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 2164. 내려놓을 때. (2)
* * *
2164. 내려놓을 때. (2)
게임 속 최종 보스, 예를 들어 마왕 같은 존재들은 왕좌에서 거만하게 다리를 꼬은 채 앉아 용사 일행을 기다리는 게 정석이다. 그편이 훨씬 더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왕좌를 드높여주는 계단의 최상단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이 자리에 지키는 자에 불과하고. 내가 기다리던 자들은 학살에 동참한 쓰레기, 버러지 같은 역모일 뿐이니까. 오히려 이게 연출 상으로도 올바른 선택이다.
그렇다면 이 장소에서 최대한 거만하게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게임 속에서 제일로 고고했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나는 계단에 걸터앉아 엔크라테아로 아랫 계단을 짚고, 양손을 검 손잡이에 얹었다. 그리고 겁도 없이 알현의 홀을 더럽히는 벌레 새끼들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보았다.
그러자 잔챙이 하나가 실소를 흘렸다.
"흐흐. 애송아. 네가 그 자리에 있는다고 해서 우리가 겁이라도 먹을 것 같으냐."
"하하하! 카를 경의 말이 옳소."
"제대로 검 한 번 쥐어 본 적도 없을 표류자 놈이 거기 있으니, 참으로 우습구나!"
나는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는 속으로 왕가의 일원들과 발람 패거리들을 비교하면서 구토감이라도 느꼈지만...
마치 타라스 마을에서 재앙을 마주한 그날처럼, 지금 내 마음은 너무나도 평온하다.
막상 저들의 면상을 보고 있으려니, 남아 있던 감상마저도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서 저들은 이제 인간이 아니다.
"표류자 놈. 평소와는 다르게 말이 없구나."
"그러게 말이오. 지금이라면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우리를 회유해야 할 때이거늘."
"우리에게 살려달라고 빌어나 보거라!"
"으하하하하!"
군중에 속한 것들은 집단적인 행동을 따르기 쉬우며, 충동적이고, 단순한데다, 편협하다.
집단의 수라는 하찮은 근거 아래. 현실을 왜곡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군중 심리의 늪에 빠진 것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뒤틀려 버리고, 결국 우발적인 행동을 자제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내 앞장서서 저 표류자의 사지를 끊겠소. 그대로 거리에 매달아 두면 볼 만 하겠구만!"
"내가 나서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카를 자네라면 충분히 믿을 만 하지."
"백작, 후딱 끝내고 오시오!"
푸른색을 띈 흑발의 남성, 카를 임페리아. 프라시스 가문의 방계, 임페리아의 가주.
묵직한 검기를 날려대는 프라시스와는 다르게, 검을 활용한 근접전이 특기인 가문.
그들의 쾌검에는 심상이 더해지기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깊은 검상이 남아버린다.
카를 임페리아는 붉은 양탄자의 절반 지점까지는 걸어오더니, 순간 무릎을 굽혔다.
그의 전신에는 마력이 돌기 시작하고, 내 마법을 의식하여 정면에는 쉴드를 두른다.
"하아아아!"
한 차례 기합을 내지르고 달려오는 카를.
신체를 강화했기에 분명 빠르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의 움직임이 또렷하게만 보인다. 숲속에서 사력을 내던 윤흠서나, 평소 대련에 어울려주는 기사단장에 비하면 훨씬 느리다.
거기다 엔크라테아에 접하고 있는 탓일까. 시원한 마력이 내게 밀려옴과 동시에,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내 머릿속에 정보로 가공된다.
'저 인간은 군중 심리에 취해 나를 무시하고 있다. 자기 쉴드를 믿고 정면으로 올 것이다.'
'저 속도면 계단 밑에서 오른쪽 다리로 축발로 점프. 네 번째 계단을 왼쪽 다리로 딛는다.'
'군중이 가장 동요할 만한 방법으로...'
카를과 나 사이에 가상의 직선을 긋고, 그 위에 존재하는 네 번째 계단에 마력을 흘린다.
알현의 홀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기에, 카를은 기압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을 거다.
그리고 역시나.
왕좌의 단 바로 아래에서, 위쪽을 향해 쉴드를 전개한 카를이 축발을 내딛으며 외쳤다.
"각오해라아아!"
그의 검이 내게 닿을 리 없었다.
파앙!
"끄아아아악!"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카를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내 발밑에 엎어졌다.
챙그랑!
차오르는 격통에 놓친 검은 계단을 구르고. 내 사지를 자르겠다던 벌레는 몸을 웅크린다.
이미 사라진 무릎 아래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으... 으아아... 내 다리...! 다리가아아...!"
조소와 멸시로 가득하던 알현의 홀에는, 어느새 카를의 비명만이 가득 차버린 상황.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카를이 소리 질렀다.
"이시하...!"
"……."
"으아아악! 죽여 버리겠다. 이시하아아아!"
죽인다라. 한쪽 다리를 잃고, 검마저 놓친 카를이 절대로 실현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의 소리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
사실 카를이 앞장서서 내게 뛰어든 이유는 간단하겠지. 프라시스의 방계로서, 반란군 내에서 돋보이는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컸을 것이다. 교단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도 욕심에서 비롯한 일이니, 그야말로 자신의 본능적 욕구에만 얽매여 살아가는 짐승과도 같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어떠한 짐승이라도 맡은 바 역할이 존재하는 법. 나는 자신의 가치가 한없이 추락해버린 카를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려 한다.
나는 악을 쓰고 있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를."
"이시하아아...!"
"다음은 오른쪽이야."
"... 뭐?"
아픔조차 잊고 멍해진 카를이었으나, 그가 정신을 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카를은 오른 다리에 마력을 집중시켰고...
파앙!
나는 같은 방식으로 그의 오른팔을 날렸다.
내 얼굴에 그의 끈적하고 따뜻한 피가 튐과 동시에, 귀를 찢을 법한 비명이 내 귓전을 때린다.
"으아아아악!"
몸의 일부를 잃어 버린 카를은 또다시 꿈틀거렸고. 그 얼굴은 침과 땀, 그리고 피로 얼룩진다.
"살려 줘..."
"내 사지를 끊어 버리겠다며?"
"내가 잘못했어. 제발...!"
"네 사과는 그다지 필요 없어."
"아아아아악!"
그 뒤로도 파공음은 두 번이나 더 이어졌다.
그나저나...
"으어어어..."
이게 생명의 경이로움이라는 걸까. 사지가 잘린 카를은 목만 남긴 채로도 한동안 꿈틀거렸다.
'이래서 가축을 죽이거나 생선을 손질할 때는 단숨에... 라는 거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얻을 만한 깨달음이 있었다니.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일말의 고마움을 담아 카를의 목을 찔렀다. 그러자 카를의 육신이 마지막으로 펄떡 튀었고, 그 경련이 끝나고서야 축 늘어질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만약 카를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꼭 사람답게 태어나기를. 잠깐의 기도를 마친 나는 '수업용 스마일'과 함께 나머지 축생들을 내려보았다.
선두에 서 있는 짐승들의 리더, 발람은 검병에 손을 가져다 대고 내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으며. 다른 쓰레기들은 모두 얼 빠진 얼굴이었다.
…….
그런데 위에서 저 꼴을 보고 있자니 영 아니꼬웠다.
'저 병신들은 내가 카를을 죽이는 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구하기 위해서 발악이라도 해 보던가. 마법으로 견제라도 해 보던가. 아니면 최소한...'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내 마음속에서 저 새끼들을 벌레나 짐승이라 부르기도 힘들어졌다.
나는 이 세상의 찌꺼기들을 향해 고했다.
"의리조차 없는 찌꺼기 새끼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구나.
내 입에서 나온 한 마디의 온도는 말하고 있는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싸늘했다.
하지만 나머지 말을 꼭 해야 할 것만 같았기에,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짐승이나 벌레조차 동료애 쯤은 있다. 네놈들이 적어도 짐승이나 벌레라도 되려면, 마지막에 카를이 편히 죽도록 목숨을 끊어 주기라도 했어야지.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는 봐줬을 텐데..."
""…….""
내 말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알현의 홀에 들어선 모든 찌꺼기들의 얼굴은 얼빠짐을 넘어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었을 뿐이다.
'지금은 내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어.'
내가 굳이 카를을 잔인하게 죽인 이유는, 저기 있는 군중들에게 여러 암시를 남기기 위함이다.
'공작은 손 하나 까딱 않고 마법을 쓸 수 있다. 마력 장벽을 전개하여도 신체 부위가 터진다. 턱 앞까지 칼이 들어와도 끄떡하지 않았다...'
내 연출은 저 찌꺼기들에게 암시를 남기고, 이 암시는 내 약점을 가려주는 포장지가 되어 준다.
예를 들면, 내가 방금 시전한 마법은 3미터 안에서 5초의 준비 시간이 필요한 결함 마법이지만, 저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무영창, 시전거리는 불명, 원리도 불명, 징조도 없이 신체를 터뜨리는 마법이라면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
'이제 기세는 완전히 내 쪽으로 넘어왔다.'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검집을.
나는 붉은 양탄자 위에 붉은 점과 붉은 선을 남기며, 왕좌의 단에서 한 층씩 내려갔다.
한 칸, 두 칸, 세 칸, 네 칸...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내 마법을 경계하고 있는 걸까.
이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 걸까.
계단을 내려와 양탄자 위를 걸어 나가니, 적들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한 사람은 달랐으니, 발람이 홀로 선두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겁에 질리지도 않았고, 침착한 눈으로 나를 관찰하며 한 수를 노리는 중이다.
'아쉽네. 조금만 더 뒤로 갔으면 좋았는데.'
아무리 썩었어도 발람은 사대 가문의 가주. 이 상태로 맞붙는다면 질 수도 있다.
…….
뭐. 그래도 어쩔 수 없겠지.
지금은 가능성 따위에 망설일 때가 아니다.
내가 이런 상황을 만든 연유는 발람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기 위함이었지 않나.
나는 목표 지점까지 차분하게 나아갔다.
그렇게 나와 발람 사이의 거리가 20보 정도가 되었을 즈음.나는 그에게 고했다.
"발람."
"무엇이냐."
"네 뒤에 있는 그 찌꺼기들은 전부 제쳐 놓고 우리 둘이서 결투는 어때."
"이시하. 내게 또 개수작 부릴 생각 마라. 내게 그럴 이유가 어디 있다고."
"또 개수작이라. 내가 언제?"
"……."
개수작이라... 발람은 입을 닫아버렸지만, 내가 생각나는 개수작이란 단 하나뿐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개수작을 준비했다.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내 발밑 어딘가에 엔크라테아를 가져다 대자, 홀을 지탱하는 기둥 과반수에 새하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둥들은 조금씩 진동하면서, '우우우우웅!'거리는 공명음을 내뿜었다.
"마법진!?"
"무... 뭐라고!"
그 순간, 홀 전체가 강렬한 빛에 휩싸였고.
"테크니 특제 폭발 마법진이야. 각자 생존해."
"이시하... 네 노오오...!"
콰쾅!
발람의 고함은 거대한 폭발음에 지워졌다.
그렇게
나는 알현의 홀 절반을 날려 먹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