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203화 (203/215)

〈 203화 〉 2­166. 마음의 상처 (2)

* * *

2­166. 마음의 상처 (2)

오만.

스스로를 높여 모든 것의 위에 서고, 동시에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업신여기는 심상.

특히 감정과 마력이 긴밀하게 엮여 있는 이곳 에코니아에서, 그 뜻은 더 넓게 확장된다.

무릇 한 존재의 오만함이란 이루 셀 수 없는 부정의 심상을 낳고 또 조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오만을 쓰러뜨리기 위해, 이곳 에코니아에서는 오직 '두 가지 공략법'이 존재한다.

악신에게 도전하려는 자는 '티끌 하나 침입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심상'으로 맞서거나.

어떤 부정의 심상으로도 더럽힐 수 없을 만큼, '텅 빈 존재'가 되어 오만에 맞서야 한다.

.

.

하늘을 뒤덮은 오만, 티폰은 루시아의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 틀렸어... ]

너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으리라.

[ 지켜줘... ]

너는 과거 속에 묻혀 사라지리라.

[ 사랑해줘... ]

너의 심상이란 그만큼 하찮은 것이니.

결국 내 앞에서 좌절하게 될 것이리라.

필레몬은 눈앞의 경멸스러운 재앙을 거부하고 또 부정하기 위해 심상을 끌어 올렸다.

그의 전신에서는 한층 더 밝은 빛이 뿜어나오기 시작했고, 기사단장은 계속 전진한다.

그러나 티폰은...

날개를 퍼덕이며 불꽃과 번개를 토해낼 준비를 해야할 거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없었다.

[ 틀렸어... ]

[ 지켜줘... ]

[ 사랑해줘... ]

그저 필레몬이 사랑하던 에스더의 목소리로, 그녀가 내뱉은 말들을 왜곡할 뿐이었다.

참다못한 필레몬 국왕은 다시금 앞으로 나섰고, 에스더의 얼굴을 띄운 추악한 악신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자세를 잡았다.

이제 필레몬이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순간. 그가 귓전을 때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마지막 갈무리를 하려던 그때.

­ 쿠쿵.

티폰의 그림자로 용의 머리들이 떨어졌다.

"마지막 발악으로 졸개를 빚어낸다!"

"폐하를 엄호하라!"

국왕의 옆으로 나서는 기사단장과 친위대들. 하지만 그들도 잠깐 멈추어설 수밖에 없었다.

돌연 골짜기에 별빛이 내렸기 때문이다.

"... 뭐지."

"정지! 정지하라!"

이게 무슨 조화일까.

필레몬 국왕 역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전황을 살피고 있을 무렵, 티폰의 그림자에 떨어졌던 머리들이 산화하여 공중으로 치솟았다.

[ 사랑해... ]

그리고 이어지는 티폰의 중얼거림은 하나의 영창이 되어, 12년 전 그날의 별빛을 흉내 내었다.

그러나 그 별빛은 더 이상 밝지 않았으니. 탁하고 더럽혀진 별빛이 대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네... 놈...!"

악신은 죽은 에스더의 기억을 모욕하더니, 이제 그녀의 별빛마저 능멸하려고 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필레몬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하아아앗!"

그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고, 체내에 담겨 있던 심상은 검을 타고 세상에 뿜어져 나왔으나...

이미 악의로 더럽혀진 별빛처럼 그의 빛 역시 순수하지 못했다.

'아.'

필레몬 국왕도 그 미세한 차이를 깨달았다.

그래도 내심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마력의출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탁한 정도가 아주 심한 건 아니었으니까.

심상 마법 사용자라면 누구나 가끔 겪을 수 있는 상황.평소라면 황금빛의 찬란함에 탁함이 상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못했다.

"우웁...!"

대기 중에는 티폰이 내뿜는 부정한 기운... '디버프'로 가득 차있었고, 타락한 마력 일부는 왕의 체내로 역류했다.

마력은 그대로 체내의 장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겼으며, 필레몬 국왕은 코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주저앉아 버렸다.

"폐하!"

"치유사! 어서 폐하를!"

"에... 옛!"

국왕이 쏘아낸 희미한 빛은 이미 탁한 별빛에 잡아먹혀 버렸고.

"방패! 나를 따르라!"

상황을 알아차린 어거스트 기사단장이 방패와 별빛으로 뛰어들었다.

"크헙!"

쇄도하는 별빛은 방패에 부딪혀 양 갈래로 흩어졌고, 친위대는 어거스트 기사단장의 뒤에 한데 모여 국왕을 지켰다.

"어거스트, 조금만 더 힘내시게!"

"폐하. 괜찮으십니까. 어서 약초를...!"

1초가 1년처럼 느껴지는, 억겁과도 같은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전신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어거스트는 곁눈질로 국왕의 상태를 확인했다.

풀려 버린 눈 아래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으며, 얼굴은 창백해진데다 입술 마저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방금 그 증상은 틀림없는 마력 역류. 신체의 고통에 더해 정신에도 타격이 있었을 터.

'치유사와 카일이 응급처치를 하고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렇게 된 이상...'

어거스트가 말했다.

"폐하만큼은 지켜야 한다! 내가 후미에 남겠다. 친위대 전원 후퇴하라!"

"어거스트 경, 괜찮겠소?"

"그딴 걸 따질 때가 아니지 않소. 카일, 어서 빨리 폐하를!"

어거스트의 일갈에 뒤늦게 정신 차린 카일.

암살과 지휘가 특기인 자신이 아니라면 이 전장에 손이 남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가 신속히 국왕을 들쳐업으려던 순간...

친위대의 뒤편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의 해방을 위하여!"

"저들의 이 땅에서 해방 시켜라!"

"시작의 땅의 국왕을 죽여라!"

"와아아아아!"

눈을 돌리면 골짜기의 입구에서 해방교단의 신도들이 개떼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저... 썩을 놈들."

"이백. 아니 삼백..."

"수가 너무 많아!"

"여기서 다 같이 죽는 건가."

"……."

죽음이라는 단어는 소란의 중심에 있는 친위대에게 뜻밖의 침묵을 선사했다.

사실 교단 신도들이 달려오는 모습만 봐도, 분명 훈련된 병사는 아닌 듯하다.

하지만 무기. 체력. 마력. 심력. 마법진...

이미 친위대는 두 번의 교전을 치러냈기에 어느 정도 자원을 소모해버린 상황.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 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거스트와 카일의 눈이 마주쳤다.

두 눈은 분명 끝을 직감하고 있으나, 동시에 무언가를 부정하고 싶은 듯 보인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카일이 먼저 골짜기의 입구를 향해 등을 돌렸다.

"내가 적을 교란시킬테니, 돌파 진형을 갖춰라."

한 손에는 짧은검 한 자루를, 다른 한 손에는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검은 마력의 채찍을.

카일 왕궁부장이 태세를 정비하자, 어거스트 기사단장은 그 반대편으로 시선을 향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거스트 자신이 모든이의 방패가 되어야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뒤는 내게 맡기고, 모두 진형에 합류하라."

하지만 그의 각오를 비웃기라도 하는 걸까.

어거스트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반인반수의 괴물이 아직까지도 웃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죄악을 낳는 원초의 죄악,

모든 피조물을 멸망케 할 궁극의 죄악.

하늘을 뒤덮은 오만, 티폰은 '너희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비웃고 있다.

그것이 또다시 용을 떨구자, 짐승의 모조품들이 다시금 그림자에서 태어난다.

어디 한번 도망쳐보라는 듯,

어디 한번 이겨내보라는 듯,

어디 한번 극복해보라는 듯.

아직까지도 에스더의 얼굴을 띠고 있는 티폰은 뒤틀린 표정으로 히죽거렸다.

* * *

잔해 사이에 주저앉은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진 먼지를 툴툴 털어대며 일어났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기침이 나왔다.

­ 쿨럭. 쿨럭.

하지만 그 기침 소리가 내 귀에 들리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귀가 먹먹한 탓이리라.

먼지 섞인 침을 퉤 하고 뱉은 뒤 침을 꿀꺽 삼키자, 조금이나마 귀가 뚫린 느낌이다.

나는 곧장 청각의 상태를 살폈다.

"아. 아아아아..."

"아아..."

이제 잘 들리네.

폭발 마법을 자주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고막을 보호하는 쉴드까지 치게 되었다.

이것도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근거겠지.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 알현의 홀에 채광창을 뚫어 버렸네...'

에딘 특제 폭발 마법진은 내 생각보다 강했다.

원래라면 알현의 홀 천장의 절반 정도만 날려 먹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왕좌 바로 위에 있던 천장이 살아남아 준 덕에 왕좌는 무사했다.

덕분에 크고 작은 왕좌들은 쨍쨍한 햇볕을 받으며 평생 못해 본 일광욕을 즐기시는 중인데...

이렇게 폐허가 된 홀을 보고 있으려니, 못돼 처먹은 아기 공룡의 대사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성능 확실하구만."

테크니 가문의 마법진도 성능이 확실하긴 하지만 이 방법 자체가 효과적이었다.

이곳에 있던 찌꺼기들은 내가 감히 알현의 홀을 터뜨려 버릴 줄은 몰랐을 테니까. 상대의 허를 찌르는 완벽한 전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래도.

전술 하나로 전쟁에서 이기는 건 아니랬지.

지금은 하늘이 깨끗한 걸 보면, 아직 왕도 공방전의 메인 이벤트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나는 건물 잔해 밑에 깔려 있는 찌꺼기를 확실하게 치우기 위해 물줄기를 흘려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오오오오오!"

돌연 기합 소리가 들리더니, 잔해 사이에서 칠흑의 검섬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흩날리듯 퍼지는 건물의 잔해, 그것과 함께 뛰어오른 누군가... 그가 공중에서 몸을 비틀더니, 칠흑의 검섬 몇 줄기가 내 발끝에 꽂혔다.

'역시나. 저 새끼는 살아 있었구나.'

그 정체는 바로 발람. 그는 반 토막난 기둥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착지한 뒤 외쳤다.

"이시하아아아!"

"뭐. 왜. 뭐."

"네가 감히 알현의 홀을 터뜨려...!?"

"몰라. 네 것도 아닌데 왜 지랄이야. 그리고 네가 결투를 받아줬으면 터뜨리지도 않았어. 이거 전부 네 탓인 거야."

"개소리를..."

나는 가볍게 대답한 뒤 하던 일을 계속했다.

공중에서 날린 검기는 내 마법을 견제할 속셈이었을 테고, 지금은 숨 고르기도 바쁘니까.

그리고 발람의 주목적은 따로 있을 테니...

나를 공격할 여유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찬 물에도 안 깨어나면 이미 죽은 거겠지."

"……."

"썬더 볼트."

역시나.

본인을 따르던 찌꺼기들이 죽어 가고 있음에도, 발람은 나를 멍하게 내려다 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읊조렸다.

"이 미친놈..."

"어릴 때부터 그런 소리 자주 들었어."

어린 시절 괴물 놈에게도 들었고. 중학교 시절 자칭 일진들에게도 들었다.

하지만. 사회부적응자들에게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면 오히려 인간으로서 합격 목걸이를 쥐는 셈이지 않나.

그 사실을 깨달은 뒤로, 나는 나를 미친놈이라 부르는 무리들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의 발람 역시 사회부적응자이므로 나는 미친놈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발람. 언제까지 시간을 끌 속셈이야?"

"……."

"여기 찌꺼기들은 네 본대가 아니잖아. 적어도 주교급 정도 되는 놈이 네 뒤를 봐주고 있겠지."

"... 흥. 미안하지만 그게 바로 지금인 것 같군."

"뭐?"

호랑이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내가 발람을 추궁하는 사이, 왕도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집을 잡고 있는 나로서는 단순한 먹구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정한 심상을 가득 품은 부화기다.

아니나 다를까. 그 먹구름에서 부정한 심상 마력이 꿈틀거렸고, 내부에서 실체화한 괴물들이 왕도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발람이 나를 비웃었다.

"흐흐. 아무리 네놈이라도 이건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이거 전부 게임에서 나온 짓인데.

거기다 대사마저 게임 속 주교를 따라하다니.

악당놈들이란 상상력이 부족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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