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202화 (202/215)

〈 202화 〉 2­165. 마음의 상처

* * *

2­165. 마음의 상처

에우데미아 왕국과 헬렌 교국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두 나라를 왕래하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큐리어스 골짜기, 통칭 별이 떨어진 골짜기다.

동쪽으로는 에우데미아의 왕도 아레트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황룡 산맥이, 서쪽으로는 헬렌 교국의 교황청에서부터 시작하여 올라오는 이브 산맥이 우뚝 솟아오른 이 골짜기는, 유서 깊은 역사가 담겨 있다.

하지만 무릇 역사에 기쁘고 찬란한 부분이 있다면, 슬프고 어두운 면도 있는 법. 필레몬 국왕과 어거스트 기사단장, 그리고 왕궁부장 카일 티오리아는 슬픔만을 되새기는 이곳에 다시금 오게 되었다.

새벽녁에 도착해서인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 계곡에는 서늘한 별빛만이 내리깔려 있다.

말에서 내린 필레몬 국왕이 말했다.

"벌써 12년이 흘렀군."

"... 예. 폐하."

큐리어스 협곡은 헬렌 교국으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황룡 산맥은 점점 낮아지고, 반대로 이브 산맥의 기세가 점점 높아진다. 지금 이곳은 중간 지점으로, 양쪽으로 솟은 산맥의 높이가 서로 비슷한 수준이다.

그때와 변함없는 웅장한 풍경을 보며, 끝없는 후회가 다시금 차오르는 필레몬 국왕이었다.

그는 몇 걸음 앞으로 걸으며 떠올렸다.

'나는 이미 틀렸어.'

'부디 이 아이를 지켜줘.'

'내가 못준 사랑만큼, 너와 루시아가 사랑해줘.'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한곳에 멈추었고,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지면의 흙을 훑었다.

"정확히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에스더로부터 리아를 받아 냈고, 등을 돌려 도망쳤지."

"……."

"그날의 기억이 언제나 머릿속에 남아 있었네. 내가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에스더와 함께 맞서 싸웠더라면. 아니, 애초에 헬렌 교국의 정치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에스더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필레몬 국왕에게 한 사람을 잃은 상처는 너무나도 깊었고, 슬픔과 후회 같은 어두운 감정은 그 상처를 짓누르고 있었다.

국왕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친위대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 하는 도중, 어거스트 기사단장과 카일 왕궁부장이 어렵사리 말을 꺼내었다.

"폐하의 탓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했던 제 탓이지요. 그때의 제가 조금이라도 더 강했다면..."

"어거스트 경. 판타스매터를 왜 재앙이라 부르겠습니까. 우리 중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

"폐하. 에스더 님께서는 폐하와 공주 전하를 지키기 위해 남으셨습니다. 이렇게 낙담하신다면 에스더님을 뵐 낯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국왕은 힘없이 일어나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그의 가족을 앗아간 재앙이 풍채를 자랑하며 서 있던 곳. 12년이 지난 지금도 그 광경은 또렷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 기억에 못지않게 필레몬 국왕의 마음속엔 커다란 무언가가 자리 잡았으니, 그것이 국왕의 상처를 덮어 주고 있다.

필레몬은 카일에게 고했다.

"카일."

"예."

"그래도 참 다행이라 생각하네."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그 맹랑한 친구와 자네들이 나를 속였던 그날이 먼저 떠오르니까."

"……."

자신이 주인 되는 국왕을 속이다니. 카일은 갑작스러운 말에 절로 긴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맹랑한 친구라. 카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고, 그를 떠올리자 내심 안도하게 되었다. 희미한 웃음이 나오는 건 그 사기극에 참가했던 친위대들도 마찬가지.

일행의 분위기가 완화되자, 국왕이 너털웃음과 함께 말했다.

"하하. 온몸에 피칠갑하고 나타나서는 리아가 납치 당했다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뻔한 연극이었네만, 그래도 당시에는 속을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도 드네."

"참. 알면서 보는 저로서도 소름 돋았으니까요. 처음 봤을 때는 그저 멀쩡한 친구였는데. 보면 볼수록 미친놈이란 생각뿐입니다."

"자네. 그게 혹시 칭찬인가."

"어찌 보면 칭찬이겠군요."

"자네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줄 알았는데?"

"주변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헌데 다른 분들께서는 좋다고 봐주고 계시니, 저라도 날뛰어야겠지죠. 싫은 건 아닙니다."

"... 그렇군."

국왕으로서는 절반은 진심, 나머지 절반은 카일을 떠보고 싶었다. 집무실에서 날뛰는 티오리아 부자를 보며 조금은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카일의 어조에서 미움은 느껴지지 않으니, 국왕은 한층 더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말해두겠네. 카일. 그가 이 세상에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껏 아이들을 마주하지 못했겠지. 이게 내가 그를 믿는 이유라네."

"폐하. 저도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의문이 듭니다. 정말 그 재앙이 나타날까요?"

"그런 사소한 일 따위는 상관없다네."

"……."

"무엇이 나타나건 이기고 돌아가면 되니까."

그녀를 향한 추모는 여기까지. 지금 이 순간부터 돌아가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리 다짐한 국왕이었다.

그 순간. 마른하늘에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골짜기 아래로 콰쾅! 하고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벼락이 남긴 빛의 저편으로, 거대한 인간의 형상이 비추었다.

"저건...!"

벼락소리에 놀랐는지, 아니면 불길한 기운을 느꼈던 건지. 산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날짐승들은 하늘을 날아 도망쳤다.

희미한 별빛이 가득하던 하늘에는 어느새 먹구름이 자리를 메웠고, 그사이에서 먼지처럼 내린 검은 기운이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전투를 준비하라!"

필레몬은 등에 걸친 대검을 뽑아 들고, 어거스트는 거대한 방패와 한 손 검을 꺼내 들었다.

­ 쿠쿵!

또 한 번 대지에 울리는 천둥소리.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것은 형상이 아닌 실체.

하늘을 뒤덮은 오만, 티폰.

그것의 상체만을 본 자가 있다면, 인간의 이상적인 미美를 빚어낸 조각상이라 말할 것이다.

가슴팍의 근육과 복근이 돋보이는 상반신, 그로부터 뻗어 나온 우람한 팔뚝은 골짜기 양쪽의 산맥을 짓누르며 거구를 지탱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의 머리만을 본 자가 있다면, 인간의 존엄을 능멸하는 악신상이라 말할 것이다.

인간의 감각 기관이 있어야 할 안면에는 그 흔적과 근육만이 존재하고, 머리 위에는 화염과 번개를 내뿜는 백 마리의 용이 꿈틀댄다.

실체화한 티폰은 대지에 뱀처럼 똬리를 틀었고, 그것이 어깨 위로 난 더러운 날개를 펼치자, 희미한 별빛이 비추던 대지는 어둠에 잠기었다.

기사단장은 방패에 마력을 두른 채 앞장 섰으며, 카일은 지원 부대를 이끌었다.

"자네들과 함께 싸우는 것은 오랜만이군! 그때처럼 내가 선두에 선다. 폐하를 원호하라!"

"예!"

"지원 부대! 광원 마법을 사용하라!"

"예!"

십수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한 친위대는 금세 대형을 갖추었고. 그들을 믿는 국왕은 언제나처럼 심상을 가다듬으며 전진했다.

반면, 그 모습을 본 티폰은 얼굴의 뒤틀린 근육만으로도 조소하는 표정을 만들어 냈다.

가히 신에 필적하는 존재로서, 미물들이 어떤 발광을 하더라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미물들을 농락하기 위해, 백 마리 용 중 하나를 땅에 떨어뜨린다.

­ 쿠웅

이내 티폰의 그림자에 떨어진 용은 검은 마력으로 화했고, 아지랑이처럼 꿈틀대던 그것은 수십 마리 짐승들의 상을 띄었다.

판타스매터.

근원을 본따 만든 에코니아, 그 대지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 창조주가 남긴 모조품. 그야말로 근원의 대척점에 선 존재들.

티폰은 그 판타스매터를 스스로 낳은 것이다.

[ 으음... ]

입 없는 티폰이 침음하는 듯한 소리를 내자, 추악한 본성만을 품고 있는 짐승의 모조품들이 국왕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1파! 온다! 방패는 속도 유지! 법사들은 목표물이 유효 사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대기!"

기사단장의 호령에 국왕을 둘러싼 친위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누군가는 마법을 영창하고,

누군가는 충격에 대비하고,

누군가는 무기를 다잡는다.

이 와중에도 그들의 행군 속도는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았으니.

그 중앙에서 성검 아레트를 쥔 필레몬 국왕은 마음속으로 떠올렸다.

왕도를 떠나기 전, 아끼는 딸의 말을.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고, 아샤는 언제나 제 곁을 지켜 주고,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고, 시하 선생님도 함께 있는 지금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 자신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바로 함께 삶을 살아가는 매일이다.

잊고 있었던 당연한 삶이 행복이다.

그 당연한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

그에게 정답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모든 악과 위협을 쳐부수리라..."

그의 중얼거림과 함께, 필레몬의 전신과 성검 아레트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 으으... ]

그렇게 별빛이 사라진 대지에 새로운 빛이 떠오르자, 티폰은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없었고, 그저 자신이 저런 희미한 빛에는 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티폰은 그 자리에서 아흔아홉 마리의 용들 중 둘을 땅에 떨어뜨렸고, 다시금 그 용들은 검은 마력으로 화해 짐승들의 상을 띄웠다.

"2파가 온다! 다시 마법을 준비하라!"

하지만 근원을 추구하는 존재들은 예상보다 강했으니, 그 뒤로도 티폰은 용을 떨어뜨렸다.

세 마리.

"3파! 이제 심상 마법까지 동원한다!"

네 마리.

"4파!"

다섯 마리.

"이제 거의 다 왔다! 마지막 한 번!"

도합 열다섯 마리의 용을 희생시켰지만, 근원이 빚어낸 인간들은 모든 위협을 뚫어냈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황금빛은 점점 그 밝기를 높였고, 자신을 위협하는 수준이 되었다.

[ 으으읍 ­ ]

자신이 낳은 모조품으로는 안 된다.

그리 판단한 티폰은 날개를 퍼득이며 머리 위로 난 용들이 뿜어내는 화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순간.

심상을 가다듬은 필레몬 국왕이 어거스트 기사단장의 앞으로 나섰고. 그는 티폰을 올려다보며 자세를 다잡은 뒤, 판타스매터의 화력과 견줄 생각으로 기다렸다.

"와라..."

그 한 마디에, 티폰은 격노했다. 하늘을 뒤덮은 오만 그 자체인 자신의 앞에서 저런 오만함을 보이다니. 자신도 역시 순수한 힘만으로 승부를 내기로 했다.

[ 우우우우웅 ­ ]

공명음과 함께 티폰의 용들은 브레스를 발사했고.

"하아아압!"

필레몬 국왕은 기합을 내지르며 성검을 휘두르자, 별빛도 숨은 이 공간에 황금빛이 전율했다.

춤을 추듯 쏟아져 내리는 불과 번개.

춤을 뚫고 나아가려는 한 줄기의 빛.

두 마력은 끝내 충돌하였고, 굉음이 사람들의 귓전을 때린다.

하지만 점점 티폰의 화력은 빛에 밀렸고.

한 줄기 빛무리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티폰은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렸다.

아...

그때...

.

.

그 어떤 때보다 높은 출력으로 심상 마력을 쏟아 낸 필레몬 국왕은 가픈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폐하. 해내셨습니다!"

"엄청난 화력이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 조금 쉬기만 하면 돼. 사상자는 없나?"

"부상조차 없습니다. 우리의 완승입니다!"

"……."

대재앙 티폰은 꼬리만을 남긴 채 소멸. 친위대 전원 생존. 부상마저 없음. 분명 카일의 말대로 대승이었다.

하지만.

필레몬의 마음속에 있는 이 찝찝함은 뭘까.

"왜지."

"왜 그러십니까. 폐하."

"……."

'이런 재앙에 고전할 에스더가 아니었다.'라는 한 마디가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자신이 아무리 '행복'을 위협하는 존재에게 강한 에우데미아의 왕족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그녀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에스더가 이런 재앙에 고전했다니. 필레몬의 마음에는 왠지 모를 허망함과 찝찝함이 교차하듯 떠올랐다.

그가 고뇌하는 사이, 기사단장이 제안했다.

"폐하. 재앙의 잔재가 있는 곳에는 하급 재앙이 출몰하기 쉬우니, 골짜기에서 이탈하여 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

"폐하?"

"... 그래. 그러세."

아직 발람이라는 위협이 건재하다. 괜한 말을 꺼내서 병력의 사기를 꺼트릴 수는 없다. 그리 생각한 필레몬은 애써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카일이 물었다.

"다미아 평야는 잘되고 있을까요."

"루시아와 제드로, 거기다 기사단이 갔다면 괜찮을 거다."

"하긴 두 사람이 있으면 잔챙이는 몰살이니..."

그들의 대화에 어거스트가 끼어든다.

"이렇게 폐하와 걸으며 대화하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나는군요."

"흐흐. 자네가 산적 부락을 습격했을 때 말인가. 아니면 친위대에 막 들어왔을 때인가."

"둘 다 입니다."

"허허허..."

그렇게 두 사람과 대화하며 걷자, 필레몬 국왕은 방금 전 느꼈던 찝찝함과 걱정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친위대원이 무심코 말했다.

"근데. 조금 이상하지 않냐?"

"뭐가."

"왜 하늘이 안 개이냐."

"... 그러게?"

그렇다.

아직 이 대지에는 빛이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필레몬 국왕이 내뿜던 심상 마력의 빛이 사라졌기에, 친위대는 마법사들이 내뿜는 광원 마법에 의지해 걷고 있었다.

"설마...!"

필레몬 국왕을 비롯한 중진이 가던 길을 마다하고 돌아보자, 저 멀리에 보이는 티폰의 잔해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지금쯤 사라져야할텐데, 필레몬의 심중에 의아함을 더해지는 그 순간.

­ 틀렸어...

대지에 어떤 목소리가 울렸다.

"... 뭐?"

"틀렸어?"

"뭐야. 뭐가 틀렸다는 거야."

"내가 말한 거 아냐."

국왕을 비롯한 친위대의 웅성거림이 커짐과 동시에, 티폰의 잔해 주변에 또다시 어두운 티끌이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폐하. 일단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한 번 더 할 수 있네."

"허나..."

"아니. 지금 끝장을 봐야 한다. 저 위협을 남기고 돌아갈 순 없어. 당장 전투 준비."

국왕이 단호하게 말하자, 기사단장은 다시금 친위대에 알렸다.

"전원. 전투 준비!"

"예!"

"전진하라!"

다시 형성되는 방진.

'조금 전처럼. 한 번만 더...'

아직 체력 부족에 시달리던 필레몬 국왕은 눈마저 질끈 감고, 침착하게 심상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국왕의 심상 마력이 빛을 다시 뿜어낼 즈음.

"적 재생 확인!"

"머리 위에 있던 용 몇 마리가 없는데?"

"그래도 형태는 같다. 속도를 유지하라!"

"어...?"

"잠깐. 저거 얼굴이 이상한데?"

"막 꿈틀거리잖아..."

티폰의 안면 근육이 꿈틀거리더니, 누군가의 형상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얼굴은...

어떤 여성의 형상이었다.

"... 뭐야."

"저럴 수가..."

"왜."

"... 입 다물어! 전진한다!"

경악하는 친위대원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은 국왕은 적의 형태를 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심상을 가다듬는 데 집중하고 있기에, 적의 모습 따위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 지켜줘... ]

한 여성의 목소리에.

필레몬은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필레몬의 눈에 들어온 것은...

[ 사랑해줘... ]

사랑하던 아내, 에스더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 짓지 않고 있었다.

"이... 이..."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이 왜곡되고 짓밟혀간다.

그의 상처를 덮고있던 무언가가 떨어져나간다.

또다른 무언가가 크나큰 상처를 헤집어버린다.

차마 말을 잊지 못 하는 필레몬에게, 티폰은 에스더의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절규했다.

[ 틀렸어... ]

나는 전지하며, 전능하노라.

[ 지켜줘... ]

나는 너희 피조물들의 위에 있노라.

[ 사랑해줘... ]

나는 모든 것을 기만하는 오만이노라.

에스더의 얼굴이

필레몬을 비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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