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200화 (200/215)

〈 200화 〉 2­163. 내려놓을 때.

* * *

2­163. 내려놓을 때.

왕궁 본성의 집무실.

나는 알렉산더 녀석의 자리를 잠시 빌린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앉아 집무를 처리하는 중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지.

'왜 하필 알렉산더 왕자의 자리냐?'

아쉽게도, 나는 그 질문에 소거법의 결과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필레몬 국왕의 자리는 그야말로 한 국가의 원수가 앉아야 하는 곳이니까 피할 수밖에 없었고, 왕비는 이 나라의 퍼스트 레이디이니 감히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아셰리아 공주의 자리는 왠지 모르게 나 따위가 앉아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 온다고 해야 할까. 어찌 보면 국왕 내외의 자리보다도 훨씬 높게만 느껴진다.

결국 남은 건 알렉산더의 자리 뿐.

좋게 말하자면 알렉산더가 친근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알렉산더가 제일 만만했다.

결재를 위해 찾아온 관리도 내 마음을 이해한 듯, 의아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둘러 보다 고개를 끄덕인 뒤 서류를 제출했다.

"결재 부탁드립니다."

"검수는 받으셨죠?"

"예. 공작님."

"확인."

"감사합니다."

내가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찍자, 재상부의 관리는 꾸벅 인사하고 집무실을 뒤로 했다.

이제 이곳에 남은 이는 오직 나 혼자 뿐. 평소 사람들로 북적이던 집무실에 나 혼자라니, 좀처럼 와닿지 않는 사실이었다.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낀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바깥 구경이나 하고 올까."

딱히 멀리 나갈 것도 없다. 집무실 복도의 창문에서는 왕궁 중앙 정원과 정문이 훤히 보이니까.

집무실 문을 열고 복도에 나가 보면. 맑은 가을 하늘이 창문이라는 캔버스 안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저 푸르름을 보면 떠오르는 날이 있다.

"벌써 1년이 흘렀네..."

내가 에코니아에 처음 떨어진 날. 연못물에 빠져 흠뻑 젖은 상태로 하늘을 올려다본 것이 고작 1년 전 일이다. 그날 내가 본 하늘도 이렇게 높고 맑고 푸르렀지.

왕궁의 풍경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한때 내가 살던 동관, 아샤가 왠지 모를 비명을 지른 서관, 아셰리아 공주와 별하늘을 우러러본 중앙 정원의 티테이블...

이렇듯 나를 둘러싼 세상은 변함이 없다만, 굳이 달라진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그건 내 마음일 것이다.

"시하 형!"

"선생님! 큰일 났어요!"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자니, 재상부를 관리하던 한나와 왕궁부를 임시로 맡은 헤르만이 내게로 달려왔다. 체력이 좋은 헤르만은 괜찮지만, 그의 옆에 선 한나가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다급한 일로 온 듯하다.

"무슨 일이야.?"

"선생님. 남문에서 전령이 도착했어요. 방금 발람과 원수부 2군이 도착했다고."

"... 뭐?"

"지금은 성문밖에서 대기하는 중이래."

왕도에서 발람이 향한 메네오라 령까지는 이틀, 재앙 토벌과 왕복 거리까지 고려하자면 닷새가 걸린다.

하지만 오늘은 발람을 비롯한 토벌대들이 출발한지 이틀째가 되는 날. 원래라면 막 메네오라에 도착했을 그가 벌써 왕도로 돌아왔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밖에 없다.

"맹약은 벌써 풀려 있었구나..."

나도 디스펠을 시전할 재료를 모으고 있었던 주제에, 발람이 맹약 마법을 해주하리라는 생각을 못 하다니. 이건 분명한 실책이다.

고민하는 사이 헤르만이 나를 흔들었다.

"형, 지금 당장 싸울 준비를 해야 해."

"맞선다고? 지금 뭐에 맞서자는 거야?"

"당연히 왕도 내의 전 병력을 이끌고..."

"지금 주 병력은 전부 재앙을 토벌하러 가고 없는데, 교단과 손잡은 발람과 싸우자고?"

"……."

"아니지. 이것부터 확인하자. 한나."

"... 네. 선생님."

평소 내 가벼운 모습만 봐서일까. 내 가라앉은 목소리에 사뭇 긴장한 한나였다.

"지금 발람군은 전투 태세야?"

"아뇨. 성문을 열어 달라는 전갈만 전하고 허가가 떨어지길 대기하는 중이예요."

"그래. 그렇다면 발람 옆에는 누가 있어?"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해방 교단으로 보이는 인간이 있냐고."

"... 그런 사람들은 없었다고 들었어요."

토벌을 도중에 회군한 시점에서 반란은 이미 확정이다. 맹약이 풀렸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니까. 교단과의 결탁도 확실하겠지.

그런데도 저렇게까지 당당하다는 것은...

…….

문득 게임 속 한 장면이 떠올라버렸다.

"한나. 전령에게는 성문을 개방하라고 해. 반군을 대하듯이 하면 안 돼. 단순히 원정대을 성에 들인다. 왕궁까지 오도록 한다. 다른 이들의 출입은 용납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도 강조해."

"... 네?"

"형, 그게 무슨 뜻이야. 문을 열라니...!"

헤르만은 반발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지금 발람의 행동은... 게임 내 귀족들이 교단과 손잡고 일으켰던 쿠데타와 닮아 있으니까. 내 예감이 맞다면, 왕도는 이미 발람과 교단에게 인질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쭙짢게 병력을 모아 발람과 맞서 봐야,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쪽이 감당하게 되겠지.

나는 이 예감을 의심할 생각이 없다. 안타깝게도, 에코니아에 오고 나서부터 내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 맞았으니까.

거기다 이번에는 믿어도 본전인 상황이다.

"한나, 헤르만. 너희는 각자 재상부와 왕궁부의 임시 수장으로서 모든 관리들을 왕궁 바깥으로 피난시켜. 그리고 내 말 잘 들어야 해..."

나는 두 사람에게 지금부터 왕도에서 벌어질 일과 꼭 지켜야 할 수칙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내가 말 한마디를 덧붙일수록,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져 갔다.

"... 자. 여기까지. 이해 안 된 사람?"

"선생님. 솔직히 말씀하시는 걸 하나도 못 믿겠지만. 만약 진짜라고 해도 선생님은..."

"맞아. 형은 도대체 어쩌려는 건데!"

"나는 이미 한 번 이겼잖아. 괜찮아."

"선생님. 지금은 그때랑 다르잖아요!"

여러모로 내 스승 역할이었던 한나가 외쳤다.

게임에서의 그녀였다면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 망설이지 않았겠지만, 아직은 여린 한나였다.

"발람까지 왕궁 밖에서 소란을 피우게 되면 그때는 정말 막을 수 없어져. 지금은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해."

""…….""

"너희는 지금 제드로 재상과 왕궁부장을 대신하는 사람들이야. 그리고 너희가 빨리 움직여야 나도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어."

이 세상에서는 성인이지만, 내 기준으로 갓 스물 새내기 같은 두 사람에게 책임론을 들이미는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 스스로가 꼰대가 된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이 세상엔 자기 불편한 인간을 꼰대라 생각하는 방어기제가 퍼지지 않았는지, 내 꼰대짓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선생님, 무사하셔야 해요?"

"형. 바깥 상황 정리되면 내가 바로 올 테니까. 허튼짓 하지 말고 제대로 도망쳐야 해."

"걱정 하지마. 다 끝나고 보자."

각자의 말을 마친 뒤 사라지는 두 사람, 집무실 복도에는 다시금 나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왕궁의 전경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내 강점을 부각시키고, 약점은 숨기며, 발람 그 쓰레기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방법...

'이제 슬슬 나도 내려놓을 때가 됐지.'

마음속에 결론을 내린 순간, 헤르만과 한나가 이끄는 관리들이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하급 귀족 중에는 싸움을 잘하는 사람도 적으니까, 이렇게 왕궁 밖으로 피난시키는 게 좋겠지.몇 차례 솎아내기를 거치며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만 남았는데, 많이 죽기라도 하면 이 나라의 근간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니 저들은 충분히 살릴 가치가...

…….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피난 행렬의 끝이 왕궁 중앙 정원에서 사라질 즈음.

입에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저런 사람들에 비하면..."

* * *

왕궁 정원에 도착한 발람은 중얼거렸다.

"... 뭔가 이상하군."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왕도를 향해 말머리를 돌린 그 순간부터 왕국군의 격렬한 저항을 예상하고 있었던 그였다.

하지만 발람은 왕도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어떤 소동도 없이 중앙 거리를 지났으며, 그 어떤 병력도 없는 왕궁에 무혈 입성해 버리다니. 이는 충분히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고민하는 그에게 몇몇 귀족들이 말했다.

"이게 다 그 표류자 놈이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게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어서 빨리 본성으로 진군합시다."

"케일 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대부분의 전력이 왕도를 비워 버렸으니, 그 어린놈이 무슨 수로 저희에게 맞서겠습니까."

"……."

아니다. 자기 주변을 떠도는 이 아첨꾼들은 그를 무시하고 있으나. 발람의 생각에 그 표류자는 쉽사리 겁을 먹거나 포기할 인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이 왕성에 발을 들였던 순간부터 덫에 걸린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마저 들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인간의 눈은 내 누이를 닮았었지. 그리고 조카놈을 위해 결투를 신청할 정도였으니.'

'... 그래. 왕자를 비롯한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전략적인 후퇴를 선택했을 수도 있겠군.'

이렇게까지 일이 잘 풀리다 보니, 지금, 이 상황을 긍정하는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래. 만약 왕궁에 남아 있더라도 후궁이나 본성 내부에 숨어 있겠지. 먼저 본성으로 간다."

.

.

잠시 후. 왕궁 본성.

"집무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왕궁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상부 역시..."

"이제 남은 건 알현의 홀 뿐입니다."

병사들의 보고에 발람이 답했다.

"수고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후궁 뿐인가."

"장군. 먼저 알현의 홀에 들어가 직접 왕좌에 앉아 보는 것은 어떻겠소."

"... 뭐라고?"

"아... 아니. 어차피 딜라일라 님의 말에 따르면, 국왕은 분명 죽지 않겠소. 그러니 우리의 것이 된 알현의 홀을 구경이라도 하자는 거요."

"……."

발람으로서는 딱히 끌리지 않는 제안이었다.

이 왕국이 자기 손에 완벽하게 떨어진 것은 아니니까. 이번 쿠데타는 왕족을 전부 처리하는 그 순간까지 성공한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발람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만 살아 있는 귀족들은 그를 부추겼다.

"알현의 홀에 입장하면 병사들의 사기도 진작되지 않겠습니까. 어서 갑시다."

"맞는 말이오. 10년 동안 노력한 성과가 바로 눈앞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요."

"잠시 들른다고 혁명이 좌절되진 않을 거요."

지금 귀족들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면 그들의 프라이드에 흠집을 내는 셈이니, 발람은 애써 못 이기는 척하며 제안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쯧... 알겠다. 잠시 들어갔다 오지."

"잘 생각하셨소. 장군."

"2급 미만의 병사들은 이곳을 지켜라!"

그렇게 발람을 비롯한 귀족들과 정예병들은 알현의 홀을 향해 나아갔고, 드디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문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기사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문을 열어라."

"예."

구구구궁...

발람의 명에 정예병 두 명이 나서자 거대한 문은 거목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알현의 홀이 펼쳐 졌으니. 고개 들지 않으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 그 천장을 받치고 있는 우람한 기둥들, 금빛 드래곤이 그려진 붉은 양탄자의 끝에는 크고 작은 왕좌가 놓여 있었다.

"드디어 이 날이 오다니..."

"하하! 이제 이곳의 주인은 당신이오!"

"마지막에는 그 표류자 놈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축하드립니다. 장군."

10년.

이 자리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

굳이 이곳에 발을 들이기 꺼려 했던 발람조차도 그 10년이라는 단어 앞에 감개무량하여 탄성을 자아내려던 그때...

"우욱."

흡사 구토를 참아내는 듯한 소리와 함께.찬란한 왕좌의 뒤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족가튼 소리를 토 나오게 하네. 우웨에에엑."

오늘따라...

전혀 교사스럽지 않은 시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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