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왕실의 가정교사-212화 (212/215)

〈 212화 〉 2­175. 작은 마음의 해방.

* * *

2­175. 작은 마음의 해방.

"진정한 해방... 축하해?"

일리아드가 나름대로의 축하 인사를 건넸으나, 시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르릉. 콰쾅.

별안간 천둥소리가 왕도 위에서 울리고, 자그마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와 눈은 공평한 법. 지붕이 없는 곳이라면 어김 없이 떨어지기 마련.

찬란한 옥좌를 제외한 지붕 대부분이 사라진 알현의 홀에도 비가 떨어진다.

일리아드와 시하를 공평히 적시는 비.

시하에게 떨어진 비는, 그를 감싸고 있는 거무칙칙한 붉은 기운에 치익­ 소리를 내며 증발했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 시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엔 '삐이­'거리는 이명만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을 뿐,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왕좌로 향하는 붉은 양탄자 위에서, 시하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섰다.

"확실히 네 말대로. 이 세상은 썩었어."

"……."

"하지만 그 썩은 부분이 바로 너희라는 걸 모르면 안 되지."

"아무것도 모르는 표류자 주제에..."

"네가 뭐라 하는지 안 들려."

차오르는 열화와 같은 마력에 고막이 나간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시하가 정신을 차린다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지금의 상태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들려도 듣지 않았겠지만.'

시하는 일리아드를 향해 달렸다.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자줏빛 마력이 피어오른다.

일리아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충해서는 저걸 상대할 수 없어.'

다시금 날뛰기 시작한 저 어린양을 단단히 구속해야만 한다.

빛 바랜 백색의 마력이 다시금 일리아드에게로 모여 든다.

이내 그녀가 팔을 뻗자, 모든 이를 품으려는 성녀의 케이프가 시하에게로 쇄도한다.

이어지는 두 마력의 충돌.

의외로 빛바랜 순백의 천과 혼탁한 불길은 '파아아앙!' 소리와 함께 거대한 충격파를 발산했다.

근처에 있던 잔해들과 먼지들이 충격의 여파에 휩쓸려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상황. 일리아드는 성녀복의 숄로 코와 입을 가렸다.

'그 꼬맹이는...'

이 정도로 포기할 놈이 아니다. 일리아드는 흙먼지 속에서도 이시하의 모습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데릴라...!"

먼지를 헤쳐나온 시하가 일리아드의 향해 팔을 휘둘렀고, 화마가 일리아드를 덮친다.

"으읏...!"

일리아드의 반응은 빨랐다.

똑같이 팔에 마력을 두른 그녀가 화염을 쳐내자... 두 사람의 난투가 시작되었다.

엇갈리는 팔과 팔. 일리아드에게 쇄도하는 질척한 불꽃과 막아서는 빛바랜 천.

두 사람 중 이시하가 공세를 취하고 있으나, 일리아드의 방어 역시 만만치 않다.

색은 다르지만 빛은 비슷한 두 사람의 마력이 얽히고 또 얽힌다.

두 마력의 격돌할 때마다 둔탁한 타격음이나 귀를 째는 듯한 파공음이 울리는데, 그사이를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매운다.

그러던 중 일리아드는 생각했다.

'무언가 이상해.'

에우데미아에서 활동하며 이시하의 소문을 충분히 들어온 일리아드다.

반년 만에 중급마법을 터득해낸 천재. 자연마력에게 축복 받은 자.

이 두 가지야말로 '표류자 임시 공작'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였다.

분명 심상마법에 관련된 소문은 없었다.

'설마...'

일리아드는 시하의 움직임을 살폈다.

주먹과 팔은 직선으로 뻗어오고, 마력을 품는 형태는 타오르는 불꽃뿐.

짐작했던 대로, 지금 시하의 움직임이나 공격은 하나같이 직관적이다.

'이 정도면 버티기만 해도 내가 이겨...'

일리아드는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는 인간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걸 평생토록 숨기고만 살았다니, 너는 정말이지 불쌍한 아이였구나."

"……."

"얼마나 아파했을까, 얼마나 슬퍼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위 '이성'이라 불리우는 그 하찮은 규율로 네 감정을 억누른 그 세월 말이야! 나조차도 짐작할 수 없겠어!"

"닥... 쳐."

일리아드의 외침은 시하에게 닿지 않는다.

애당초 상대방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기에, 청각이 제 기능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리아드는 조소와 함께 외쳤다.

"가여운 아이야. 애써 해방시킨 그 감정을 마음껏 내게 뿜어내보렴. 내가 전부 받아줄 테니까!"

이제 남은 건 어린양의 절규를 들어 주는 것뿐.

빛 바랜 천으로 화한 마력은 시시각각 화염에 불타오르고.

일리아드는 어디 마음껏 태워 보라는 듯 심상을 펼쳐 냈다.

* * *

슬럼가 근처에 있는 헬렌 교국의 대성당.

"으억!"

그곳에 딸린 수련장에서, 사원복 차림의 아모스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었기에, 철퍼덕­ 소리를 내며 땅에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지금부터 5분 동안 휴식!"

"으으윽... 알겠습니다."

낙법을 취한 덕분에 머리를 다치진 않았다.

하지만 온종일 하늘을 날고 땅을 굴렀기에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상황.

아모스는 환부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아모스에게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으니, 그 주인은 크림색 머리칼의 수녀였다.

그녀는 아모스에게 수건을 건넸다.

"여기. 수건이요."

"감사합니다. 캐서린 대주교님. 그런데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이 훈련을 허가한 건 저니까요. 원칙상 제가 직접 입회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힐끔힐끔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아모스.

그의 시선을 인식한 교관역의 성당 기사는 '엣헴!'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아모스 신도는 그저 캐서린 대주교님의 참관에 감사하시면 됩니다."

"들었죠? 사무엘이 저렇게 말하면 괜찮다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캐서린은 괜찮다고 하지만... 아모스로서는 영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이렇게 신세지는 것도 미안한 일인데, 대성당의 수장인 캐서린이 참관까지 해주는 셈이니까.

아모스의 난처한 표정을 읽은 캐서린 대주교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모스 님. 방금 새뮤얼이 당신을 뭐라고 불렀었죠?"

"신도라고 부르셨ㅅ... 습니다..."

부르셨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뒷골목에서 늙다리들에게 배운 말투가 튀어나올뻔한 아모스였다.

'이제 너도 익숙해지긴 해야지! 언제까지 그런 뒷방 늙은이 같은 말투를 쓸 거니!'

머릿속으로 아일라의 꾸짖음을 생각하는 아모스였지만, 캐서린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신도라는 호칭부터가, 당신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뜻이에요."

"그... 그런..."

아모스가 수련장 안쪽을 돌아 보면, 성당 기사인 새뮤얼은 고개를 홱 돌리고 있었다.

교국에서는 상식이지만, 막상 타국 사람에게 설명한다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으니까.어쩔 수 없이 딴청을 피우게 된다.

캐서린은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저희 교단 사람들이 신자님들을 부르는 호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답니다. 교인(人), 신도(??), 마지막으로 성도(??)."

"교인, 신도, 성도..."

"교인은 그저 교회나 성당에 출석하기만 할 뿐인, 사랑에 간신히 매달리는 이들이죠. 신도는 이미 사랑에 대한 믿음이 충분하여 직접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신자들이구요."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입니까?"

"성도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기에 충분하여, 모든 이들을 이롭게 하는 자들이라 해두죠."

"……."

"여하튼. 당신이 그동안 보인 노력을 다들 알고 있으니까, 신도라는 호칭을 쓰는 거예요."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모스는 휴무일 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대성당을 찾았다.

아침이면 빵집소녀 미샤와 놀아주고, 낮에는 성당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 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유일하게 대성당에 오지 못한 기간은 시온 자작령에 파견나간 2주뿐이리라.

'고맙게도. 나는 이곳 대성당의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은 셈이구나. 하지만...'

분명 기뻐해야 할 때이건만, 시온 자작령을 떠올린 아모스는 오히려 암울해져 버렸다.

그도 모르는 사이, 혼잣말이 나온다.

"하지만. 내겐 이렇다 할 힘이 없소."

"……."

"그 일이 있은지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심상마법이 발현하지 않았으니..."

탐식의 대재앙이 출현한 시온 자작령.

그곳에서 아모스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고작 주민들의 피난을 유도하는 것뿐.

그 초라한 사실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아모스는 시하에게 강해질 방법을 물었지만...

'내가 아는 건 하나뿐이야. 너는 언젠가 네 심상으로 사람들을 지키게 돼.'

그 역시 심상마법에 대한 지식이 적었기에 이렇다 할 조언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아모스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이곳 헬렌 교국의 대성당에 매달렸고. 반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한 게 지금이다.

캐서린은 그가 내보인 처절함을 잘 알기에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아모스 님. 심상마법을 습득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건. 기억하시나요?"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한번 말씀해 보세요."

에우데미아의 귀족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문의 심상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풍(家風)이란, 각 가문이 추구하는 심상과 일치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 헬렌 교국의 사제들이나 성녀들은 사랑이라는 대주제만 공유할 뿐이다.

그들은 다양한 삶을 긍정하며, 각자의 고민과 성찰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

이렇듯 심상에 있어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듯한 두 나라지만, 큰 맥락에서 본다면 길은 일치한다.

"... 확고하게 다져진 심상.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경험."

"그렇죠."

캐서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왜 아모스 님의 수련을 돕는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당신의 선한 마음은 변하지 않으리라 믿고 있거든요."

"……."

"그러니 경험을 차츰 쌓아 나가신다면, 언젠가 심상마법을 터득하실수 있을거예요."

"말씀... 감사합니다."

순간, 하늘에 웬 먹구름이 끼었다.

그리고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니...

왕도 상공에서 재앙 무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라...?"

"대주교님. 저것은!"

"새뮤얼, 성당 식구들을 한 자리에 모으세요!"

저것들이 왜 왕도에 떨어지는거지. 시온 자작령으로는 모자라다는 건가.

캐서린이 명령을 내리는 와중에도 아모스의 시선은 하늘로 향해 있었다.

현실감을 잃어버린 그에게, 대주교 캐서린이 말을 걸었다.

"아모스 님. 밖은 위험하니 이곳에서..."

"미샤..."

"네?"

"대주교 님. 미샤가 위험합니다! 가보겠습니다!"

"아모스 님!"

자신에게 빛을 되찾아주었던 소녀를 지키기 위해, 아모스는 대성당을 뛰쳐 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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