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2169. 조력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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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9. 조력자들.
겨우 정신을 차린 뒤 주변을 둘러 보면...
이곳은 언젠가 필레몬 국왕이 왕실의 비고로 내려갈 때 지났었던, 왕좌 뒤편의 준비실.
내 등 뒤의 벽화에서는 시조와 초대 성녀가 사이좋게 낄낄거리며 나를 비웃는 중이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발람과의 결투에서 거의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등장한 검은 채찍에 맞고 한참을 날아온 게 이곳이다.
한바탕 구른 탓에 온갖 집기는 엉망이 되어 버린 상황. 내 옷과 몸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자, 입에서 쿨럭기침과 함께 피가 튀어나왔다.
'에이. 설마.'
확인차 몸의 이곳저곳에 힘을 줘보는데, 타박상 징후가 조금 심할 뿐, 장기 손상은 아니었다.
... 그러고 보면 방금 날아오면서 혀끝을 씹어 버렸지.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피가 난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반쯤 벌어진 입에서는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입에서는 피 특유의 쇠맛과 함께 쓰린 감각이 올라왔다.
"우웨..."
나는 입안에 찰랑거리는 물을 토해냈다.
그리고 지렁이마냥 꿈틀거리며 품속의 치유 마법진을 발동시키자, 하얀빛이 퍼짐과 동시에 전신의 통증이 가라앉았다.
'날아오면서 신체 강화를 유지해서 이 정도지. 정신줄을 놨으면 아마 죽었을거야...'
그렇게 내 몸을 치유하고 있던 중. 이 방에 신하들의 뒷담 감지 기능이라도 있는 건지, 바깥에서 어떤 남녀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 헉. 허억... 왜 이제야 온 것이냐. ]
[ 이게 최대한 빨리 온 거야. 그나저나 발람, 너는 왜 그 꼴이 된 거야? ]
[ 저 표류자 놈이 알현의 홀을 개조해 두었다. 폭발! 불! 물! 번개! 얼음! 마법진이란 마법진은 죄다 설치해 두었다고! ]
발람이 추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저 말이 맞기는 하다.
이 세계의 자연 마법사는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며, 싸움의 순간에는 변화무쌍해야 한다.
나는 기사단장의 조언에 따라, 이곳 알현의 홀에 마법진을 300개 정도 깔아둔 상태였다.
국왕 내외가 출정을 나간 뒤, 한밤중에 나홀로 알현실에서 마법진을 깔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눈물이 다 나올 지경.
... 국왕 내외가 돌아와서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지만. 저 새끼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는 게 중요하지, 건물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지 않나. 별말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나저나. 거의 다 죽였는데 아깝네...'
마법진을 거의 전부 다 써서 발람의 체력을 깎아낸 상황이었다만, 갑자기 나타난 저년이 모든 것을 망쳤다.
[ 뭐. 여기 꼴을 보니, 엄청나긴 하네. 근데 결국 질뻔했다는 거잖아. 발람 프라시스 공작? ]
[ ……. ]
[ 그러게 왜 내가 침 발라 놓은 걸 먼저 건들인 거야. 싸우지 말고 붙잡아 두라고만 했잖아? ]
... 지금 내게 승산은 있을까.
대화를 들어 보기만 해도, 지금 저 여자의 무력은 적어도 발람과 비슷하거나 훨씬 강할 것이다.
그리고 방금 그 검은 채찍은... 내 방어 마법을 무시하고 통째 날려 버릴 정도이니, 심상 마법의 일종이겠지.
도대체 어떤 심상인지 모르겠지만,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적을 타격하는 부류로 보이는데. 가장 큰 문제는 나조차도 모르는 마법이란 거다.
그에 반해 내 상태는 어떤가.
준비해 둔 마법진은 발람에게 전부 써버렸고, 날려지면서 엔크라테아는 놓친버린 지 오래, 검과 검집은 둘 다 내 손을 떠났으며, 남은 건 치유 마법진 몇 개 뿐. 남아 있는 마력도 아슬아슬하다.
지금의 내 전력이라면, 저 여자에게 나는 중급 마법을 픽픽 쏘아 대는 과녁에 불과할 것이다.
…….
삼십육계 줄행랑이란 말이 있다.
비록 우리나라에선 '팬티런'이란 의미로 변질되었지만, 어디까지나 근본은 주위상(?上).
굳이 패색이 짙은 싸움에 몸을 던지지 말고, 일단 도망쳐서 다음 계책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일단 사법부장과 합류해야 해. 지금 같은 시기에 미모스 가문은 최강의 전력이 되니까.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도망쳐야 하지...'
막막한 생각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난장판이 된 준비실을 한 바퀴 둘러 보면, 여전히 등 뒤의 커다란 벽화가 내 신경을 벅벅 긁고 있었다.
시작의 왕, 아레트 에우데미아.
초대 성녀, 이비버스 헬레니아.
정원을 거닐고 있는 그들이 '이정도밖에 안 되면서 뭘 지키겠냐'라며 날 비웃고 있었기 때문.
그 꼴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자니
"혹시..."
정말이지 추한 발상이 떠올랐다.
풀뿌리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조와 초대 성녀의 손을 한 번씩. 필레몬 국왕이 보여 준 순서대로 짚어 보았다.
하지만...
"씨발."
당연하게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딴 식으로 비웃을 거면 도움이라도 되던가. 근원인가 뭔가까지 가서 신을 죽일 정도면 지들이 알아서 자손들을 더 잘 살게 해 줘야지. 왜 나한테 이런 지랄 맞은 웃음을 선보이는걸까.
내가 멍청하게 벽화에게 분풀이나 하고 있었더니, 바깥의 대화 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 불청객이 온 것 같네. 손님 맞이나 해 줘. ]
[ 내가 왜 네 명에 따라야 하지. 딜라일라. ]
[ 이제부터 나는 잠이 깬 꼬마를 상대해 줘야 하니까. 그래도 정 싫으면... 부탁이야, 발람? ]
[ 흥. ]
[ 그리고 난 그 이름 싫다고 했지. ]
[ ... 알겠다. 일리아드. ]
…….
내가 도대체 뭘 들은 걸까.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분명 현실, 방금의 대화도 역시 현실일 것이다.
하지만 저 대화를 듣고 나니, 현실감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낀 듯이 멍한 상태가 된 나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준비실을 나서면 제일 먼저 꼿꼿이 서 있는 옥좌가 나를 맞이하고,
그 너머 조각난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쓰레기들이 눈에 밟힌다.
"내가 찾아가려 했는데. 알아서 나왔네?"
목소리가 들려와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곳에는 어딘가 낯익은 변태 성녀가 있었다.
"네가 데릴라... 아니 딜라일라라고?"
"다 들었나 보네. 그건 내 예명 같은 거야. 웬만해선 본명인 일리아드라고 불러 줄래? 나름대로 소중한 이름이거든."
"하. 하하..."
절로 실소가 흘러나온다.
쉽게 믿을 수 없는 농담이 세 개나 겹치다니.
그리고 이 세 가지가 겹치고 보니 참 그럴싸한 농담이라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블레셋의 창녀가 헬렌 교국 최악의 성녀였다니. 거기다 시체가 돌아다닌다고. 어느 정도 말이 되는 소리여야 사람이 믿지."
"너도 믿기 힘들지? 나도 믿기 힘들어. 처음 되살아났을 때의 감각이란 정말이지 역겨웠다고. 살점 하나하나가 다시 모여 붙는 그 느낌이란, 엄청나게 추접스럽고 아파서 말이야..."
타락한 성녀는 그때를 추억하기라도 하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연히 나는 공감할 수 없었다. 되살아난다니, 그런 외도(外?)는 경험한 적도 없고, 목격한 적도 없으며, 상상한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을 이어 나가던 변태 성녀의 표정은 어느새 황홀함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뭐든 처음이 힘든 법이잖아. 죽었다 살아나는 것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꽤 짜릿한 경험이더라고. 당신이랑도 그 경험을 나누고 싶은데,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겠네."
"……."
"그 대신 우리 다른 경험을 나누자고."
아직도 내가 제정신은 아니지만, 한 가지 생각은 확실하게 떠올랐다.
저 미친년을 아이들과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
'에코니아 아포칼립스'의 히든 팩터. 모든 엔딩을 비극으로 한정지은 원흉.
... 내가 정녕 미쳐서라도 죽여야만 할 존재.
왕좌의 단에서 한 칸씩 내려가 한참 전에 죽은 카... 뭐시기의 검을 들었다.
그러자 변태 성녀는 애완동물에게 말하는 듯 나를 타일렀다.
"반항이라도 하려고? 그만두는 게 좋아."
동시에 성녀의 뒤편에 있던 검은 채찍이 허공에서 꿈틀거리더니 올가미의 형태로 변했다.
상대를 묶어놓고 즐기는 성적 판타지라도 있는 걸까, 저 인간은 여러모로 내 취향과 맞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취향도 취향인데...
윤리적인 문제도 약간 있는 것 같다.
"난 시체한테 박을 생각 없어."
들고 있던 검을 있는 힘껏 던진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 마력을 빠르게 소진할 방법만을 선택하며 창녀에게 달려들었다.
내 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신체 강화는 최대치로. 내가 쓰는 마법은 치명상을 주지 못할 것이니 크기만 최대한 키운 중급 마법을. 온몸의 뼈가 뒤틀려감을 느끼며 거대 빙창과 화구를 허공에 띄워 날린다.
"이거 참 실망이네!"
내가 던진 검은 성녀의 손에 내팽개쳐진다. 검은 올가미는 망치가 되어 얼음을 부수고, 다시금 방패가 되어 화구를 막는다.
세 가지 마법만으로도 마력 총량은 바닥을 보였고. 뜨거운 무언가가 내 혈관을 타고 흐르면서 토가 쏠리는 감각이 전혀져 온다.
'우읍...'
참아야 한다.
버텨야 한다.
사실 다른 생각은 필요 없다.
죽여야 한다.
이 생각만을 간신히 붙잡는다.
정신을 다스리던 마력이 점점 줄어들고 끓어오르는 열감이 머리까지 올라온 순간.
세상이 시뻘겋게 물들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시하는 한 가지 목표를 잊지 않았다.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저년만은 이곳에서 무조건 죽여야 한다.
머릿속에는 오직 죽여야겠다는 생각뿐.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시하의 몸은, 마음 한편을 채운 열감을 토해내듯 주먹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본 은발의 성녀는
"너는 그렇게 세상을 보는구나."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아이를 눈여겨 보듯, 순수하고도 싱그러운 웃음을 내비추었다.
"하지만. 너 혼자 쓸쓸하지 않겠니."
일리아드는 검은 채찍을 손안에 거두었다.
지금껏 사용한 마법은 그녀가 품은 심상의 극히 일부일 뿐, 성녀로서 일리아드의 본질은 전생에도 현생에도 언제나 사랑이었다.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사랑.
세상 모든 이들이 서로를 착취하지 못하도록, 자기 품으로 거두어 버리는 뒤틀린 사랑.
상대방의 의사를 묻지 않기에 매혹으로, 감정을 휘두르기에 채찍으로 화했을 뿐이었다.
성녀 일리아드는 불쌍한 아이를 감싸 안기 위해 오랜만에 그녀의 본질을 선보이려 한다.
그녀 앞에 당도한 시하가 주먹을 내질렀다.
"죽어...!"
저주와 함께 터져 나오는 검붉은 심상마력.
그를 똑똑히 바라보며 일리아드는 영창 한다.
"cappa Sancti Eliahld"
탁한 그림자가 퍼진 순백의 천이 그녀의 손안에서 넓게 펼쳐지며 시하를 감싼다.
자연의 섭리대로라면 연약한 천 조각이 걸쭉한 화염에 불타올라야 정상이겠지만...
한 겹.
두 겹.
세 겹.
네 겹.
순백의 천은 계속해서 겹쳐졌고, 검붉은 불꽃은 점점 사그라졌다.
* * *
일리아드의 '부탁'에 발람은 알현의 홀을 뒤로하고, 왕궁 본관 앞뜰로 나왔다.
하지만 불청객이 벌써 코앞까지 닥쳐 온 탓인지, 병사들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피해는 어떻게 되나."
절망에 빠져 있던 일반병들의 눈에는, 발람이 지옥을 벗어나게 해 줄 동아줄처럼 보인다.
살아남은 몇몇이 그의 곁으로 모였다.
"자... 장군!"
"오셨습니까!"
"아군 병력 절반이 당했습니다."
"... 그 정도면 싼 편이군."
검을 뽑아 든 발람은 병사들의 앞으로 나섰다.
맞은편에는 회색 수염을 흩날리는 초로의 노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그의 존재감은 단신으로도 이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피고인. 발람 프라시스."
사법부장, 아론 미모스가 '물들지 않는 정의'를 바닥에 내려찍자
쿠웅
빛에도 어둠에도 물들지 않은 회색의 마력이 본성 앞뜰에 널리 퍼져나갔다.
"내란죄로 재판을 시작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