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 2171. 조력자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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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1. 조력자들 (3)
점원 페이지가 빗자루를 천천히 쓸듯 총구를 움직이자, 골짜기에는 화염의 비가 내렸다.
그걸 본 교인들의 발은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마탄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직격당한 자는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며 산화하고, 혹시라도 간발의 차로 피했다면 이어지는 폭발에 삼켜져 버린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잔뼈가 굵은 한 교인이 외쳤다.
"치고 올라가! 이대로는 개죽음이다! 저 새끼들을 죽여!"
그 외침을 들은 한 양복점의 점주, 리베르테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를 비웃었다.
"할 수 있다면 해 보라지."
노신사는 입고 있는 수트에 걸맞는 기품 있는 발걸음으로 발을 옮긴다.
"저 늙은이부터 죽여!"
화염의 비를 뚫어낸 몇몇 교인들이 그를 덮치려 들지만
파아앙!
노신사의 리볼버에서는 마탄 한 줄기가 실을 남기며 뿜어져 나왔다.
처음 골짜기를 가득 메웠던 빛줄기에 비하면 초라한 정도였지만, 달려드는 불나방들을 처리하기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선두에 섰던 교인의 미간에는 바람구멍이 나버린다.
그 뒤로도 노신사는 공원에 산책을 나온 듯 가볍게 걸으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교인들에게 마탄을 한 발씩 꽂아 넣었다.
잠시 넋을 잃고 있던 카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저 노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미치광이들을 죽이는 데 협력해주고 있다.'
생각을 마친 카일은 친위대에게 명했다.
"화망을 피하며 전진! 지금이 기회다!"
"와아아아!"
해방 교단은 진퇴양난의 늪에 빠졌다.
앞에서는 잔뜩 독이 오른 친위대가, 뒤에서는 빛과 화염의 총탄이 그들을 조여 오기 때문.
상대방을 해하여 죽이겠다는 광기보다, 자신이 먼저 죽게 된다는 공포가 그들을 덮쳤고. 의지를 잃은 광신도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이후 켜켜이 쌓인 시체들을 밟으며 노신사가 친위대의 앞으로 다가왔고. 어느새 학살을 위한 마도구를 쏘아대던 점원 아가씨도 노신사를 뒤따랐다.
노신사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이쪽은 정리가 됐구먼."
그 말인즉, 두 사람의 목표는 해방교단의 처리였지, 국왕을 해하려 온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카일로서는 압도적인 무위를 뽐낸 노신사의 앞에서 경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귀하께서는 누구신지요. 이런 마도구를 다루실 정도라면..."
"흐음. 나를 기억하지 못 하는 게냐. 티오리아의 꼬맹아."
"그게 무슨..."
"하긴 어릴 적에 봤으니 기억 못 할 만도 하지. 지금은 비켜라. 너희 국왕의 상태를 보아야 하니."
카일은 이미 40세 근처의 중년. 꼬맹이라는 말을 들을 나이는 아니다. 그런 자신을 꼬맹이라 칭하며 '기억하지 못하냐'니.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카일을 자연스럽게 제친 노신사는 국왕이 실려 있는 들것으로 향했다.
"녹괴 놈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상성이 안 좋다는 게 이런 뜻이었군."
그의 한 마디에, 한 치유사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만을 상대함에 있어 마음속의 상처는 크나큰 약점이 된다. 심상을 쏟아 내는 순간 찰나의 빈틈이라도 보인다면, 오만이 내뿜는 마력이 그 사람의 심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거든."
"……."
노신사는 품속에서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티오리아의 꼬맹아."
"저를 부르신 겁니까?"
"여기 티오리아가 달리 있느냐."
"……."
"수면 효과가 있는 약재가 있다면 모두 꺼내거라."
"... 예?"
카일은 노신사의 말을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대화의 흐름에 따르면 국왕에게 사용하기 위한 약재들을 꺼내라는 거겠지.
하지만 애써 삶을 붙잡고 있는 환자에게 함부로 그런 처방했다가는 영원한 잠에 빠질 수도 있다.
그의 고민을 짐작한 노신사가 말했다.
"체내에서 오만의 마력을 제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모든 마력을 개워 낸 뒤 온전한 제 심상으로 마음을 다시 채우거나. 순수한 마력을 지닌 자가 타락한 마력을 몰아내주거나. 허나, 후자는 교국의 고위 성녀 정도가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하지만 전자는 도박이지 않습니까."
"그래. 도박이지. 하지만 시간이 없다. 지금 여기서 더 지체하면 필레몬은 죽는다."
"그걸 어떻게 단정하시는..."
"나도 떠나 보내 봤으니 아는 게다."
"……."
자기들보다 앞서 다른 사람을 떠나 보냈다니, 노인의 담담한 한 마디에 친위대는 침묵했다.
잠시 고민하던 카일은 품 안을 뒤적이더니, 뜯어진 천 조각 하나를 꺼내며 암울한 기색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하필 전투 중에..."
노신사가 애써 챙겨 온 마법진이 의미를 잃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마력을 전부 비워 내는 것은 일시적인 마력 탈진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로, 적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타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조치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수면 마취. 마력 탈진 환자를 기절시키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저희도 남은 게 없어요..."
"진통제까지 전부 써버렸어."
다른 이들도 품을 뒤져 보지만, 고된 전투를 거친 그들에게 약재가 있을 리 없다.
노신사는 참담한 분위기를 살피더니, 자신의 악우를 생각하며 중얼거린다.
"야단 났군. 원래대로라면 에갈 그놈과 같이 도착했을 터인데..."
그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자, 골짜기 안쪽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음의 주인은 티폰.
대재액이 칠판을 긁는 듯한 소음으로 절규하자, 골짜기 전체가 다시 한번 전율한다.
"저게 우리를 가만 둘 리 없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티폰은 지금껏 인간을 가지고 놀았을 뿐. 이제 저놈은 사력을 다해 우릴 죽이려 들 것이야."
"그렇다면..."
카일은 저 멀리 기사단장의 방향을 응시했다.
어거스트는 수십체의 재앙 사이에서 방패를 휘두르며 고전하는 상황.
그 역시 힘이 다해가는지, 방패를 뒤덮고 있던 마력광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설상가상이라는 걸까.
쿵...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티폰의 발치에 또다른 재앙이 탄생한다.
이번엔 거구의 덩치를 지닌 환수. 일전에 시하 일행이 쓰러뜨렸던 힐데스비니의 축소판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은빛으로 불타오르던 준족과 엄니가 칠흑으로 물들어 있다는 점이겠지.
쿵 쿵 쿵 쿵
자신을 낳아준 어미의 절규에 응답하듯, 갓 태어난 환수는 땅을 울리며 어거스트를 향해 달려든다.
"전선이 무너지면 안 된다. 페이지!"
삽시간에 전황을 파악한 노신사가 아래로 몸을 날리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어깨가 뒤로 잡아끌렸다.
"크헙!"
"어르신!? 누구냐!"
카일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그곳에는 친위대 중 그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 소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복장은 이 전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 시커먼 조리복과 조리모는 영락 없는 요리사의 모습이었다.
입은 마스크에 가려져 있지만, 샛노란 눈동자와 초록색 뾰족귀가 그의 종족도 알려 준다.
'고블린...?'
카일이 검을 잡은 채 멍하게 있는 사이, 눈앞의 고블린이 말했다.
"내가 간다. 페이지. 따라오거라."
"알겠습니다. 어르신."
서로 구면인 사이인지, 고블린은 노신사의 제자를 데리고 아래에 향했다.
노신사는 그런 그들의 뒤에 대고 소리 지른다.
"이 녹괴 놈아! 이제 오면 어쩌자는 게야!"
"아는 분이십니까?"
"그래. 알다마다."
오늘은 이상한 사람을 셋이나 만났구나. 뜬금 없는 생각을 하던 카일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 어거스트!"
"걱정마라. 저 녹괴 놈은 잔챙이들을 도살하는 데 도가 튼 놈이니. 그 시간에 이놈 걱정이나 해라. 이놈이 깨지 않으면 우린 여기서 다 죽는다."
"……."
"... 아차! 그러고 보니 저 녹괴 놈이 수면제를 전하지 않고 갔구나! 야이, 녹괴 놈아! 돌아와! 돌아오라고오!"
카일의 시선은 어거스트와 필레몬, 그리고 고블린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갔다.
검은 쉐프복 차림의 고블린은 벌써 자신들이 건너온 길의 절반 지점에 당도한 상황.
'지금 내가 저 고블린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어깨엔 구멍이 뚫렸고, 피로감에 전신이 비명을 지르는 상태다. 저 싸움에 잠시라도 끼었다가는 짐이 될 게 뻔하다.
하지만 그는 결심을 굳혔다.
"제가 수면제를 받아 오겠습니다."
"네 몸이 그 꼴인데. 가능하겠느냐?"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제가..."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카일."
누군가가 카일의 말을 끊으며 나타났다.
그 사람은 카일도 잘 아는 사람...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호리아. 여긴 어떻게...?"
그 정체는 약초원장, 호리아 티오리아. 왕도에 있어야 할 카일의 아내였다.
그녀의 뒤로는, 평소 약초원의 치유사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살수의 복장으로 동행하고 있었다.
"약초를 전부 쓴다는 생각으로 여기 계신 분들을 치료해 드려.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수하들에게 명을 내린 호리아는...
노신사의 앞으로 가 무릎 꿇고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들의 뜻을 모르고 제가..."
"그랬구나. 우릴 미행하던 자들이 너희였어."
"죄송합니다."
"……."
왜 호리아가 친위대를 구해 준 노신사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건가. 거기다 미행이라니.
카일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착잡한 표정의 노신사는 호리아에게 물었다.
"죽은 이는 없느냐."
"네. 다행히 맞붙기 전에 어르신께서 오해를 풀어 주셨습니다."
"다행이구나. 저 녀석의 눈이 돌아갔더라면 너희 중 절반은 사지를 잃었을 게야."
"……."
끔찍한 소리를 담담한 어조로 토해낸 노신사는, 들것 옆에서 마법진을 잡으며 말했다.
"상황은 얼마나 들었느냐."
"재앙의 정보에 대해서는 대부분 들었습니다. 도착하면 수면약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도..."
"그래. 어서 빨리 너희 국왕에게 투여해 봐라. 시간이 없다. 이게 마지막 수단이다."
"저도 돕겠습니다."
카일은 호리아와 함께 필레몬 국왕의 상처를 치유했고, 마지막으로 수면 약을 투여했다.
이후 노신사가 국왕의 심장 부근에 마법진을 발동시키니, 그곳으로부터 찬란한 황금빛과 함께 탁한 어둠이 몰려나왔다.
노신사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 녀석의 의지에 모든 것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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