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 2160. 실적 좋은 사기꾼. 마음의 빚쟁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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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0. 실적 좋은 사기꾼. 마음의 빚쟁이 (3)
"지금은 이것만이 정답입니다."
창문 밖만 내려다보며 잠자코 있었던 루시아 왕비가 저렇게나 단호하게 말하니, 집무실에 있던 이들은 차마 대꾸할 수 없었다.
그나마 그녀의 남동생인 제드로 재상이 '차라리 자신이 혼자 기사단을 이끌고 가겠다'라고 말해보았지만, 그 제안은 단칼에 거절당했다. 기사단 병력을 잃으면 메네오라에서 돌아온 발람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논리였다.
왕비의 논리는 얼핏 들으면 합당했다.
하지만 그 논리의 전제란 무엇이었을까.
루시아 왕비는 마음속으로 각오한 것이다.
왕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한 발람을 저지할 사람들이 기사단 밖에 없는 경우의 수.
바로 국왕과 기사단장, 그리고 국왕 친위대 전원이 전사했을 때를.
그 뜻을 알아차린 제드로는 할 말을 잃었고.
집무실에 있던 모든 이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최선의 방비를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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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저녁. 왕실 후궁의 정원.
알렉산더가 영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어마마마. 저와 리아는 선생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저택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알렉산더."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마차가 동원하신 겁니까?"
"... 여기저기 선물을 보내야 할 곳이 많아서요. 이제 곧 건국제이지 않습니까."
"……."
왕비님. 좋은 임기응변이었습니다.
비록 알렉산더가 '논리학'과 '비판적 사고'를 터득해서 의심하는 눈치지만 말입니다.
지금 알렉산더 녀석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앞에 도착한 마차들을 살피는 중인데.
왕실의 문양이 찍혀 있지 않고, 바퀴는 꽤 서민적이며, 밋밋한 디자인의 프레임...
알렉산더의 생각에,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마차였나보다.
"어마마마. 그렇다고 보기엔 마차가..."
"알렉산더. 당신도 이제 귀족들을 정치적으로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네."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는 왕실의 문양이 찍힌 마차로 선물을 보내야 하겠죠. 하지만 드러나면 곤란한 종류의 공적도 있는 법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은밀하게 관계를 다져야 합니다."
"그... 그렇군요."
"또한 선생님께서 고용하신 분들은 출신이 다양합니다. 왕실이 그런 분들과 교류한다는 것은 이목을 상당히 끄는 일이죠. 그러니 당신도 행동거지를 항상 조심해야 한답니다."
"... 알겠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마지막에는 무언가 우울하게 답한 알렉산더였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심경의 변화였다.
"자. 올라타세요."
"네. 어마마마."
왕비가 떠올린 거짓말이란...
국왕과 왕비가 왕실 직할지를 돌아보게 되었기에, 그간 격무에 시달린 알렉산더와 아셰리아도 잠시 쉬었으면 한다. 마침 선생님이 새로이 사신 대저택이 아카데미 숲 근처이니, 요양하는 셈 치고 갔다 오면 좋겠다.
정리하면 허술한 곳이 너무나도 많지만, 왕비의 연기가 완벽하다 보니 알렉산더는 속아버렸다.
그렇게 알렉산더가 순순히 마차에 올랐고, 이제 아셰리아 공주와 아샤가 남았다.
"리아?"
루시아 왕비가 애칭으로 불렀으나 아셰리아 공주는 물끄러미 어머니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저 단순한 습관인 걸까. 가끔 공주는 저렇게 다른 사람을 찬찬히 뜯어보듯 살필 때가 있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공주는 어머니의 앞에 다가왔다.
"어마마마."
"네. 왜 그러시나요."
"……."
공주는 잠깐 망설이더니...
어머니의 품에 살포시 안겼다.
루시아 왕비도 이런 공주의 행동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듯, 잠시 당황한 모양.
머뭇거리던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가슴께에 파묻힌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아. 갑자기 왜..."
"괜찮을 거예요."
"……."
왕비의 손이 허공에 멈출 뻔했으나, 이내 그녀는 자연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했다.
그런 왕비에게 공주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머니. 지금 저는 행복합니다."
"그런가요..."
"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고, 아샤는 언제나 제 곁을 지켜 주고,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고, 시하 선생님도 함께 있는 지금이 좋습니다."
"……."
그 짧은 시간에.
왕비의 말문이 두 번이나 막혀 버렸다.
행복한 가족.
내가 차마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라, 지금 내 눈앞에 보여도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렇게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에. 저 모습이 아름답다는 사실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지금 왕비의 얼굴은 나에게만 보인다.
알렉산더는 마차에, 아셰리아는 왕비의 품에, 아샤는 두 사람의 옆을 지키고자 섰기 때문이다.
나만 보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밝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애써 녹기를 거부하는 얼음 같았다.
"저도. 필레몬도. 모두 행복하답니다. 알렉산더도 그렇지 않나요."
"당연하죠. 저도 행복합니다."
"자. 아셰리아도 올라타세요."
"... 네. 어머니. 무사히 다녀오세요."
공주의 뒤를 이어 아샤도 마차에 탑승했고.
마차 행렬은 왕궁 바깥으로 길게 이어졌다.
저 마차들 중 내 수하들의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는 단 하나뿐.
나머지는 친왕파 귀족들과 협조 세력의 저택을 방문할 예정이다.
마차의 행렬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내 뒤편에서 얼음이 녹아버린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이다.
왕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 아이들은 안전하겠죠?"
"제 수하들도 있고, 에딘도 있으니까요. 거기다 기사단장께서 레온과 아리아도 붙이기로 했지 않습니까. 적어도 저보다는 안전하지 않을까요?"
"……."
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이지만, 그래도 부모로서 불안하긴 했던 모양이다.
티오리아 가의 지하실에 기절한 마크를 그냥 내버려 두기는 뭔가 찜찜했었기에, 나는 등성하기 전 에딘과 그를 수하들의 저택으로 옮겼었다. 여기에 기사단장님의 수양딸 아리아, 양자 레온까지 그 저택으로 향하는 중이다.
피나는 수련을 거친 기사단의 에이스 둘. 테크니 후작가의 차기 계승자. 한때 전군 부장이었던 윤흠서까지. 이 정도 전력이라면 아이들을 지키기엔 충분하겠지.
동방 무사들이 저택에서까지 가면을 쓰게 된 것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금 평온을 찾은 왕비가 나를 불렀다.
"선생님."
"네."
"제가 다미아 평원에 신속히 다녀온다면 사흘입니다. 그동안 아이들과 왕도를 부탁할게요."
"... 알겠습니다."
정말이지 부담스러운 중임을 맡아버렸다.
아이들을 지키는 것도 충분히 큰일인데, 사소한 국책의 최종 결재마저 내가 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집무실로 다시 부를 수도 없고, 선생님이 함께 계시면 총공격의 표적이 됩니다.'
그러니까...
'분산 투자로 전멸당할 위험은 줄이자. 1순위 제거대상인 당신이 미끼가 되는 편이 낫다.'
라는 논리에 나는 설득당해 버린 것이다.
긴장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 나는 농담 삼아 왕비에게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어려운 일은 꼭 뒤로 미루겠습니다."
왕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말이다 보니 의아했던 모양이다.
이내 그녀는 내 발언이 농담이었음을 깨달았는지, 작위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답했다.
"미루시다니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죠."
"그래도 국정은... 국정은 좀!"
"후후. 알아서 잘하시겠죠.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선생님도 오늘 수고하셨어요."
"예...?"
세상에 그런 말이 있다.
농담 반. 진담 반.
... 사실 반쯤 진담이었는데. 괜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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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는 출정 전까지는 필레몬 국왕과 함께 쉬어야겠다며 후궁에 들어가 버렸고, 할 것이 없어진 나는 곧장 퇴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저택으로 돌아간다거나, 학생들이 있는 수하들의 숙소로 가지는 않았다.
내가 찾아온 곳은 모험가 길드 본부.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기에 모험가들은 한 사람도 없었고. 이곳에는 경계를 서는 퇴역 기사 몇 명과 접수원 두 사람 뿐. 그리고 그 접수원 둘은 당연히 밀리와 안나였다.
"밀리, 안나. 늦은 시간인데 아직도 남아 있으셨네요."
"안녕하세요. 길드장님."
"낮에 퇴근하셨던 거 아니셨어요?"
"마침 시간이 나서 확인한 다음 퇴근하려고요. 낮에 두 분께 말씀드린 건 얼마나 진행됐나요."
"아! 여기 있습니다!"
나는 두 사람이 자필로 쓴 계획서를 읽었다.
이 세상엔 타자기가 없으니까. 이렇게 직접 쓴 계획서를 자주 보게 되는데, 두 사람의 글씨체는 정돈된 편이라 읽기 쉬웠다.
"금액 산정은 어떻게 하셨나요."
"원로 모험가분들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 신입을 가르친다고 자원하셨다던?"
"네."
"그렇다면..."
나는 펜을 꺼내 계획서의 몇 글자를 추가하여,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자. 읽어봐요."
"위험도에 따라 보수는 상한 조정될 수 있다."
"길드장 부재 시. 접수처장 밀리와 접수부장 안나가 대신 긴급 의뢰를 발주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마지막 문구를 읽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길드장님. 저희가 이런 중임을 맡아도 되는 건가요?"
"부담스러우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아뇨! 저희는 그냥..."
안나가 조심스러워하는 한편, 밀리는 손날을 세워 충성!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신용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제 한 몸 닳고 닳을 때까지 길드장님을 위해..."
"저기요. 밀리. 그거 함부로 하면 엄청 실례되고 위험한 멘트라는 자각은 있어요?"
"네? 이게 왜요, 안나?"
"하... 하하하. 안나. 밀리 좀 잘 가르쳐 주세요. 저러다 남자 한 번 잘못 만나면..."
"그러게 말이예요."
"두 분. 왜 저를 안쓰러운 눈으로..."
안나와 내가 불쌍한 동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시선을 향하자, 밀리는 한껏 움츠러들었다.
…….
나는 권력형 성범죄만큼은 절대 저지르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거다.
그나저나.
일 맡는 게 부담스러워서 꺼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믿어 줘서 고맙다는 소리를 듣다니.
저게 바로 긍정의 힘이라는 걸까. 왕비님과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나는 흉내도 못 낼 것 같다.
"안나도 괜찮아요?"
"저도 감사히 맡겠습니다."
"네. 그럼 오늘 업무는 끝. 두 분은 퇴근하세요."
"저희 아직 다른 업무가..."
"오늘은 퇴근해주세요. 저 혼자 있고 싶어서요."
"……."
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안나와 밀리는 갸웃거리며 내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집에는 유나와 사아 씨가 있고, 숙소에는 수하들이 바글바글하다 보니...
내가 혼자 있을 만한 장소라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곳 길드 본부 뿐이다.
"알겠습니다. 밀리. 빨리 가요."
"아. 네. 가보겠습니다. 공작님..."
안나가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었다.
그 후. 나는 멀뚱멀뚱 눈치 보고 있던 퇴역기사들도 전부 퇴근시키고, 혼자 길드장실로 향했다.
밤 날씨가 쌀쌀해서일까. 아니면 이 건물에 나 혼자 있어서일까. 길드장실은 적막하고, 추웠다.
그런 고요한 길드장실의 접객용 소파에 털썩 하고 드러누우니, 문득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거의 1년 만이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에 혼자 남았을 때도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은 이 감각이 너무나도 편하게 느껴진다.
"후우..."
내 마음대로 한숨도 쉴 수 있고.
"두 사람이 이길 수 있을까."
마음속 불안을 털어놓을 수 있으며.
"씨발. 개 좆같은 세상..."
세상 욕도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한쪽 팔로 세상을 가렸다.
가린다고 해서 세상이 통째로 증발하지는 않겠지만, 내 마음 한구석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슬슬 집에 가야 하나. 나는 무려 애 딸린 몸이니까. 착한 아빠 코스프레를 하려면 집에 가야지.'
라는 쓸데없는 생각에 이르렀을 즈음...
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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