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209화 (209/215)

〈 209화 〉 2­172. 조력자들 (4)

* * *

2/11(금). 새벽 공지.

주말 중에 전회차(2­171)와 이번 회차(2­172)의 내용 수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여기서 새로 내용이 추가되진 않습니다.

다만, 금일 업로드된 회차 일부가 전회차에 나오는 게 흐름상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약간의 '내용 교환'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주시면 될 듯 합니다.

이전에 짜둔 플롯대로 적고 보니 영 어색한 부분이 생겨버렸네요.

제 글을 항상 먼저 찾아주시는 독자님들께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수정 후에는 작가 후기와 댓글에 내역을 남겨두겠습니다.

2­172.

잠시 시간을 돌려...

국왕 일행이 전장에 막 도착했을 무렵.

고블린 쉐프와 양복점의 노신사 그리고 점원 페이지는 새벽의 산길을 걷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불만스런 사람이 있었다.

"녹귀 놈아.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냐."

바로 양복점의 노신사, 리베르테였다.

"그래. 그 표류자 놈이 별나긴 하지. 그런데 그 새파란 놈의 헛소리만 믿고 나를 끌어내? 그것도 여기 에우데미아 왕국에서?"

"……."

"말해 봐라. 도대체 그 헛소리를 왜 믿는 것이냐.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게야?"

고블린 쉐프는 60년 동안 알고 지낸 친구의 질문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신사는 답을 듣길 포기할 정도로 마음 너른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는 오랜 친구의 심기를 건드릴 말을 내뱉었다.

"에갈리테. 아직도 그 케케묵은 복수심에 찌들어 있기라도 한 거냐? 스승께서는 분명 잊으라 하셨다. 당신께서 간직하고 계셨던 꿈을 우리에게 맡기셨고, 앞으로 나아가라 하셨어! 그런데 이제 와서, '티폰'이라는 단어에 눈이 돌아가서 어쩌자는 게냐. 드디어 노망이라도 든 게야!?"

노신사 역시 스승이 그립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는 이 그리움의 크기는, 감히 키 작은 초록색 친우의 것에 비할 수 없으리라.

스승으로부터 공평한 사랑을 받았다 해도, 스승의 그림자는 친우의 마음속에서 훨씬 더 크게 남아 있을 게 뻔하니까.

그걸 알기에 이런 말을 하면 반응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이상하게도 초록색 친구는 아무런 말도 없이 길을 걸을 뿐.

한 층 더 답답해진 노신사는 친우를 약칭으로 불렀다.

"에갈. 이놈아. 말이라도 해 봐라. 이곳에서 숨죽이고 살아 가야 할 판에, 왜 이런 터무늬 없는 일에 우리가 끼어야 하냔 말이다."

그의 마음이 전해진 탓일까.

고블린 노인이 가던 길을 멈추었고, 노신사를 향해 천천히 뒤돌았다.

"확실히 스승께서는 우리에게 꿈을 맡기셨지. 헌데 리베르테, 그 꿈은 우리가 이루기에 과분하지 않았나."

"……."

"우리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

두 친구는 이제 70을 넘어선 노인들, 언젠가 스승께서 돌아가신 그 나이에 근접해 버렸다.

꿈을 꾸기엔 너무나 늙은 것이다.

하지만 고블린 노인은 그 사실에 낙담하지 않았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드네. 나도 당신처럼 누군가에게 꿈을 맡기고 가야 하지 않았냐고. 리벨 자네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나."

"... 그건 부정할 수 없구만."

노신사는 제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 아이를 거두어 '페이지'라는 이름을 준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언젠가 리베르테라는 이름도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고블린 노인은 말을 이었다.

"헌데, 지금의 내 삶은... 그분의 뜻을 널리 퍼뜨리는 기분이 든단 말이지."

"……."

"요리는 모두에게 평등하다. 나로서는 스승의 꿈에 가장 가까워진 것이 지금이라네. 그러니 지금의 삶을 지키려면 은인을 도와야겠지. 이 정도면 썩 충분한 이유이지 않나."

노신사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그의 걱정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저 왜소한 초록 고블린 친구는 언제나 마음이 급했으니까.

하지만 친구가 저런 이유로 나선 것이라면, 노신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

네 뜻은 이해했으니 이제 갈 길을 재촉하자.

노신사가 그리 말하려는 순간, 그의 슈트 안쪽에서 강한 빛이 새어 나왔다.

"미행. 그것도 다수..."

"……."

두 친구는 순식간에 시선을 교환했다.

"리벨. 여긴 내게 맡기고 먼저 가게. 그 골짜기에 나타나는 것이 진정 티폰이라면 자네 도움이 더 절실할 테니."

"후딱 처리하고 빨리 오라고."

.

.

홀로 남은 고블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친구 앞에서 꿈 같은 거창한 말을 해버렸지만, 사실 그가 이번 일에 끼어든 이유는 실로 소박하다.

어릴 적 자신을 너무나도 닮은 한 아이.

그 아이가 비슷한 아픔을 두 번이나 겪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노인 역시 비슷한 아픔을 겪어보았으니까.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을 재차 겪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 않나.

'이런 이유라면 잠시 돌아가도 괜찮겠지.'

쉐프는 품속에서 휴대용 칼가방을 꺼냈다.

요리사들이 들고 다니는, 가죽을 펼치면 여러 칼들이 꽂혀 있는 그것이다.

"흐음..."

칼가방을 펼친 노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생사람을 헤쳤다가는 난감해질테니...'

노인은 폭이 넓은 식칼 하나를 꺼냈다.

본디 목적은 고기를 뼈째 토막 내는 것이지만, 싸움으로 치자면 방어에 적합한 칼이다.

그렇게 그가 준비를 마친 순간.

휙­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 여럿이 뒤편에서 들렸다.

노인이 뒤를 돌아보면 화살, 의료 침, 메스, 가위, 나이프. 심지어 펜촉이 날카로운 만년필까지.

쉬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투척물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을 죽이는 데 특화된 암기들.

'괜한 걱정이었구만.'

하지만 고블린 노인에겐 여유로운 상대다.

미세한 점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피하고.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쳐낸다.

노인이 짧은 팔을 휘저을 때마다 '채쟁!' 귀를 긁는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러던 중. 고블린의 노란색 형형한 눈이 색다른 물체를 포착 했으니.

'주머니...?'

삼지선다의 선택지가 머릿속을 스친다.

'피해야 할까. 막아야 할까. 아니면...'

전문적인 살수들은 독액이나 폭발물을 주머니에 넣어 던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단 하나뿐.

노인은 주머니에 충격이 전해지지 않도록 식칼의 각도를 시시각각 비틀며 속도를 줄였고, 적당한 때에 근처 숲속으로 날렸다.

나무에 부딪힌 주머니는 그대로 터져 버리고, 튀어나온 용해액이 주변을 부글부글 녹여 버린다.

'왕국에서 저런 독액을 다루는 곳이라면...'

사방에서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암기 속에서, 왜소한 노인이 외쳤다.

"티오리아의 두 번째 그림자. 약초원이 왜 나를 노리는 건가!"

잠시간의 정적.

그 정적을 뚫고 한 무리의 살수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갈색 머리 여성이 말했다.

"100년 전의 표류자, 엘렌 프라테르니테의 두 제자 중 한 분을 뵙습니다. 저는 약초원장 호리아 티오리아입니다."

"되도 않는 소개는 집어 치우게. 왜 왕실의 그림자인 자네들이 나를 노리는 게지!?"

"이유야 당연하지 않을까요. 어느 날 종적을 감춘 프라테르니테 클럽의 두 수장이 왕도에 잠입해 있었고, 마침 재앙 토벌에 나선 국왕군을 미행하고 계셨으니까요."

호라이가 뻔한 걸 묻는다는 듯이 답하자, 식칼을 잡은 노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이 떨림은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너희의 국왕. 필레몬을 죽이려 했다...?"

"네."

"대의회에서 네놈들의 선왕 파울로와의 대화를 주도했던 우리가. 그 아들을 죽이려 했다고?"

"과거야 어찌 되었건. 지금의 에퀼리아는 저희 왕국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이니까요. 저희로선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군요."

한시가 바쁜 지금, 정치질에 미친 그놈들에게 또 발목을 잡히다니.

노인은 속으로 분개했다.

거기다, 고블린 노인의 속을 끓어 오르게 만드는 요소는 하나 더 있었다.

"호리아. 네년은 제정신이더냐."

"……."

"주인을 잃은 그림자 주제에. 아이의 어미를 지키지 못한 주제에! 이제는 그 아비마저 사지로 보내 놓고, 그를 도우러 가는 우리의 발목을 잡으려 들어! 그 아이에게 같은 슬픔을 두 번이나 겪게 할 셈이더냐!"

"네...?"

"덤빌테면 덤벼라. 내 네년들을 전부 도륙 내고 큐리어스 골짜기로 향할 터이니!"

"큐리어스라면... 설마."

주인을 잃은 그림자. 큐리어스 골짜기.

이를 들은 호리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 * *

다시 현재로 돌아와 큐리어스 골짜기.

국왕의 처치는 끝마쳤지만, 카일의 걱정거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어르신, 괜찮을까요. 저희도 어서 어거스트를 도와 철수하는 편이..."

"꿈도 꾸지 마라. 오만은 한번 물은 먹잇감을 절대 놓치지 않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티폰이 만족할 때까지, 너희 국왕은 여길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지."

노신사로서는...

들것에 실려 있는 필레몬 국왕의 모습이 누군가와 겹쳐 보인다.

자기보다 강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오만의 앞에 섰던, 어느 당당한 여인의 모습.

그녀는 저 아래에 있는 고블린과 자신을 거두어 준 부모이자 스승이었다.

당신의 삶에 만족한다.

너희에게 꿈을 맡긴다.

티폰의 앞에 선 후유증으로 평생을 앓던 그녀는, 단 두 마디를 남기고 죽었다.

이렇듯 '하늘을 뒤덮은 오만'은 한 사람을 제물로 삼고, 그 주변인들의 불행을 즐긴다.

혹여 필레몬 국왕이 죽는다면, 이 나라에 자신과 에갈리테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을까.

노신사의 머릿속에서, 언젠가 자신의 의류점에 찾아온 손님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반자의 작은 자유를 바라는 꼬마 왕자와. 흘린 눈물을 애써 감추던 동방인 소녀...

"……."

그의 마음속에서

이 전장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졌다.

정신을 차린 노신사가 카일에게 전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나와 저 녹괴 놈은 언젠가 오만을 상대해 본 적이 있다. 지금 네놈들이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휴식과 재정비다. 죽은 미치광이들의 무기들 중 쓸 만한 것을 찾고, 마력을 조금이라도 더 회복하거라."

"하지만..."

"내가 말했지 않느냐. 저놈은 잔챙이들을 도살하는 데 도가 텄다고. 그저 지켜보기만 해라."

"……."

너무나도 당당한 노신사의 태도에 말문이 막혀 버린 카일.

그런 그에게 호리아가 귓속말을 해주었다.

"뭐라고?"

"... 그렇게 됐어."

"그 분이 도대체 왜 여기 있어?"

카일의 눈은 자연스럽게 전장으로 향했다.

.

.

고블린 노인과 점원 페이지는 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페이지."

"네. 어르신."

"나는 저 큰 놈을 처리한다. 가는 경로에 있는 소재앙들도 내가 처리할터이니, 나머지는 네가 정리하거라. 기사단장을 빼내어 치료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고블린 쉐프는 칼가방에서 긴 나이프 한 자루를 꺼내었다.

고기를 발골할 때 주로 사용하는, 칼날이 얇고 칼등이 휘어진 식칼이다.

'비록 전장을 떠난 지 10년은 더 지났지만...'

수석 쉐프 에갈리테의 실력은 그 시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전장은 요리와 같으니까.

"잠시 쉬고 있게나."

지쳐가는 기사단장의 옆을 지나,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든 고블린 쉐프.

그를 포착한 작은 재앙들은 일제히 달려들었으나, 고블린의 작은 체구에 이빨과 발톱은 전혀 닿지 않았다.

이후 고블린 노인은 소 형상을 한 재앙의 위에 올라탔고.

드르르륵!

뼈를 스치는 발골칼의 소리와 함께, 해체가 시작되었다.

노인의 칼은 오직 재앙의 신체 구조를 따라 자연스럽게 나아갈 뿐.

그 움직임에 한 치의 막힘도 없다.

살과 살 사이.

살과 뼈 사이.

뼈와 뼈 사이...

넓은 틈새로는 유려하게,

좁은 틈새로는 미묘하게.

모든 틈새로 자연의 천리(?理)를 따르는 식칼이 지나간다.

"꾸에에엑!"

칼에 찔린 재앙이 뒤늦게 노인을 들이 받으려 발버둥 쳐 보지만, 그 행동에 의미는 없다.

자신의 소멸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털썩

살점이 뼈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해체당한 짐승은 먼지처럼 공중으로 흩어진다.

고블린 노인은 멈추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그는 골짜기 저편으로부터 달려오는 신화 속 멧돼지를 향해 달린다.

도중에 몇몇 소재앙이 그에게로 달려들었지만

드르르륵. 털썩. 철퍼덕.

그가 지나간 길에 남는 것은, 산화하는 부정의 마력 뿐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