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210화 (210/215)

〈 210화 〉 2­173. 나쁘지만은 않았으니까.

* * *

2­173. 나쁘지만은 않았으니까.

왕도 아레트 북동쪽을 에워싼 황룡 산맥의 정상, 이곳에는 수상한 공간이 존재한다.

산꼭대기 치고 부자연스럽게 다져진 지면.

고산지대에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정원.

비좁은 돌틈 사이로 졸졸 솟아오르는 샘물.

거기다 마지막으로 아담한 오두막이 하나.

새하얀 구름이 사방을 둘러 싸고 있으니, 얼핏 하늘 위의 낙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두막의 한 남자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하아아암..."

신이 조형하기라도 한 듯 기다란 키와 미형의 근육이 자리한 몸.

뒤로 쓸어올린 금발과 은연중에 힘이 들어간 눈매에서 이 남자의 지엄한 성격이 엿보인다.

이내 기지개를 마친 남자는 느릿느릿 자리를 옮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샘물을 떠마셨다.

"언제나 변함없이 시원하군."

그가 샘물의 청량함에 작은 감탄을 내뱉는 사이, 바로 옆의 석판에서 진홍빛이 차올랐다.

남자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옮겨졌고, 빛이 꺼지자 그곳의 문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 황룡님. 왕도. 도와줘. ]

"흐음..."

하지만 남자로서는 탐탁지 않았다.

이곳 황룡 산맥에 발이 묶인지 어언 200년.

그녀라면 이유를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영 납득할 수 없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샤크티여. 이몸은 근원의 주인이 된 그대의 명에 불복할 수 없네. 하지만 내가 짊어진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대도 잘 알지 않나."

[ 황룡님. 빨리. 급해. ]

"그대 역시 오랜 기간 세상을 보았으니 알 것이야. 특이점이라 하여도 결국은 인간. 역사가 반복 되는 이유는, 그들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라."

[ 이번에는. 가야 해. ]

나름의 거절 의사를 표해 보지만, 연이어 자기 의견을 밀어붙이는 석판.

남자는 마지막 발악을 다짐했다.

"이백 년이 지나도 자네 성격은 여전하군. 그렇다면 한 마디로 내 마음을 움직여 보아라. 만일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그대의 명에 따르는 '척'만 할 수 있다고?"

타인을 설득하려면 많은 말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랜 삶을 살아온 이 남자에겐, 마음을 움직이는 한마디 말이 더 중요하다.

근원의 마녀는 그 한마디를 전했다.

[ 역사. 나쁘지만은. 않았으니까. ]

"흐음..."

역사는 결국 반복된다.

자신의 논리를 그대로 곁들인 그 한 마디에, 남자는 한동안 해야 할 말을 잃었다.

그를 재촉하듯, 석판은 또다시 빛났다.

[ 명령. 아냐. 부탁. ]

잠시 후.

남자는 정원 끝자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것이군."

에코니아에서 가장 높은 황룡 산맥에 서 있는 만큼, 그의 발밑으로는 하얀 설산이 펼처져 있다.

사람 발길이 끊긴 심산유곡이 온통 하얀 색으로 뒤덮인 이 풍경을 본다면, 어떤 사람이든 절경이라 평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수천 년간 살아온 남자에게는 지겹도록 봐온 똑같은 풍경일 뿐.

아무리 인지를 초월한 존재라고 하여도, 이런 밋밋한 생활에는 질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오랜만의 산책이라 생각한다면, 석판 너머 그녀의 제안은 반가워할만한 것이겠지.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문제는 없겠나."

그의 물음에 다시금 석판에서 빛이 흘러나왔지만, 그곳에 새로이 남겨진 문자는 없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는 뜻이리라.

남자는 산맥 아래로 뛰어내렸다.

* * *

대학 강의실.

상담심리 담당 교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전 시간까지는 다면적 인성검사, MMPI­2의 각 항목들을 배우고, 실습 삼아서 여러 검사도 해봤었지. 오늘은 검사 결과지가 나왔으니까, 다들 자기 걸 가져가서 한 번씩 확인해 보자. 먼저 곽동연..."

교수님은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고, 호명된 학생은 앞으로 나가 결과지를 받는다.

다른 학생들은 결과지가 사주 팔자나 타로점이라도 되는 듯, 하하 호호 웃으면서 서로의 결과를 공유하기 바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운세, 손금, 관상, 사주, 타로가 허구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런 걸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불안한 심리의 해소, 자신에게 부합하는 것만 같은 신기함의 비중이 클 것이다.

하지만 저 검사지는 567개의 문항으로 피험자의 거짓마저 잡아내는 연구의 산물.

'통계에 기반한 개소리'따위 보다는, 훨씬 더 정밀하게 인간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 그러니 보면 볼 수록 신기하겠지.

"다음. 이시하."

내 이름이 불렸어도 나가긴 싫었다.

저 종이에는 지금껏 내가 숨겨 온 추악한 내면이 기록되어 있을 테니까.

하지만 몸뚱어리는 그런 내 의지는 무시한 채 교수님 앞으로 나아갔다.

'역시나. 이건 꿈이구나...'

슬프게도.

나는 이 꿈의 결말을 알고 있다.

이제 교수님께서는, 자기감정을 최대한 숨긴 상담사의 얼굴로 말씀하실 것이다.

"시하야. 끝나고 연구실로 와라. 저번에 부탁한 장학금 추천서 다 써뒀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가려니, 후배들이 말을 걸어왔다.

"선배 또 장학금 타려는 거야?"

"어머니 부담은 조금이라도 덜어야지."

"와아. 부럽다. 저도 알려주시면 안 돼요?"

"야. 시하 선배니까 저게 되지. 우리는 안 돼."

"하긴. 나는 학점부터가 망했으니..."

저 아이들에게 나는 정상인으로 보일 것이다.

남들처럼 번듯하게 제 삶을 살아가는 일반인.

세상의 한 부분으로서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

모난데 하나 없이 제대로 돌아가는 톱니바퀴.

하지만 내 시선은 심리 검사 결과지의 몇몇 극단적인 지표로 향해 버렸다.

­ 반사회 : 매우 낮음.

­ 우울증 : 아주 높음.

­ 편집증 : 아주 높음.

­ 강박증 : 아주 높음.

­ 내향성 : 아주 높음.

……

­ 종합 소견 : 해석 불가. 추가 상담 필요.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해진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들로 하여금 나를 본다면 어떨까.

나 자신에게 크나큰 결함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그 기분이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걸 깨닫고 저 검사만은 속여보려 했건만...

…….

이제 교수님의 방에서는 여러 말을 듣겠지.

"시하야. 요즘 불편한 건 없니."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단다."

"힘들면 언제든지 찾아오거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교수님께서는 날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에서 이름난 심리검사만 예닐곱개 해 본 것 같은데, 결과가 전부 저모양 저꼴이였으니까.

겉으론 멀쩡한데 속은 위태로운, 폭탄 같은 사람이라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에이. 교수님."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때의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꿈속의 내 입이 멋대로 움직인다.

"저는 괜찮아요."

어찌 보면.

나는 폭탄이 아닌 곤충이지 않았을까.

아무리 외피가 단단해도 속은 물러터진 곤충.

그런 곤충들처럼, 나는 겉만 멀쩡했던 셈이다.

"힘든 일이라니요. 교수님들께서 친절하게 대해주시니, 요즘은 마음 편히 살고 있어요."

저걸 받는 순간 껍질에 금이 갈 것 같아서.

내 껍질이 약해지면 금방 죽을 것만 같아서.

내 속의 무언가를 남에게 토할 것만 같아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연민'을 차버려야 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걱정해주실 필요 없어요."

결국.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상담사의 얼굴을 띄우고 계시던 교수님은...

"하아..."

씁쓸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아니면 대학원 올래? 학비는 전부 장학금으로."

"교수님. 아무래도 그건 좀..."

교수님의 어림없는 농담에.

내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

.

내 어깨에 기댄 누군가가 말했다.

"오빠는 날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참...

오늘 꿈은 아픈 기억 특집인가 보다.

삶을 살다 보면, 떠올릴 때마다 힘들어지더라도 끝까지 간직해야 할 기억들이 생긴다.

그리고 이건 그런 기억들 중 하나다.

"... 미안."

어느 좁디좁은 원룸, 한 침대에 걸터앉은 두 사람의 대화.

나는 이 대화의 끝을 알고 있다.

나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 연애 상대였던 그녀는 내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지금 제일 힘든 건 오빠겠지. 속으로 자기 탓을 엄청 해댈 게 뻔하니까."

상대방을 이해해주는, 객관적으로도 따뜻한 한 마디.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저 말을 듣고 이별을 결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지?"

"……."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 관계를 그대로 이어 나갔다간, 오빠만 더 힘들어질 테니까."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서로의 이유는 180도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고통을 염려 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이 말을 끝까지 꺼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오빠는 자기 괴로움은 끝까지 숨기면서 날 사랑한다 했을 거야."

"……."

"그러면서 오빠는 온갖 이유를 붙여 가며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겠지. 하지만 그건 내가 바라는 미래가 아니야. 나는 오빠가 진정으로 행복하길 바라."

나는 한 마디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그녀는 내 모든 것을 눈치챘던 셈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따를 수 없다.

그 사실을 자각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 남는 건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행복이라...

저때의 나는 행복했을까.

그녀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도 나는 확실히 말해 줄 자신이 없다.

"그러니까 이거 하나만은 알아줬으면 해. 만약 오빠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적어도 나는 오빠랑 함께 있으면서 행복했으니까."

"... 전제부터가 틀린 말이네.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 리가 없잖아."

"지금의 나는 안 되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되지 않을까. 이 세상 어딘가에는 오빠만의 공주님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말하는 내용은 자조에 가깝더라도, 그녀의 어조는 누구보다도 밝았다.

나는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그녀의 말에 장단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

자연스럽게 찾아온 침묵.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오빠."

"... 왜."

"기억해. 나는 충분히 행복했어."

"……."

"……."

나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나 자신을 싫어하지 말라니.

분명 나를 생각해서 해준 말이겠지만.

나에게 평생 불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

그나저나.

무언가 잊고 있었던 기분인데.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눈앞의 풍경이 또다시 어지럽게 흔들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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