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2162. 들어맞은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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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2. 들어맞은 불안.
왕도 북동쪽의 아카데미 숲 근방.
시하가 소유한 대저택의 뒷뜰에서는 자그마한 다과회가 열리는 중이다.
참가자는 아셰리아 공주를 비롯한 시하의 제자들. 기사단장의 양자들인 레온과 아리아. 시하의 수하 대표 격인 윤흠서와 아일라. 마지막으로 왕궁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시녀 둘까지.
사실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호위나 시중을 위해서 동석한 것이다만, 알렉산더 왕자는 대화 참여에 별다른 제약을 두지 않았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니까.
어찌 보면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고, 숲을 바라보며 요양하러 온 목적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는 환경이지만...
"후우..."
아셰리아 공주의 표정에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가 내쉰 한숨에 다른 사람 모두가 숨 죽인 채 그녀의 눈치를 볼 정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든 알렉산더가 물었다.
"리아. 왜 그렇게 한숨을 늘어지게 쉬는 거냐."
"오라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무엇이 이상하다는 거냐."
"……."
아셰리아 공주는 말을 쏟아 내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셰리아가 이상함을 자각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감정의 색을 볼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양친인 국왕 내외가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는 순간, 두 사람이 어떤 색을 보였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아셰리아 공주였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애써 숨기려 했던 그 색을 루시아 왕비에게서 볼 수 있었고. 아버지의 비장감이 감도는 붉은색에 다른 혼탁함이 스며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색의 함의는 아마도... 아버지인 필레몬 국왕이 어떤 강대한 적과 맞서게 되었다는 것.
도대체 그 적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셰리아 역시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다.
설마. 혹시나.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한 가능성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래도. 이런 건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왜냐하면, 감정의 색은 다른 이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 줄 뿐, 모든 걸 반영하지는 않으니까.
선생님도 말씀하셨지 않나. 감정은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고,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그러니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이상함을 느낀 이유'를 밝히려면 '맥락'에 근거해야만 한다.
한편, 알렉산더는 자신의 동생이 입을 닫아버리자, 걱정스러운 어조로 다시금 물었다.
"리아...?"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세요."
"음. 그거야 당연히 기다려줄 수 있지."
현명한 동생이 생각할 시간을 달라니. 알렉산더로서는 오빠로서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찻잔을 든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아셰리아가 깨어났다.
"저희가 쉬어야 하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저희를 비밀리에 이동시키신걸까요."
알렉산더는 그 의문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유나와 기디언 역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러게. 확실히 아셰리아의 말이 맞아. 평소에는 우리 저택에도 자주 찾아왔었잖아."
"맞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선생님과 함께 시온 자작령을 구한 영웅이지 않습니까."
"그래. 기디언 네 말이 맞다. 오히려 크게 공을 치하해도 모자랄 정도인데, 왜 어마마마는..."
네 사람의 말에 어른들은 긴장했다.
어른들의 사정이라고 해야 할까. 왕실의 웃어른들이나 시하에게 이 학생들을 무조건 숨겨두란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사회생활에 찌든 경험이 제일 다분한 윤흠서가 먼저 나섰다.
"죄송합니다. 공작께서 저희 전력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만일 왕도 신문의 기자들이 꼬인다면 여러모로 귀찮아지니까요."
도대체 왜 전공이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건가.
그의 말에 다른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유나만은 스스로 이유를 떠올렸다.
'하긴, 윤 대장과 다른 이들에게 주목이 쏠려서 좋을 건 없겠지. 들켰다간 전쟁이니까. 지금은 내가 괜한 말을 해버린 건가...'
생각을 마친 유나가 말했다.
"의부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네요. 주목받는 삶이 피곤한 이도 있을 테니까요."
"음. 그 생각을 못 했군. 내 생각이 짧았어."
"에이. 알렉스. 그럴 수도 있지."
역시나. 유나바라기 알렉산더는 쉽게 넘어가 버렸고, 윤흠서의 마음은 한층 더 착잡해졌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공주님...'
섬기는 이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싶기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윤흠서였다.
하지만 첫 이유가 막힌 아셰리아는 곧바로 다음을 말했다.
"저는 레온과 아리아, 두 분께서 이곳에 계신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맞아요. 리아 님 너무 하시네. 저희랑은 어릴 때부터 봐온 사이시면서."
"... 누난 좀 가만히 있어."
우리 구면이잖아요... 라는 말로 유야무야 넘기려던 아리아였으나, 이는 실수였다.
"물론 아리아 님은 가끔 봤었죠. 하지만 두 분께서는 이제 상급 기사이십니다. 평소 저희들을 호위하던 분들은 중급 기사였음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죠. 왜 하필 오늘, 선생님의 저택까지 호위를 나오신 거죠?"
"그. 그건... 별일 아닙니다. 중급 기사의 훈련을 위해 아버지께서 이번엔 저희가 맡으라고..."
"기사단장님께서 두 분께 직접 지시하다니. 점점 수상해지네요."
"……."
레온이 애써 뒷수습을 하려 했으나, 이미 기세를 타버린 아셰리아 공주를 막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셰리아는 자신이 품은 '불안' 외에도 존재하는 '불만'을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 왜 이 저택에 오지 않으시는 거죠?"
"공작님께서는 두 분을 대신하여 집무를..."
"아일라. 집무는 저와 오라버니가 훨씬 더 빨리 처리할 수 있어요. 저희가 잠시 궁에 다녀와도 되는 일이잖아요."
"그러면 두 분이 쉬지 못하시니까..."
"아뇨. 저와 오라버니와 선생님까지. 셋이면 두 시간 안에 집무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후 시간은 편히 쉴 수 있다구요. 저희를 위해 선생님이 희생하시는 건 이상합니다."
"……."
"여러분. 부디 말씀해주세요. 지금 왕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저는 에우데미아의 제1 왕녀로서 알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답하기 힘든 질문이라면, 여기에 선생님을 데려와주세요."
감히 그녀의 요구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로 인해 저택의 뒷뜰에는 고요함만이 감돌았고, 멀리서 어떤 고양이가 쏘아대는 화살 소리만 망연하게 울릴 뿐이었다.
어른의 사정에 묶여 버린 이들이 어찌해야 아셰리아 공주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동생아. 아니, 리아."
"예. 오라버니."
"실은 나도 지금은 불안하다. 분명 웃어른들께서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계시니까."
"그래서 제가..."
"하지만 리아. 나는 우리가 어른들께 더 큰 심려를 끼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셰리아에게 생각을 전하는 알렉산더의 어조에서, 왠지 모를 무거움이 느껴졌다.
"분수에서의 수업을 기억하니."
"...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스승께서는 직접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지. 아이들은 실수를 통해 배우는 존재이지만,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책임지는 존재라고."
"그랬...었죠."
"그러니 믿고 기다리자. 우리가 어른들의 책임을 더 무겁게 해버리면 안 되니까."
"……."
실수에서 배우고, 언젠가 어른이 된다면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알렉산더의 생각이었다.
그에 아셰리아는 힘없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별일 없을 거야. 의부님께서 벌이신 일들 모두 결과는 좋았으니까."
"맞습니다. 미력하게나마 저희 도움이 필요하셨다면 미리 말씀해주셨겠죠."
"네..."
아셰리아 역시 실수한 경험이 있으니까.
그 실수를 별하늘 아래에서 깨달았고, 시하 선생님께서는 그 책임을 대신 짊어졌으니까.
지금 오라버니의 말에 고집을 부린다면 별하늘 아래의 추억이 가치를 잃을 것만 같았다.
* * *
같은 날 밤.
왕도 아레트의 동북쪽.
"장군. 바로 오늘 아침, 왕성에서 두 군세가 출격했다는 보고입니다."
"지휘관은 확인했나."
"예. 큐리어스 골짜리로 국왕의 친위대와 기사단장 어거스트 경이, 다미아 평원으로는 루시아 왕비와 제드로 프로네시스 재상이 이끄는 기사단 병력이 향했다고 합니다."
메네오라 령으로 향하는 길목의 야영지에서, 발람은 수하에게 보고받고 있었다.
발람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은발의 여성, 일리아드에게 눈짓 했다.
"그렇다는군."
"의외네."
재수 없는 휴브리스가 말하길, '정해진 역사'에서는 국왕만이 그 골짜기로 온다고 했다.
'어거스트라...'
국왕 필레몬의 필두 기사. 출신이 미천함에도 기사단장의 반열에 이른 천재. 만약 그가 귀족가 자제로서 태어났다면, 국왕을 뛰어넘는 강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고급 전력을 비슷한 수준의 강자인 국왕에게 붙인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염려도 잠시, 일리아드는 금세 생각을 바꾸었다.
"저렇게 해봤자 지금의 국왕과 어거스트는 그 재앙을 이겨 낼 수 없어."
"확실한가."
"그래. 아니면 확실함을 더하도록 할까."
일리아드는 사제급 신도를 돌아보았다.
"교단 신자들로 하여금 골짜기로 향하라고 전해. 국왕 친위대의 발을 묶기만 하면 되니까."
"예."
명을 받은 사제는 천막 밖으로 사라졌고, 지도를 보고 있는 발람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나저나 루시아와 제드로가 서쪽으로 직접 가다니. 이것도 참 뜻밖이군."
"기사단장이 남쪽으로 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이런다고 계획이 달라지진 않잖아?"
"... 그렇지."
"나는 오히려 더 잘 됐다고 생각해."
일리아드는 주먹을 펼쳐 손아귀에 든 것을 발람에게 보여주는데. 그곳에는 크고 작은 흑옥 두 개가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차피 왕도에는 잔챙이 밖에 없을 테니까, 상급 재앙도 필요 없겠지. 우리 쪽에서 숫자로 밀어붙인다면 끝날 일이야."
"... 루시아의 표정이 훤히 보이는군."
낮게 읊조린 발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발람이 천막 밖으로 향하니, 일리아드와 부관들은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천막 밖에는 발람을 따르는 군사들이 줄지어 서있었으며, 개중에는 차남회 출신 지방 영주들과 그들의 병력도 섞여 있었다.
"... 오래들 기다렸다."
이들에게 많은 말은 필요 없다.
발람은 평소 다른 이들 앞에서 보이는 모습과 다른, 중후한 목소리로 한 마디만 읊으면 되었다.
"전군, 회군하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