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195화 (195/215)

〈 195화 〉 2­158. 실적 좋은 사기꾼. 마음의 빚쟁이.

* * *

2­158. 실적 좋은 사기꾼. 마음의 빚쟁이.

"오직. 별만이 떨어진 골짜기가 확실한지요."

내 물음의 뜻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국왕 내외와 가주들은 할 말을 잃었다.

나로서는 저 계곡이 내가 아는 그 명칭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야만 내 불안한 예감이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왕비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 어떤 연유로 그런 질문을 하셨나요?"

"여러분께 그 이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

내 대답에 시야 한구석에 있는 헤르만은 이마를 짚었다. 그야 자신에게나 통할 법한 개소리를 루시아 왕비에게 해버린 셈이니까. 그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헤르만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인 듯, 카일 티오리아가 내게 성을 내기 시작했다.

"자네. 언제까지 그렇게 오만방자하게 행동할 셈인가! 유나 양의 건에도, 시온 자작령의 사건 때도. 우리는 충분히 자네를 믿어 주었네. 이제는 알고 있는 것을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이었다.

인생은 삼세판이라고들 한다만. 과분하게도, 이곳에 계신 높으신 분들께선 이 실적 좋은 사기꾼을 세 번이나 믿어 주셨다.

그러나 무릇 나라를 아끼는 어르신들이라면 아무리 실적이 좋더라도 그 방법론에 대해 검증은 해야 하는 법. 저런 불만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모두에게 머리를 가볍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카일은 기가 찬듯, '허!'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세계물의 주인공들처럼 세상의 전개가 달라질까 염려하는 중이병에 걸려든 건 아니다.

그딴 병신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면, 나는 주변 사람들 몇 명을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만약 이 세상의 역사나 흐름이 달라진다면, 나는 그마저도 넘을 각오를 이미 마친 상태다.

다만.

이런 각오와는 별개로 나는 무섭다.

'에코니아는 어떻게든 멸망할 세계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이 그 말을 어찌 받아들일지 너무나도 무섭다.

이것만큼은 내가 지금껏 배워온 감정의 영역에서 차마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나쁜 놈이 되고 마는 게 낫지. 내가 모르는 그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정적이 내리깔린 집무실에서...

"후우..."

루시아 왕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는 대화가 진행되지 않겠군요. 사실 저 이름은 제가 지은 것이여요. 에스더가 죽었다는 것은 제 마음속 별이 떨어진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 이렇게나마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아...

이 세상에 온 뒤로 내 불길한 예감은 전부 맞아떨어진 느낌이다.

루시아 왕비의 마음속 별이 에스더 비라면, 그녀의 태양은 단 한 사람 뿐.

국왕 필레몬 에우데미아.

찌푸린 채 고민을 이어 나가는 저 팔불출 가장이 죽는다면 '해와 별'이 지는 꼴이다.

게임 속에서는 이미 국왕이 죽었으니까.

왕비는 단 하나뿐인 친구와 남편을 골짜기의 이름으로 또 한 번 기억하려 했겠지.

'이제 빼도박도 못하겠네. 분기점이구나...'

오늘 아침에야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었는데. 왜 하필 오늘이란 말인가.

역시 차남회를 공격해야 했나. 이것도 아니라면 마크를 더 압박해야 했었나...

내 마음속에 온갖 가정과 후회들이 떠돌아다니는 사이, 왕비가 내게 고했다.

"자. 제가 물어보신 내용을 명확히 답했으니, 이제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입니다."

"... 알겠습니다."

나는 오늘 일어났던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에딘과 대화하던 사이, 과거 화제가 나오자마자 발작을 시작한 마크. 그런 마크를 진정시키다 보니 이마에 교단의 문양이 떠올랐고, 그 문양은 심상 마법의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내 예상을 덧붙였다.

"하여. 마크의 기억이나 가치관에 결함이 생긴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보고가 마치자, 국왕 내외와 가주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자네는 그렇다면 왕국의 귀족 자제들이 단체로 세뇌라도 당했다는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흐음."

"아무리 그래도..."

역시나 쉬이 믿을 수 없는 의견이기에, 재상과 왕궁부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와중에 사법부장, 아론 미모스가 한껏 내리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이미 역사가 증명해주지 않소."

"역사라..."

"우리 앞에 악인기가 놓여 있다는 것은 시하 공작이 시온 자작령에서 재앙을 막아냈을 때부터 예견한 일 아니었소. 악인기에는 온갖 심상 마법을 보유한 자들이 난립하지. 이미 역사 속에는 기억을 지우거나, 명령을 따르도록 세뇌시키고, 심지어 시간을 돌리는 이까지 있었지 않나."

... 시간을 돌린다니. 에코니아의 과거에는 무슨 회귀자라도 있었던 걸까.

나는 잡다한 의문을 잠시 마음속에 묻어두고, 그들에게 한 가지 예상을 더 꺼내놓았다.

"제게 한 가지 예측이 더 있습니다."

"무엇인가."

"조금 전. 여러분들께서는 발람이 어느 날을 기점으로 급변했다는 듯이 말씀하셨죠."

"... 그렇네."

"분명 마크는 열두 살의 생일이라는 대목에서 과거를 떠올리려 하다 발작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이죠. 혹여 발람도 비슷한 시기에 세뇌를 당한 게 아닐까요."

"……."

국왕 내외와 각 장관들은 고민에 빠졌다.

가능성은 적지만, 나로서는 발람이 세뇌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만약 세뇌당한 것이라면, 지금 출정을 나간 것조차 연기일 테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내 염원을 담아 기도했다.

'제발. 발람이 원래부터 일도 제대로 안 하고 삐딱선만 타던 바보 멍청이 돼지였기를 빕니다...'

그 순간. 재상 제드로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제드로. 뭐 떠오른 게 있나."

"폐하. 발람이 아카데미를 졸업 시험에 응했던 그날을 기억하십니까."

"그거야 잊을 수 없는 날이지. 황룡 산맥에 발생한 부정 마력 집결지를 정화하라는 과제였고, 그때 녀석은 조난당했었지."

"맞습니다. 발람은 당시 아카데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강자. 그런 녀석이 조난이라니. 저는 사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난 이후로 발람은 크게 탈선했죠."

나를 재상부에 스카웃하려 했던 제드로 재상이 발람을 저렇게나 올려치다니. 내가 기도를 하자 마자 배신당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다른 한편, 루시아 왕비는 재상의 발언을 애써 부정하듯 말했다.

"하지만 제드로. 그건 거의 15년 전 일이야.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9년 전과는..."

"누님. 마크가 처음이 아닐 수 있다는 거야."

"……."

"차남회의 구성원 대부분 혹은 전원이 세뇌당했다. 이 가능성을 닫아 둬선 안 돼."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마지막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콕 집어 주는 제드로 재상이었다.

심상 마법을 당연시하는 세상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일정 수준의 믿음을 얻은 걸까.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회의는 흘러 갔다.

"폐하. 제드로의 말을 듣고 보니 이 늙은이도 떠오른 게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아론 아저씨."

"제드로. 발람이 조난을 당했을 때. 그러니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세뇌를 당했다는 의견인 게냐."

"정확하십니다."

"흐음. 제인이 언제 한번 건국제에 찾아와서 내게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네."

"제인 테크니 후작 말씀이십니까."

"그 제인이 아니라면 따로 누가 있겠나. 하여간 그녀가 말하길, 아카데미에 가서 매주 편지를 쓰겠다는 마크 녀석이 한 통도 보내지 않았다고 했었지. 그땐 자식새끼들이 원래 다 그렇다는 식으로 넘겼네만. 뒤늦게 마음에 걸리는군."

"그건... 자식이라 다 그런 게 아닐까요?"

"그 제인과의 약속을 어기고도 무사할 것 같나."

"... 하긴 그렇긴 하죠."

여러 사람들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점점 윤곽이 잡혀가는 느낌이다.

'15년 전부터. 귀족가의 자제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노려 세뇌 마법을 건 범인이 있다.'

아무래도 이런 명제가 정립된 듯하다.

그런데 지금의 분위기가 탐탁지 않은 듯, 왕궁부장 카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걸로 선생의 첫 질문의 의도는 알겠다. 차남회의 인간들을 견제해야겠지. 하지만 그다음 질문의 의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 별만이 떨어진 골짜기가 확실한지요. 마치 또 다른 무언가가 떨어지지 않았음을 수상하게 여긴 듯 했는데. 어서 그 이야기나 시작해 보게나."

잠자코 듣고 있던 루시아 왕비가 어깨를 움츠릴 정도로 카일의 발언은 상당히 직설적이었다.

... 하긴. 어찌 보면 카일에게 제일 민감한 질문이었겠지. 티오리아는 왕실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가문이니까.

에스더를 호위하던 호리아는 자신의 반려이고, 필레몬 국왕의 바로 옆에는 자신이 있다.

그런 그에게 '오직 별만이' 떨어진 게 확실하냐는 질문은 모욕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해방교단과 차남회의 유착 정황. 꺼림칙한 골짜기의 지명. 세 곳에서 동시 출현하는 재앙.

이 모든 것이 내게는 근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는 내게 적용되는 논리일 뿐.

골짜기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지금 다가오는 미래를 납득시킬 방법이 내게 없다.

내 고민이 밖으로 드러난 걸까. 필레몬 국왕이 사뭇 진지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그 정도로 말하기 어려운 일인가."

"그게..."

"자네는 언제나 우리에게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지. 그저 주장하기 위한, 애써 끼워 맞춘 근거만을 제시해왔네. 그런 자각은 있는가."

"……."

지금은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내 의견을 설명할 때. 각오, 명분, 의도, 실적, 정황따위에 묻어가는 경향이 강했다.

타라스 마을에서 재앙 앞에 서지 않았더라면.

아셰리아 공주를 위한다는 명분이 없었더라면.

알렉산더 왕자를 위한다는 의도가 없었더라면.

힐데스비니를 내가 직접 토벌하지 않았더라면.

이곳의 사람들은 나를 믿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 동시에. 여기 있는 사람들을 깔끔하게 이해시킬 수 있는, 그런 논리를 나는 제시하지 못했다.

"당연히 자각은 있겠지. 나는 자네가 '논리'로 주장을 이해시킬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지. 자네가 아이들의 강의에 임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거든. 밖에서의 행동이 어찌 되었건, 강의에서의 자네는 그야말로 체계적인 논리와 이성 그 자체라네."

이 팔불출 국왕은 자식들 앞에서는 헤실거리기만 하다가, 가끔 통찰력 있는 모습을 보인다.

저런 말까지 해버렸으니... 이 다음은 어디 한 번 '논리적으로' 말해 보라고 권유하지 않을까.

'괜히 이렇게 개기다가 개같이 망하느니. 그냥 말해 버리고 나만 자폭하는 게 나을수도...'

반쯤 자포자기했을 때, 그가 고했다.

"그러니 일단 자네가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해 보게. 우리를 이해시킬 생각은 말고, 결론을 먼저 꺼내보라는 거네."

"... 예?"

"폐... 폐하!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됩니다!"

"카일. 진정하게."

"하지만 폐하!"

"자네 심정도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이 왕국에 온 지 겨우 1년도 안 된 표류자가 내 가족을 구했어.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

"이제 말해 보게나. 다만 언젠가 이유를 설명해주면 좋겠네. 카일을 이해시켜야하니 말이야."

카일은 어느새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을 쳤고. 제드로는 그런 그의 등을 두드린다.

내 뒤에서는 헤르만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고. 아론 영감은 인자한 미소를 띄웠다.

기사단장 어거스트 수염을 쓰다듬었고, 루시아 왕비는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필레몬 국왕에 이르러서는...

'그 게임' 속 '누군가의 아들'처럼, 사뭇 결연한 얼굴이 되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

결국, 나는 또다시...

기약 없는 믿음에 마음의 빚을 져야 하는 건가.

…….

그래.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이들의 믿음을 이용해서라도 꼭 행복한 끝을 향해 가야겠다.

그리고... 이들을 온전하게 이해시키지는 못할지라도, 각오 정도는 내비칠 수 있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 말문을 열었다.

"폐하. 그리고 여러분.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믿으셔도 되고,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릴 결론만큼은 무조건 참입니다. 만약 아닐 경우에는 제 목을 걸지요."

"목을 건다니 그딴 말은 꺼내지도 말게."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는 제 각오입니다."

목숨을 건다.

그 말에 가슴팍을 두드리던 카일은 행동을 멈추었다. 그도 역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저는 가끔 꿈을 꿉니다. 해방력 200년대의 꿈을요. 일단 분명한 건, 그곳에 '왕실 가정교사'인 이시하는 없었습니다."

"……."

"하지만. 그 꿈은 대체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일례로, 저는 헤르만에게 '재상부에 도로 한 군데를 파보라고 민원을 넣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제드로 재상님?"

"...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네. 도로에 아무 징조도 없었는데 빈 공간이 발견되어 난리였지."

"그 역시 꿈에서 본 것입니다."

그래도 믿기지 않는 듯, 헤르만과 제드로 재상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어제도 역시 꿈을 꿨습니다. 시장에서 지도 한 장을 보는 꿈이었죠. 그런데 유독 저 골짜기의 지명만이 돋보이던데, 저것과는 달랐습니다."

"... 무엇이었나."

"잠깐.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꿈속의 저는 상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골짜기는 왜 저 이름이냐. 그에 상인은 제게 귀를 내놓으라고 손짓했죠."

나는 있지도 않은 상인에게 빙의하여 허공에 손짓했고, 그다음엔 상체를 앞으로 숙여 귓속말을 듣는 자세를 취했다.

"제가 그에게 귀를 가져다 대자... 그 상인은 조심스럽게 제게 말했습니다."

꿀꺽.

내가 무의식중에 침을 삼키자...

다른 이들 역시 한층 더 긴장했다.

그렇게 나는...

한 사람 이야기꾼이 되어 청중에게 고했다.

"'하늘을 뒤덮은 오만'이 별을 떨어뜨렸고. 열두해가 지난 다음 해마저 떨어뜨렸다."

"그 이름은 해와 별이 떨어진 골짜기였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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