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207화 (207/215)

〈 207화 〉 2­170. 조력자들 (2)

* * *

2­170. 조력자들 (2)

사법부의 수장, 아론 미모스.

분명 그는 80세에 접어든 노인에 불과하지만, 이곳의 누구도 그를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아니. 되려 겁을 먹었다고 보는 게 옳겠지.

2미터를 넘어서는 장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단련된 신체. 주변을 압도하는 잿빛의 마력.

내려찍은 판결봉에는 그 어떤 더러움도 깃들지 않았으나, 길게 흩날리는 잿빛 수염에는 피가 잔뜩 튀어 있었으니. 적들의 눈에는 그가 자신들을 벌하러 온 귀신으로만 보인다.

... 그의 이명은 미모스 가문의 나찰. 정의라는 망치를 휘두르는 귀신이다.

"내란 뿐만이 아니지..."

아론 미모스가 읊조리자, 그의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잿빛의 마력은 한층 더 강해졌다.

"네놈들에게는 외환外? 혐의도 있으니, 단단히 각오해 두어라."

노인은 정의봉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란죄. 그야말로 국가의 존립과 질서를 위협하는 중죄. 법치 국가의 근간을 뒤흔드는 악행.

외환죄. 외세와 결탁하여 나라를 뒤집어엎으려는, 이 또한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행위...

그 어떤 죄보다 엄중하게 처벌되는 두 가지 죄목이 겹친 이상, 죄인들의 죽음은 이미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그들이 여기서 선처를 구한다 해도, '얼마나 자비롭게 죽일 것인가'에 대한 논의만 이루어질 것이다.

발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표류자 놈만 아니었어도...'

어차피 자기 발밑에 모인 귀족들이 쓸모 있을 거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이 나라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사대 가문이나 왕가에 맞서 싸울 때는 하등 도움이 되지 못했겠지.

그래도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싸우다 죽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법. 발람은 적어도 귀족들이 맞서 싸우다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랫것들은 이미 폭발로 죽어 버렸고, 자신도 시하의 덫에 빠져 체력을 소진한 상태.

이제 싸움의 성격은 스스로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게 아닌,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바뀌었다.

"하아아압!"

발람의 검과 몸이 흔들리고, 아론 미모스가 한 걸음씩 발을 뗄 때마다 무수한 검섬이 날아갔다.

검섬에 깃든 마력이 잔상을 남기고, 사대 가문의 두 수장 사이에는 칠흑의 실이 거듭 겹쳐진다.

하지만 검섬은 전부 막혀 버린다.

아론의 주위에서 재로 변해간다.

오른손으로 망치를 질질 끌고 있는 그는, 잿빛 마력이 담긴 왼손으로 검섬을 쳐내 버린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아론이 다가갈수록 재는 더더욱 피어오른다.

이따금 참격이 잿빛 마력을 뚫고 들어갔지만, 그때마다 옷자락이 찢어지고 붉은 선 몇 개가 더 그어질 뿐.

오히려 아론의 상체에 새겨진 무수한 전투의 흔적이 드러나고, 상처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나찰의 모습에 발람군의 사기만 떨어져 간다.

'이대로는 안 된다...'

검섬을 날려대길 반복하던 발람은

­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린다.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마음속에 그리며,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론 역시 판결봉을 다잡았다.

상대는 어디까지나 내란을 일으킨 대역죄인.

... 어떤 이유를 붙이던 선처할 수 없는 대상.

'완벽한 자세'를 취한 두 사람은 서로의 '온전한 심상'을 세상에 내보인다.

밀도 높은 칠흑의 마력과 잿빛의 마력이 부딪치고. 충돌 지점에서는 잿가루가 사방에 퍼졌다.

"으읍."

검을 휘두른 발람이 눈을 가린 찰나.

폭연 속에서, 상체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상처가 난 아론이 거구를 날리며 등장했다.

"발라아아아암!"

"... 젠장."

아론이 망치를 휘두르자 퍼억 ­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발람은 한참 동안 땅을 굴렀고, 이내 그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체에서 피가 철철 흘리는 아론은

"잠시 자고 있어라. 발람..."

남아 있는 병사들에게 흉흉한 눈을 돌리며 읊조렸다.

"이들부터 먼저 처리할터이니."

"히이이익!"

"장군의 생사를 확인하라!"

"죽기 살기로 싸우자!"

그 뒤로 귀신의 망치가 휘둘러질 때마다

발람군의 육신이 튀어 오르고 짓이겨졌다.

* * *

같은 시각.

별이 떨어진 꼴짜기, 큐리어스 협곡.

"필레몬 국왕을 죽여라!"

"와아아아아!"

죽여도 죽여도 또다시 몰려 오는 해방 교단.

친위대는 두 번째 무리까지 전부 해치웠으나, 곧 골짜기 입구의 능선에서 세 번째가 내려왔다.

그 대부분은 에우데미아의 복식을 입고 있는데. 개중에는 수인, 동방의 무사, 에퀼리아 복식의 용병, 심지어는 교국의 신민도 보인다.

교단은 쉽게 길을 터주지 않겠다는 듯, 포위망을 두텁게 유지하며 병력을 투입하는 상황.

친위대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으아악! 저 미친놈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거의 세 번째 병력인데. 끝이 보이질 않아..."

몇몇 친위대가 숨을 고르며 말하자.

상반신만 남긴 채 바닥을 기어 다니던 도마뱀 수인의 숨통을 끊은 한 사람이 말했다.

"숫자는 문제가 아니야. 저 자식들 하나같이 눈이 돌아 있어."

그의 말대로였다.

해방교단의 교인들은 각자 출신은 다르지만,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들은 전부 미쳐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도마뱀 조심해라. 제대로 머리를 뚫어 버리라고. 윗통만 남은 채로 기어 다니면서 눈깔을 굴리고 있잖아."

""…….""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은 침묵했다.

무릇 감정이란 전염되는 것이다 보니, 그에게도 광기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마뱀을 조심하라던 친위대의 왼쪽 팔에는 무언가에게 물어뜯긴 자국이 있었고, 흰 뼈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옷과 무기에는 온통 피 칠갑이 되어 있고, 눈빛에는 날이 선 상태.

그런 그들을 선두에 있던 왕궁부장, 카일 티오리아가 잠시 돌아보았다.

온몸에 적들의 피를 칠한 그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카일..."

"아니. 그게..."

카일은 친위대를 한 사람씩 살피더니, 도마뱀 수인의 시체 위에 서 있는 남자에게 약초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거의 다 왔다. 정신 차리고. 너는 잠시 후위에서 네 상처나 돌보고 있어. 그꼴로 나섰다가는 짐만 된다."

"갑자기 무슨... 어라?"

허공의 약초를 놓쳤버린 친위대원.

그제야 그는 자기 상처를 확인하고 미친 듯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하아. 저거 좀 어떻게 해줘라."

"알았네. 자네는 괜찮나?"

"... 괜찮아야지."

카일은 치유사들의 들것에 실려 있는 필레몬 국왕을 돌아보았다.

창백함을 넘어서 잿빛으로 변해가는 얼굴. 축 늘어진 듯 보이는 전신.

고통에 찬 신음 소리는 아직 그가 삶을 놓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준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하면 폐하는...'

어떻게든 출혈은 잡아냈지만, 회복이 더딘 이유는 아마 부정의 마력 때문이겠지. 국왕을 구하기 위해서는 왕도의 대성당까지 가야만 한다.

생각을 마친 카일은 다시금 앞으로 나섰다.

"거의 다 왔다! 단숨에 간다!"

""예!""

이윽고 스스로 미쳐 버린 교인들이 들이닥치고, 처절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뚫어내려는 자. 막아서는 자.

반쪽이 되버린 방패로 진열을 유지하던 방패병은 미쳐 버린 왕국민들을 내려찍는다.

이가 전부 빠진 칼을 던져 버린 병사는 신체 강화의 힘으로 수인과 개싸움을 벌인다.

희미해져가는 정신을 붙잡은 마법사들은 고가의 스태프로 쓰러진 적의 머리를 친다.

심상이 피폐해진 치유사들은 이 상황에도 들것 위의 필레몬 국왕을 포기하지 않는다.

왕궁부장인 카일 역시 이미 한계에 달한 친위대의 선두에서 분전했다.

심상의 채찍으로 적들을 쳐날리고 자신의 애검으로 인간의 목만을 정확히 노린다.

허나. 누구보다 대인전에 자신 있는 카일이라도, 모든 적을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다.

쉼없이 움직이던 카일을 포착한 에퀼리아의 용병 사수가 그에게 마도총을 겨눴고

탕!

카일의 상체가 기울었다.

"윽..."

"부장!"

"카일!"

난전 속에서 전열까지 나와버린 마법사가 마지막 한 방울을 짜내 사수를 저격했고, 다른 친위대원이 그의 상처를 살핀다.

"괜찮으세요!?"

"아직 괜찮다. 움직일 수 있어..."

애검을 들던 어깨에 남은 손가락만한 구멍.

'내가 쓰러지면 모두가 죽는다...'

카일은 즙에 진통 효과가 있는 아스피 풀을 상처에 쑤셔 박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모인 친위대는 필레몬 국왕과 카일이 왕자 시절부터 모아온 정예 중의 정예.

지금껏 인생을 살면서 모든생사 고락을 함께 했지만... 한날 한시에 죽는다는 헛된 로망 따위, 카일은 단 하루도 품어본 적이 없다.

"전군, 전진!"

"전진하라!"

"폐하를 지키며 전진하라!"

그런 그들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골짜기 입구에서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교단 사제가 확성 마법으로 외쳤다.

"이제 놈들은 지쳤다! 총공격이다!"

"와아아아아!"

지금껏 처리해온 수만큼 새로운 교인들이 공세에 뛰어들자, 희망의 끈을 겨우 붙잡고 있었던 친위대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아..."

"능선 위에 병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허. 허허. 어이가 없네."

"저 미친놈들. 이렇게까지..."

카일 역시 선 자리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루시아 누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호리아...'

국왕을 지키지 못한다는 자책감.

반려보다 먼저 떠난다는 미안함.

남겨진 아이들을 향한 걱정...

생의 절반을 그림자로서 살아온 카일이지만, 그 절반은 나머지 절반의 삶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시간. 그렇기에 평범한 삶은 카일에게 너무나 소중했다.

그렇게 그가 옛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파아아앙!

멀리서 대기를 찢는 파공음이 골짜기를 채웠다.

그 소리에 놀란 카일이 눈을 뜨자, 웬 빛이 골짜기 입구로부터 하늘을 향해 치솟는 중이었다.

"저게... 뭐지?"

"카일. 방금 저 지휘관놈이 죽었다."

"뭐라고?"

카일의 의문에 옆에 있던 노장이 답했다.

하지만 카일로서는 그 대답을 쉬이 믿을 수 없었고, 노장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믿을 수는 없지만 저 빛에 사라졌어."

"……."

카일을 비롯한 왕실 친위대원들.

능선을 타고 진격해오던 교인들.

재앙의 파도에 맞서던 기사단장.

심지어 참극을 관람하고 있던 오만까지...

모든이의 시선은 골짜기의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수상한 조합의 두 사람이 나타났다.

먼저 땅딸막한 키, 각 잡힌 에퀼리아제 슈트, 한쪽 눈에는 외알안경을 착용한 노신사... 그의 손에는 각 잡힌 서류 가방 하나와 리볼버 한 정이 들려 있다.

그는 누군가를 가르치듯 말했다.

"페이지. 이 세상에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안쓰러운 존재들이 있다."

"네. 리베르테 스승님."

그런 노신사를 스승이라고 칭한 여인의 이름은 페이지. 마찬가지로 에퀼리아제 슈트를 빼입고 있으며, 말끔하게 말아 올린 머리와 큰 테 안경은 그녀의 꼼꼼함을 대변하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기 키보다 큰 콘트라베이스 케이스를 등에 메고 있다.

그리고 수업은 이어졌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으며, 선동당하기 쉽고, 남들 눈치만 보며 스스로 노예가 되어가지. 그리고 결국 그 노예들은 다른 멀쩡한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는 일에 이용당한다."

"네. 새겨 듣겠습니다. 스승님."

"그리고. 오늘의 나는 리베르테가 아니다."

고개를 갸웃거린 페이지는 금세 고민을 마치고 노신사의 호칭을 바꾸었다.

"... 네. 점주님."

"그래. 오늘의 나는 지나가던 상인일 뿐이지."

흡족한 웃음을 내보인 리베르테... 어느 양복점의 점주는, 골짜기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끼는 점원을 돌아보며 명했다.

"저 노예들을 삶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어라."

"알겠습니다. 점주님."

쿵.

점원의 악기 케이스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그 안에서 거대한 학살병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합 여섯 개에 달하는 은색의 총신.

이어진 거대한 몸통에는 한 발 한 발이 중급 마법에 필적하는 마탄집에 꽂혀져 있으니.

현대에서 넘어온 표류자들이 이 마도구를 본다면, 틀림없이 '미니건'이라 칭할 것이다.

이내 '미니건'의 빛나는 총끝은, 능선 아래의 미쳐 버린 교인들에게로 향했고...

"발사."

여섯 개의 총신에서 지옥불이 쏟아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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