함께 왕궁 집무실에 도착하니, 이미 국왕 내외를 비롯한 중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기사단장 어거스트 라코니아.

재상부의 제드로 프로네시스.

왕궁부의 카일 티오리아.

사법부의 아론 미모스.

마지막으로 원수부의 발람 프라시스까지.

"표류자 애송이. 늦었구나."

최근 토벌을 나간다고 바빠진 탓에, 왕성에서 제대로 얼굴도 못 보던 발람이 내 안부를 물었다.

저걸 듣고 화가 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도 귀족 생활 1년차가 되었으니까. 이런 악성 안부 정도는 가뿐하게 돌려줄 수 있다.

"발람. 오늘은 웬일로 일찍 와계셨네요?"

"흥."

"두 사람 다 그만하게나. 그리고 선생은 어서 자리에 앉게."

"알겠습니다."

발람이 콧방귀에 필레몬 국왕은 우리를 말렸다. 평소 한 자리에 나와 발람을 동석시키지 않는 그였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은걸 보면 상당히 긴급한 상황인가 보다.

내가 자리에 앉자, 왕궁부장 카일 티오리아가 지도 위에 지시봉을 짚으며 말했다.

"다들 모이셨으니 설명드리겠습니다. 현재 부정의 마력이 관측된 장소는 총 세 곳입니다."

"먼저 메네오라 백작령입니다. 이곳에 출몰할 재앙은 C급으로 예상됩니다. 원래라면 영주들을 연합시켜 대항할 만한 재앙이지만. 현재 메네오라 백작령은 작년 말을 기점으로 왕실 직할령이 되었기에 이쪽에서 처리해야 할 듯합니다."

왕도 북동쪽의 메네오라 백작령은 일 전에 조운회가 터를 잡았던 곳이다. 당시 메네오라 영주가 조운회주와 결탁한 정황이 확인되었기에, 작위를 반납당하고 땅은 왕실 소유가 되었다.

괜히 다른 영주들에게 일을 맡겨 봐야 자기네들 이익에 눈이 돌아갈 게 뻔한 일이다. 그러니까 왕궁부장이 의견대로 중앙에서 재앙을 처리하는 게 옳은 방침이겠지.

"다음으로 다미아 평원입니다. 예상 재앙의 등급은 B급 하위. 이곳은 왕도에 공급되는 식량의 3할을 소화할 정도로 식량 생산량이 높은 지역인지라, 피해의 최소화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 지점을 지시봉으로 가리킨 카일은 잠깐 숨을 가다듬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왕과 왕비의 안색을 살피는 것 같기도 한데.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러는걸까.

의아함을 품게 된 나는 왕궁부장 카일이 지시봉으로 가리키는 곳의 지명을 보게 되었고...

'아...'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집무실에는 잠깐 정적이 흘렀고, 상석에 앉은 필레몬 국왕이 카일을 타일렀다.

"카일. 진행해도 되네."

"... 죄송합니다."

"괜찮네. 이미 지난 일이야."

"맞아요. 그리고 그건 우리 모두의 상처예요."

왕비까지 국왕의 말을 거들자, 카일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별이 떨어진 골자기입니다. 재앙의 예상 등급은 B급 상위. 이번에 측정된 부정의 마력 중 가장 강력한 개체가 출몰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 검정 위에 흩뿌려진 먼지처럼 수많은 별들이 보이지만, 지금 여기 있는 이들이 기억하는 별이란 단 하나뿐이다.

아셰리아 공주의 친모. 아이를 지키다 죽은 어머니. 별의 이름을 가진 성녀 후보. 그 에스더가 아셰리아 공주를 지키다 사망한 곳이 바로 별이 떨어진 골짜기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의아함이 드는 작명이라고 해야 하나. 약간의 어색함이 멤돌았다.

내가 혼자서 상념에 잠겨 있을 즈음, 카일이 보고를 마무리했다.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처럼 B급의 판타스매터가 두 개체나 출현하는 경우는 이례적인 일이라, 여러분들을 한 자리에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그것도 B급 상위의 재앙이 함께 출몰하는 것은 지금의 에코니아에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했던 내 기준으로 현상을 해석하자면, 이 세상이 차근차근 악인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게임의 전개가 진행될 수록 세계관의 분위기는 점점 더 암울해졌고, 세계를 뒤덮은 사악한 마력은 점점 더 불어나기 마련이었다.

에코니아의 마력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깊은 이해도를 가지게 된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다.

재앙의 폭주를 막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사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마지막에 찾아낸 루트야말로 그 방법에 가까웠으니까.

그 방법이란 바로, 이방인으로서 잠재적인 갈등 요소가 되는 존재들을 전부 없애버리는 것.

큰 문제를 일으킬만한 사람을 죽이고,

큰 분쟁을 일으킬만한 인간도 죽이고,

참혹한 복수를 꾸며낼 것들도 죽이고,

판타스매터들 역시 당연하게 죽이고...

그 끝에 찾아오는 게 찰나의 평화였다.

'그래 봐야 결국에 그 루트도 망했지만. 지금은 적어도 이해는 되네...'

등장 인물을 다 죽이고 나서야 판타스매터는 종적을 감췄고, 숨어 있던 흑막이 갑자기 나타나 아셰리아 여왕을 죽이는 병신같은 루트였지.

저번 시온 자작령 사태에서, 세계의 부정한 심상이 모여 재앙이 태어나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까. 재앙 출몰이 줄어든 이유는 알 것 같다.

하지만 만약 그 루트에서 흑막을 배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문제점을 잘 생각해보면...

이방인과 아셰리아 여왕을 제외하면 에우데미아에 쓸 만한 사람이 남지 않았다는 것.

그때의 흑막이 이 나라에 쉬이 침투할 만한 요인은 이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 꼴을 안 보기 위해서라면 최대한 '착한 사람들'을 많이 살리고 서로를 잘 조율해야 하는데...

…….

후우...

일단 눈앞의 일에나 집중해야지.

내가 방금 느낀 '어색함'에 따르면, 이 상황을 무사히 넘겨야만 모두의 미래를 지켜낼 수 있다.

긴장감이 감도는 집무실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발람 프라시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 이미 정해졌군."

"그게 무슨 말이더냐. 발람."

"내가 메네오라 백작령에 가면 될 것 아니오. 다른 재앙들은 남은 두 분께서 알아서들 하시오."

"……."

국왕 필레몬 에우데미아. 기사단장 어거스트 라코니아. 원수부의 발람 프라시스. 셋 중 자신이 제일 약하니 C급 토벌을 맡겠다는 건가.

분명 정론이긴 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영 싸가지가 없는 발람이었다.

'평소라면 내가 지금 참았겠지만...'

자기 말만 내뱉은 그는 뚜벅뚜벅 집무실 문으로 향했고, 보다 못한 내가 딴지를 걸었다.

"발람. 곧장 집으로 가시게요?"

"뭣도 모르는 애송아. 재앙 경보가 떨어지고 판타스매터가 출현하기까지는 평균적으로 사흘의 간격이 존재한다. 그리고 왕도에서 메네오라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지 않나."

"그렇죠."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싸울 수 있게끔 군을 정비하며 이동하면 이틀이다. 당연히 출발 준비를 서둘러야지."

"아. 예. 수고하세요."

"... 흥."

흥 칫 뿡.

발람은 고개를 홱 돌리며 문을 나섰고, 그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리만이 복도 밖에 남았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잦아들 때 즈음...

"선생님. 요즘 토벌도 열심히 나가던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 괜히 다시 삐뚤어집니다."

"어허. 방금은 나도 한 마디 하고 싶었구먼. 나는 오히려 선생의 심정을 이해한다네."

"아론 아저씨..."

왕비는 나에게 자그마한 잔소리를 했고, 노령의 사법부장은 나를 오히려 두둔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 역시 한 마디씩을 덧붙였으니.

"확실히 발람 녀석. 요즘 일은 잘하지."

"폐하. 그건 순전히 선생과 맺은 맹약 덕분이지 않습니까. 아직 저거 버릇은 안 고쳐졌습니다."

"예전엔 제 누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순진한 놈이었는데. 어쩌다 저리 삐뚤어졌는지..."

"그래. 제드로 네가 왕비님 뒤를 따라다니듯, 글로리아의 뒤를 따라다니던 발람이었는데..."

"카일. 이런 자리에서 그런 말은..."

그랬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왕국은 형제 자매들끼리 사이가 참 좋았나 보네...

마침 잘 됐다. 안 그래도 발람이 사라진 지금, 그와 관련된 이야기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헤르만. 차음 마법 부탁해."

"집무실은 마법진으로 구비된데?"

"지금은 신중해져야 해."

"... 알았어."

방금 전 티오리아 가문의 취조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건지, 헤르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그가 묵묵히 차음 마법을 펼쳐 내자, 국왕 필레몬이 내게 물었다.

"선생.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저도 여러분께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발람은 듣지 않아도 되는 건가?"

"네. 오히려 듣지 않아야 했습니다."

"아. 그래서..."

국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발람에게 굳이 한마디를 더 보태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해낸 듯하다.

"폐하. 그 전에 여쭤볼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무엇인가."

"이 세계. 그러니까 이 에코니아라는 대지에. 타인의 가치관을 강제로 바꿔 버릴 만한 마법이 존재했던 적이 있습니까?"

"타인의 가치관을 바꾼다라..."

국왕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왕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왕비님.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른 분들께서도 떠올려주십시오. 제가 지금껏 조사해온 서책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꼭 이걸 알아내야만 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고민을 이어 나가던 국왕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 이 세상에 위협이 될 만한 심상 마법의 역사는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다네. 혹여 누군가가 그 심상을 흉내 내려다 실제로 발현해 버린다면 그야말로 재앙이 되어 버리니까."

"……."

"허나 결론만 말하자면. 존재했다네."

"그렇군요..."

이렇게. 취조실에서 에딘과 마크의 대화를 듣다 생겨난 의문이 해결되어 버렸다.

사실 해결이라고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영 좋지 못한 일이다.

... 내 불행한 짐작이 조금씩 맞아떨어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자네. 방금 내게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다음은 무엇인가."

이제. 방금 전 지도를 보며 생겨난 위화감을 해소해야 할 때가 찾아와 버렸다.

사실 이 질문을 하는 것이 두렵다.

나는 다른 이들의 감정을 좀처럼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추론할 수는 있으니까.

이 물음은 누군가의 아픔을 건드리고, 누군가에겐 불안을 조성하게 될 물음이다.

'그래도. 해야겠지...'

나는 카일 티오리아의 옆에 있는 그 지도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모두에게 물었다.

"저 골짜기의 지명은 확실합니까."

"무슨 골짜기 말인가."

"... 별이 떨어진 골짜기 말인가요?"

"네."

"……."

내 칼 같은 대답에 루시아 왕비의 안색이 흐려졌고, 필레몬 국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이들의 반응 역시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이 자리의 최연장자 아론 미모스는 침음을 흘리고, 재상 제드로는 누이를 살피고, 기사단장 어거스트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지도 옆에 서 있는 카일은 겉으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내게 되물었다.

"자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알기로는 다른 이름이었으니까요."

"저곳의 원래 이름은 큐리어..."

"제가 알기론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

차마 내가 아는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으니.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오직. 별만이 떨어진 골짜기가 확실한지요."

내가 아는 저곳의 이름은

'해와 별이 떨어진 골짜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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