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2159. 실적 좋은 사기꾼. 마음의 빚쟁이 (2)
* * *
2159. 실적 좋은 사기꾼. 마음의 빚쟁이 (2)
사람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을 때면, 잠시 멍해지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상인가 보다.
살아오면서 산전수전 다 겪어 보았을 법한 이 사람들마저도 잠시 멍해져 버렸으니까.
잠시의 침묵이 지나고.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제드로 재상이었다.
"자네. 그건 A급에 필적하는 재앙의 이름이네. 어디서 그런 수상쩍은 말을 들은겐가."
"꿈에서 들었다니까요."
"하아..."
재상은 애초에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소문의 근거를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보의 출처는 그 게임이었으니, 나는 결국 이 컨셉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 예지몽을 꾸는 사기꾼 컨셉 말이다.
다음은 열이 끝까지 오른 카일이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저 꼬맹이가...!"
"가주님. 진정해요. 진정! "
"이거 놔라. 헤르만. 내 오늘...!"
"진짜면 어쩌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었잖아! 저 인간이랑 일하면 그러려니 하게 된다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어도 그는 진심으로 암기를 뽑아 들지는 않았고, 헤르만이 카일의 뒤에서 양팔을 붙잡고 말리는 꼴이 되었다.
루시아 왕비는 자신의 뒤에서 저런 꼴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담담히 창문 밖만 바라보는 상황.
다른 한편에서는, 사법부장 아론 역시 이번엔 받아들이기 힘든 듯,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허어. 꿈이라니. 시하 선생이 헛된 꿈을 꾼 것일 수도 있지 않소."
"... 죄송합니다."
"도대체 자네가 왜 죄송하다는겐가. 다만, 그건 단순한 꿈에 불과할 것이야."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부정.
분노.
협상.
슬픔.
이 다음은 분명 수용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생각으로 나머지 두 사람... 필레몬 국왕과 어거스트 기사단장을 슬쩍 보았더니, 두 사람은 뜻밖에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래. 나도 정신 차려야지...'
내가 마음을 다잡고 개소리를 늘어놓았으니, 개소리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나.
나는 아직 진정하지 못한 이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아직 안 끝났습니다. 진정하세요."
카일과 헤르만은 '진정하게 생겼냐'라는 표정이었으나, 나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여러분들께서는 제 꿈에서 중요한 부분 하나를 놓치셨습니다."
"... 무슨 뜻인가."
"그 꿈에서는 제가 없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꿈에서 본 것을 '왕실 가정교사 이시하가 없는 역사'라고 친다면, 지금의 역사는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하면서 자괴감이 샘솟았다.
방금 내가 내뱉은 말이 자기애에 빠진 정신병자가 지껄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다행스럽게도.
내 앞의 필레몬 국왕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뭐. 자네가 꾼 꿈이야기에 어울려주도록 하지. 그렇다면 자네는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 그렇다면 먼저 폐하와 기사단장께 묻겠습니다. 만약 그 재앙이 출몰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두 분은 어떻게 구역을 배정하셨을까요."
두 사람은 서로를 잠시 마주 보더니,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폐하께서 그 골짜기로, 나는 다미아 평원으로 향했겠지. 재앙에 맞서는 능력은 폐하께서 훨씬 더 우월하시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여러분. 방금 전 발람이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
"... 허. 그렇군. 당연한 말이었지만, 집무실을 떠나면서 할 말은 아니었지."
약간은 진정한 기색의 카일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방금 발람이 나가면서 말했지 않나. '다른 재앙들은 두 분이 알아서들 하라'라고."
"아."
"거기다 선생이 그 이유를 갑작스레 물었건만, 출발할 이유를 미리 생각해 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었지. 이미 메네오라에 재앙이 출몰할 것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네."
나는 발람이 늘어놓는 핑계를 들으며 '웬일로 바른 말을 하는구나'싶었는데. 국왕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짚어냈다.
"허나. 발람은 선생과의 결투로 인해 맹약에 묶여버렸으니 천천히 생각해도 돼. 지금 중요한 건 '하늘을 뒤덮은 오만'이겠지."
집무실의 모든 이들은 잠시 고민에 빠진 가운데, 기사단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자네가 말한 역사를 피해가기 위해서는 내가 나서야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오만에게 도전해 보는 수밖에."
도전. 주로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맞설 때나 쓰는 단어.
원래 역사대로라면 지금으로부터 2년 후의 어거스트 경 역시 동귀어진이 전부였으니, 지금 맞서도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그의 말에 필레몬 국왕은 만류했다.
"어거스트. 아무리 자네라도 그건...!"
"폐하께서 가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
"다른 귀족들과는 다르게, 저는 폐하의 손에 거두어진 몸입니다. 잊으셨습니까."
"... 그걸 어찌 잊겠나."
게임에서 두 사람은 이미 죽었기에 나오지 않았지만, 왕도에서는 유명한 일화였다.
필레몬 왕자의 첫 번째 친위대. 화전민인 부모를 잃은 어거스트는 방패 하나만 든 채 산적들의 소굴로 뛰어들었고, 마침 산적을 소탕하려던 필레몬 왕자에게 주워졌다.
그야말로 흙수저의 출세 신화.지금의 어거스트 경은 먼 옛날 '거두어 준 은혜'를 갚는다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제발 저딴 식으로 사망 플래그를 남발하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다.
나는 그가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으니까.
"두 분. 그렇게 불길한 말씀을 남발하는 건 그만두시지요. 소설로 따지면 곧 죽을 인간들이나 할 법한 말을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특히 폐하께는 두 번째 경고입니다."
"... 자네. 또 미쳤나?"
내가 비고에서의 우울 국왕을 떠올렸듯, 필레몬 국왕 역시 그때를 떠올린 모양.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이들은 '갑자기 저 새끼가 왜 저러나' 싶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오직 단 한 사람, 루시아 왕비만이 창밖을 멍하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차마 짐작할 수 없었던 나는 말을 이어갔다.
"기사단장님. 혹시라도 지금 오만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함께 쓰러지실 생각이십니까."
"……."
"그 생각은 그만두십시오. 에스더님께서는 신성 마법을 사용하셨기에, 12년이 지난 지금에야 티폰이 돌아온 겁니다. 하지만 기사단장께서 에스더님에 버금가는 신성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자네. 어찌 거기까지 알고 있는겐가."
"일단 들어 주십시오. 지금 기사단장께서 도전한다 하셔도, 결국 순서가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순서가 바뀐다니..."
"제가 본 미래의 기사단장께서는 해방력 200년의 1월. 오만에 맞서 싸우시다 전사하십니다."
재앙은 부정의 마력이 형체를 갖춘 것. 그러니 그 개체 수가 여럿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기사단장과 필레몬 국왕이 맞서야 할 재앙은 이 세상 속에 단 한 개체 뿐.
하늘을 뒤덮은 오만. 티폰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대신, 언젠가 꼭 돌아오게 된다.
나도 이유를 자세히는 모른다. 그저 게임의 정보창에 그리 쓰여있었을 뿐이니까.
"폐하께서 나서게 할 수도 없다. 나도 나서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찌하란 말인가!"
"나서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뭐...?"
도대체 저 어린놈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나는 내게 쏠린 시선을 느끼며 담담히 고했다.
"두 분께서 함께라면 어떻습니까."
"함께라고?"
"예. 국왕 폐하와 어거스트 기사단장님. 두 분께서 합심하여 그 재앙을 무찌르고, 생존하실 수 있으십니까.
"……."
단순히 '무찌를 수 있냐'라고 물어보면 안 된다. 이 두 사람은 자기희생적이다 보니, 죽어서라도 무찌르겠다고 다짐할 인간들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국왕은 머릿속으로 고민해 보지도 않고 곧장 답했다.
"생존이라. 그 조건을 건다면 모호하군."
"폐하. 세 번째 경고입니다."
"지금은 진지하다네."
"진지하게 고민부터 해주세요..."
그 순간.
"엣헴."
아직도 창밖을 내다보던 루시아 왕비가 목청을 가다듬자, 괜히 눈치를 보는 국왕. 그제야 그는 제대로 된 고민을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내가 온전한 심상 마법을 준비할 수만 있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네."
"그렇다면 제가 방패가 되겠습니다."
내가 원하던 대답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국왕이 진지한 투로 물었다.
"헌데. 문제가 있네. 내가 어거스트 경과 함께 행동한다면 나머지 한 곳은 어찌 되는 건가."
"다미아 평원 말씀이십니까."
"그래."
국왕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다.
왕도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니, 국왕이 없는 왕도에는 왕비라도 남아야 한다. 티오리아 가문의 카일은 당연히 국왕을 보좌하는 역할이니 함께 가겠지.
재상. 제드로 프로네시스는 자연 마법에 능하지만, 재앙을 죽이는 데에 있어 자연 마법은 미칠 듯한 소모를 감내해야만 한다. B급 하위의 재앙을 죽이기에 혼자서는 무리다.
중도적 정의를 추구하는 미모스는 상대의 죄질에 따라 위력이 결정되기에, 운이 나쁘다면 되려 당할 우려가 있다. 예를 들면, 기근이 테마인 힐데스비니와의 상성은 최악이다. 미모스 가문은 선량한 피해자를 내려찍을 수 없으니까. 광인의 파도에 휩쓸려 버릴 것이다.
결국...
두 분에게는 귀한 목숨 걸지 말라고 했으나.
하찮은 내 것 정도는 걸어야할 수도 있겠다.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이지 않습니까."
"그게 누군가."
내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슥 가르켰다.
그걸 본 어르신들은 벙찐 표정이 되었고...
"저 형이 미쳤나! 시온에서 그 꼴이 된 지 겨우 반년 지났어. 이 인간아!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들아. 진정. 진정해라..."
"아버지도 보셨잖아요! 저 인간 마력 탈진 와서 며칠을 퍼자고도 저 소릴 하는 거라니까요!?"
순식간에 이전의 상황과는 반대가 되어 버린 티오리아 가문의 부자였다.
... 사실 알고는 있다.
어른들 앞이라 마력 탈진이라 포장하고 있겠지만, 헤르만은 내 마력 중독을 걱정하는 것이다.
마력 중독. 타락. 입마.
모든 감각이 내 것이 아니게 되고, 제정신을 잃게 되는 그 감각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는 않다.
"헤르만. 알고 있어. 근데 어쩔 수가 없잖아."
"……."
"혹시 모르지. 내가 마력 탈진으로 뻗어 버리면 아모스가 심상을 각성해서 다 때려눕힐 수도?"
"저 인간이 아직도 정신을..."
"농담이야. 그래도 괜찮아. 해답이 있잖아."
나는 허리춤에 걸린 '악인기 최악인의 검, 엔크라테아'를 손으로 팡팡 쳐댔다.
그러자 헤르만의 기세는 꽤 줄었으나, 이번에는 필레몬 국왕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 왕실의 비고에서 말해줬었지. 왕가의 타락한 후계자가 이 검을 썼었다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모르겠다만...
처맞기 전엔 누구라도 계획이 있는 법. 나에게는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다.
필로네가 말하길, 엔크라테아로 내 타락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일단 마력에 중독된 다음, 어떻게든 검을 잡으면 된다. 이걸로 깔끔하게 해결...
속으로 미친 발상을 떠올리던 사이, 창밖을 내다보던 루시아 왕비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생각이 있으신겁니까. 없으신겁니까. 아니면 필레몬의 말대로 미치기라도 하셨나요."
"... 네?"
"세뇌 여부와 관계없이. 차남회가 해방 교단이 서로 유착했다는 건 기정사실입니다."
"그렇... 죠."
"지금껏 해오신 일들을 전부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해방 교단의 행보를 방해하고, 차남회까지 적으로 돌린 건 선생님이예요. 그렇다면 그들의 1순위 제거 대상이 누구일까요."
1순위 제거 대상.
정답은 바로 접니다.
왕비에게 팩트로 두들겨 맞아버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거스트 경."
"예. 왕비 전하."
"기사단의 지휘권을 제게 돌리세요. 티폰과 맞섦에 있어 인원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루시아. 당신..."
필레몬 국왕은 멍해진 표정으로 자신의 하나 뿐인 아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시아 왕비의 표정은 차가운 얼음을 머금기라도 한 듯,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제가 제드로와 함께 다미아로 갑니다. 아론 아저씨. 왕도를 부탁드릴게요."
"알겠네."
나는 왕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비님. 그럼 저는..."
"선생님께선 왕도에서 아이들을 지켜 주세요. 왕실 병력 대부분이 출정할 예정이니, 아이들을 변장시켜 빼돌리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왕궁은 자객의 위협을 방어하기에 너무 넓습니다."
마지막으로.
왕비는 누군가가 떠오를법한 싸늘한 표정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은 이것만이 '정답'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