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 2161. 뜬금없는 휴가 통보.
* * *
2161. 뜬금없는 휴가 통보.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희미한 달빛만이 남은 이 시간. 헤르만은 카일에게 불려갔기에 정말 나 혼자. 아무도 없는 길드 본부. 암살 당하기 딱 좋은 상황. 마지막으로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
내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고, 자연스럽게 내 손은 엔크라테아로 향했다.
'다른 사람 걱정하다 내가 죽게 생겼네.'
물론 내 삶에 딱히 가치를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다른 이들의 행복을 실현하려는 목표가 좌절되는 마당에 쉽게 죽고 싶지도 않다.
잔뜩 긴장하여 문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더니...
똑똑똑
노크 소리는 또 한 번 들려왔다.
…….
그러고 보면.
어떤 병신같은 암살자가 노크를 해...
'FBI, OPEN UP!' 같은 경고 멘트조차 없이 침입해서는, 제거 대상을 가차 없이 찔러죽이는 게 암살자 아닌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접니다. 주방장."
... 주방장 어르신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건물에 어르신이 살고 계셨지. 어찌 보면 나는 완벽한 혼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들어오세요..."
"예. 실례하겠습니다."
키가 문 높이의 절반 정도인 고블린 노인은 자정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얀 조리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양손에 접시와 술병이 들려 있다는 점이겠지.
그는 술병을 흔들며 내게 말했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 * *
갑자기 긴장이 풀리니 허탈해진 걸까.
시하는 에코니아에 온 뒤로 좀처럼 입에 대지 않았던 술을 마시게 되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지금 마시는 술의 종류가 에퀼리아의 최북단에 산다는 드워프들이 만든 보드카라는 것. 오랜만에 마시는 시하에게 영 적절하지 않은 술이었다.
그런 술을 술잔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찻잔에 받아마시고 있으니, 시하가 취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뭐. 초기에는 저 같은 고블린이 주방에 있으니 못 먹겠다는 둥 하는 모험가들이 있긴 했었죠."
"... 그런 새끼들 전부 깜빵에 처박아야 하는데."
"어허. 술기운이 많이 오르셨군요."
고블린 노인은 멀쩡하지만.
시하의 취기는 너무나 빠르게 올라버렸고, 몇 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 그 와중에 마음속에서만 존재해야 할 말들이 밖으로 줄줄 새어 나오고 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새끼들이, 다른 사람 깎아내리는 건 더해요. 아주."
"허허허. 위험한 말씀이 많으십니다."
"어르신. 다음에 그런 인간들 생기면 접수원들에게 말씀하세요. 확 잘라버리게."
"괜찮습니다. 제가 정리해 두었으니까요."
"... 네?"
"일단 강제로 먹이니 곧잘 먹더군요."
"강제로요?"
"예."
아무리 봐도 연약해 보이는 고블린 노인이, 젊은 피로 들끓는 모험가에게 강제로 먹인다니.
시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에이. 어르신께서 어떻게 그런 젊은 것들에게 강제로 먹이신다고. 농담도 잘하시네."
"저도 나름 젊었을 적엔 잘 나갔답니다."
시하는 잠시 잊고 있었지만, 눈앞의 노인은 100년 전에 이 세상에 도달했다고 전해지는 다른 표류자의 제자였다.
표류자란 이 세상에 수많은 발자취를 남기는 존재들. 그런 이의 밑에 있었던 그가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게 훨씬 이상한 일이다.
점점 혼탁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생각을 이어 나가려던 중, 고블린 노인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공작님."
"네."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
"제가 일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고블린은 귀가 밝다구요."
나쁜 짓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시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지금 고블린 노인이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정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시하는 일단 시치미를 뗐다.
"갑자기 그 말씀은 왜..."
"사실 혼자서 중얼거리시는 걸 들었답니다."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두 사람이 이길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였죠."
노인은 무심한 척하고는 있지만, 막상 말하는 내용은 전부 다 들었다는 뜻이었다.
이걸 어떻게 잡아떼야 하나.
애써 고민해 보지만 술기운 때문에 흐리멍덩해진 사고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시하는 결국 되지도 않을 시도를 할 뿐이었다.
"잘못 들으신거 아닐까요?"
"아뇨. 길드장실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싫다는 말씀도 하셨구요."
"아..."
시하는 찻잔에 담긴 술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마력등의 빛은 손에 들려 있는 술의 잔잔한 흔들림을 비추고. 찻잔에 담긴 투명한 술은 거울이 되어 시하의 얼굴을 비춘다.
그곳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술에 취해 멍해진 눈이 참 못나게만 보인다.
자신이 처한 상황도 참 웃기다.
자신의 세 치 혀에서 비롯한 말로 인해 국왕과 기사단장은 싸울 다짐을 하고, 왕비는 다시 한번 소중한 이를 잃어버릴 각오를 했다.
하지만 그토록 믿어 주는 이들에게 되려 부담을 느끼고, 반응을 차마 예상할 수 없어 무섭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숨기기 급급하다니.
방금 접수원들의 명랑한 태도를 봐서인지, 자신이 참 한심하게만 느껴진다.
"그런 욕은 처음 듣긴 했습니다만. 공작께서도 사람이시니 그렇게라도 푸셔야죠."
... 길드장실에서 그리 많은 말을 한 건 아니니까. 고블린 노인이 들어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자신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 버리다니. 입안에 씁쓸한 감각이 멤돌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순간. 왠지 모를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아... 그냥 말해 버리고 싶다.'
이미 생각이 여기까지 흘러버린 순간, 그의 다음 행동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어차피 주방장님이 알게 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빠른 합리화와 함께.
벌컥. 벌컥.
그는 찻잔에 들어 있는 보드카를 단숨에 마셔버렸고, 술 냄새가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휘청. 휘청.
그렇게 술기운으로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되고 나서야, 시하는 말할 수 있었다.
"어르신."
"예."
"티폰이라고. 아세요? 어르신은 이 세상에서. 오래 사셨으니까..."
"한때 높으신 분들의 식사를 담당하기도 했으니 당연히 알죠. 어지간한 귀족들은 모르겠지만, 그 재앙은 정말이지 역겨운 존재입니다."
"그래요...?"
"예. 창세신의 피조물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본다고 하여 '하늘을 뒤덮은 오만'이지 않습니까."
고블린 노인은 왕실 도서관의 장서들에도 찾을 수 없던 것을 읊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서관의 금지구역에나 있을 법한 정보겠지.
하지만 당장에라도 곯아 떨어지기 직전인 시하는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없었다.
"공작님.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어지간한 자가 아니라면 모르는 재앙일 텐데."
"원래부터 알고 있었죠. 저는."
"흐음. 그렇군요."
"올해. 내년. 아니면 내후년. 200년 전에 꼭 출몰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
"근데. 그게 지금이네요..."
"지금이요?"
"네... 국왕. 기사단장이... 갔는데에..."
시하의 정신은 점점 더 멍해지고, 한번 열려 버린 입은 닫힐 줄을 모르는 상태.
취기를 이겨 내지 못한 그는 한숨을 내쉬며 길드장실의 다탁에 머리를 박았다.
그의 혀는 점점 꼬이고, 생각이 차츰 더뎌지면서, 툭툭 말이 끊기기 시작한다.
"둘은. 부족한데... 도와줄 사람도. 없고오..."
"국왕 필레몬과 어거스트 기사단장이라면 에우데미아의 최강자이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함께 갔다면 능히 쓰러뜨리겠지요."
"예... 근데요. 왜 계속... 질 것. 같을까아..."
"그리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상성이... 안 맞으니까아..."
"상성?"
"티폰과... 상성이이... 예에..."
마지막에 술을 들이키는 걸 말렸어야 했나. 고블린 노인은 술자리를 제안한 어른으로서 후회를 느꼈다.
'그건 그렇고 상성이라니...'
분명 노인은 상성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
이 땅에는 여러 가지 전투방식이 있고, 재앙과의 전투를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아카데미에서는 토너먼트까지 열리니까. 그 토너먼트에서 많이들 따지는 것이 상성이다.
하지만 그 단어를 판타스매터와 인간의 싸움에 가져다 댄다니. 에코니아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사뭇 거부감이 드는 단어 활용이다.
또한 상성을 따진다는 것은 '상대방을 잘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지 않나. 그 사실을 깨닫자 노인의 의아함은 더 늘어나버렸다.
"공작님?"
"예에..."
"상성이 혹시 무슨 말씀이신지..."
"예에..."
"공작님?"
"예에..."
"……."
"으예에..."
아쉽게도. 이시하의 술주정은 예스맨이었다.
어떤 말에도 '예에...'라고 대답해 버리는 예스맨.
노인은 요리모를 벗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난처하게 됐구먼."
고블린 주방장의 난처함은 아는지 모르는지. 시하는 다탁에 머리를 박은 그 모습 그대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노인은 맞은편에서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 이제 이 집무실에는 시하의 숨소리 외에 그 어떤 소리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고블린 노인은 길드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무릎 높이까지 오는 계단을 내려와,
넓은 홀처럼 느껴지는 로비를 건너,
키와 맞먹는 식탁을 지나고 나서야.
고블린 노인은 주방 옆에 붙어 있는 자신의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드장실에는 덮을 만한 천이 없었으니, 담요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뒤적뒤적 자그마한 이불을 보관하는 옷장과 수납장을 뒤지던 중.
"이건..."
그리운 물건 하나가 나왔으니,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는 액자였다. 빛은 이미오래 전에 바래버렸기에 색감을 알아볼 수 없었으나, 노인의 기억만큼은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 나이는 노령에 가깝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몸매와 얼굴선이 돋보이는 백인 여성. 그녀의 왼편에는 키가 작고 커다란 외알 안경이 포인트인 꼬마 신사님이, 그녀의 오른편에는 조리복을 차려입은 꼬마 요리사님이 계신다.
마지막으로 사진에는 세 단어가 그리운 필체로 적혀 있는데. 꼬마 신사의 위에는 Liberté, 꼬마 요리사의 위에는 Egalité, 백인 여성의 위에는 Fraternité라고 쓰여 있다.
"……."
그 사진을 한참토록 지켜보고 있던 노인은 다시금 몸을 움직였다.
시하에게 덮어 줄 담요도 찾아야 하고...
오랜 시간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무언가도 꺼내야 했기 때문이다.
* * *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나는 어딘가의의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하필 눈앞에 보이는 천장이 익숙하지만 어색한 천장인 탓에 주변을 둘러 보면...
길드 본부의 길드장실이었다.
"... 어라."
나 왜 여기서 잔거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으니,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하 형. 일어났어?"
"나 어제 여기서 잤나...?"
"으이구. 이 인간아. 지금 왕도에서 제일 칼 맞기 쉬운 인간이 집 밖에서 술 마시고 잤냐."
"으으... 머리 아파. 잔소리 좀 그만해."
"잔소리 때문이 아니라.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머리가 아픈 거겠지."
"헤르만. 미안한데. 네 잔소리가 숙취를 더 악화시키는 게 맞거든..."
"저 인간이 어제부터..."
어제 내가 뭘 했더라.
길드 본부에서 '긴급 의뢰'와 관련된 내용을 승인하고, 길드장실에서 푸념을 늘어놓다가 주방장 어르신이 술을 마시자고 하셨는데...
…….
망했다.
대화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헤르만. 주방장 어르신은 어디 계셔? 어제 같이 술 마셨는데."
"아. 어르신께서 이거 전해 달래."
"... 웬 편지래?"
"나도 잘 몰라. 새벽에 형네 집까지 갔다가 길드장실에 오니까 어르신이 계신거야. 근데 이걸 주시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셨어."
그냥 헤르만에게 말을 전해 달라 했어도 될 법 한데, 왜 굳이 편지를 남기신걸까.
나는 의아함을 품고 편지를 열어 보았다.
[ 오랜만에 친구 놈과 멀리 나들이 좀 다녀오겠습니다. 길드 수석 셰프, 에갈리테. ]
... 그 내용은 뜬금없는 휴가 통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