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3화. 타락한 닌자마을 (2)
* * *
모두가 잠든 야심한 밤.
마나로 작동하는 조명들조차 꺼진 폐광산은 말 그대로 칠흑이다. 난 이불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부푼 공간을 만들었다.
‘닌닌.’
긴급 상황이니 구호는 속으로만 외친다. 혹시나 방해될지도 모르는 옷들은 닌자탈의법으로 벗은 후 빠르게 이불 속에 넣었다.
교관급이면 빡집중시 고요한 밤의 천 쪼가리 소리까지도 잡아낼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남이 할 수 없다 가정하고 시작하다간 옴팡지게 털리기 마련.
최선부터 최악의 준비까지 하는 것. 그것이 탈주닌자다.
슥
인생 최대의 알몸 엿보기가 지금 시작됐다. 뱀이 모래에서 미끄러지듯이 움직여서 바로 입구로 향했다.
이렇게 어두울 때야말로 뜬그림자의 진가인 물아일체 이동술이 나온다. 위장술이라는 건 실력이 반이지만, 상황도 반이다.
일단 상황으로 반은 먹고 가야 뛰어난 실력이 발휘될 기반이 놓인다.
확인해보니 입구 쪽의 간이숙소에는 말소리와 옅은 빛이 사이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야심한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서로 모여 있다? 무조건 중요한 말들이 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것은 지구의 영화로 증명된 사실이다.
나무랑 짚으로 만들어진 간이숙소에 살짝 구멍을 뚫었다. 그야말로 엿보기 구멍.
눈을 댄 순간 그만 정신을 잃을 뻔했다.
쩝쩝쩝.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교관, 이 십새끼들이 야식을 처먹고 있었다!
“역시 새벽에 먹는 식사가 각별하다니까.”
크고 기름진 훈제 닭다리를 뜯으며 웃는 대머리.
“소소한 행복이죠.”
촉촉해 보이는 팬케이크에 시럽을 잔뜩 부으며 흐뭇해하는 까까시.
“가끔 이렇게 먹어줘야 정신건강에 좋다니까.”
“이제 이 생활도 슬슬 끝이니 즐겨야지.”
그 외에도 잡다한 교관들이 인근 마을에서 구해온 게 분명한 음식들을 맛보고 있었다. 어쩐지 쌍놈들이 밥 먹을 때마다 안보이더라.
‘와자뵷!’
벌써 내 영혼과 정신은 뛰쳐나가 저들을 엉망진창으로 도륙 내고 있었다.
닌자 후보생들의 실종? 훈련을 따라오지 못했던 녀석들만 사라졌다. 필요 없어졌으니 입막음을 위해 조용히 죽여버리거나, 적당한 용병이나 전쟁 노예로 팔았을 확률이 높다.
냉혹한 닌자의 세계에서 이 정도는 상식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타락한 닌자 마을에서 번번이 일어나는 일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애벌레를 주식으로 삼는 후보생들 몰래 삼시 세끼 다 맛난 거 처먹고 몰래 야식까지 처먹는 교관들? 이건 세계 2차대전 때의 추축국이나 하던 짓거리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의 굶주린 아이들을 풍경 삼아 초콜릿을 까먹으며 실실대는 녀석들과 다를 게 없다. 실눈 까까시 시발년은 이미 내 마음속의 SSS급 전범목록에 추가된 지 오래다.
아무래도 탈주계획을 앞당겨야겠다.
***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탈주일.
“오늘이 마지막 실습이니까 제대로 보세요.”
까까시가 옆구리에 찬 닌자도(?)를 빼 들고 폐광산을 한 번 둘러봤다. 후보생들과 눈을 맞추려고 하는 거 같은데 역시 실눈이라 그런지 눈빛으로 교감이 되지 않는다.
닌자마을의 교육과정이 오늘부로 끝난다. 아마 이제 후보생들은 승급시험을 보고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겠지.
하지만 난 시험을 치를 생각이 없다. 난 이미 탈주할 준비를 어제 끝마쳤다. 사실 준비라 해봤자 별거 없다.
“그럴 때는 이렇게.”
까까시가 숙련된 기술과 멋진 닌자도를 뽐내며 설명을 하고 있지만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계획 하나, 칼자루에 붉은 뱀이 그려진 저 닌자도는 내 것이다. 신비한 초능력이 있다지만 기술력이 중세시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 세계에서도 저렇게 잘 다듬어진 무기는 거의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칼날 자체에는 특별한 외형적 특징이 없으니 칼자루의 뱀 그림만 지우고 칼집만 바꾸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까까시가 동료 닌자들과 칼을 찾으러 온다 해도 나는 끄떡없을 자신이 있다.
계획 둘, 은 특별히 없다. 어차피 교육과정이 끝났다면 폐광산을 떠날 거다. 그때 기회가 있다면 바로 산속으로 뛰쳐나가면 된다. 종일 달려도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567의 몸은 내가 이미 슈퍼닌자로 개조한 지 오래다. 적당히 멀어졌을 때 뜬그림자로 사라져서 유유히 도망가면 아무도 날 붙잡지 못한다.
“무슨 생각해?”
“닌닌?”
568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마지막 날이라서 휴식이라도 하는지 다른 교관들은 입구 바깥에만 죽치고 앉아 있고, 까까시는 자기 설명에 심취해 있어서 조금은 떠들어도 제재 당할 일이 없다.
“며칠 전에 얘기했던 거 기억나? 나갈 생각, 있는 거지?”
충격! 568도 탈주닌자를 노리고 있었다. 한 닌자마을에 탈주닌자가 두 명이면 폼이 존나 안 사는데. 그렇게 걱정하며 짧게 물었다.
“왜.”
“넌 계획이 다 있는 거지? 나도 데려가 줄 수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도와줄 테니까.”
‘이건 뭐 조별 과제 무임승차 닌자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교관은 교관이다. 짬이야 당연히 많고, 지리도 나보다 빠삭할 테고, 제일 중요한 머릿수부터가 많다. 빠르게 튀어 나가지 않으면 불리해지는 건 나다.
거기서 나보다 압도적으로 능력이 후달리는 애를 데리고 나간다? 차라리 내가 몰살루트 닌자로 변신해서 교관을 전부 죽이고 나가는 게 빠르겠다.
“귀찮음. 곤란.”
딱 잘라 거절하니 그녀가 눈에 띄게 실망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우물거리는 게 본인도 하기 힘든 속마음을 꺼내려고 노력하는 거 같아 보인다.
“...여기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거야. 내가,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난 여기서 죽으면 안 돼. 부탁이야. 도와줘.”
568의 어깨와 두 손이 부르르 떨리고, 단검으로 아무렇게나 잘린 짙은 파란색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말에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있는 건지, 그녀의 다크서클이 더욱더 깊어졌다.
진짜로 야쿠자에게 부모님을 잃고 복수하려고 하는 건가. 안타까운 얘기다.
음침녀를 도와준다면, 야쿠자 슬레이어의 탄생에 기여하는 게 아닐까? 목검을 들고 야쿠자를 응징하는 568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확 끌리네.
“지금 당장은 줄 수 있는 게 없지만, 내가 가능한 거라면 뭐든지 해줄게. 나는”
“아, 드디어 오셨군요. 여러분들,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타이밍 좋게 입구 쪽에서 교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이 좋았다. 더 깊게 생각하다 야쿠자 슬레이어에 정신이 팔릴 뻔했다.
이래서 남자의 로망이 참 위험하단 말이야. 딱 봐도 좆되는 선택지를 구태여 택하는 위인들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입구 쪽을 살펴보니 처음 보는 교관들(옷이 하나같이 똑같다)이 마차를 몇 대 세워두고 짐을 나르고 있었다. 앞서 배웅하러 나간 대머리 교관이 혼자서 어린아이 몸만한 향로를 4개나 들쳐메고 내렸다.
“진짜 힘이 얼마나 센 거냐고.”
저 새끼는 닌자가 아니라 변강쇠가 돼야 했었다. 잘못된 직업 선택의 전형적인 예시다.
이윽고 마차 안에서 법복 비슷한 걸 입은 복면녀가 내렸다. 놀랍게도 이 여자는 스킨헤드였다.
“닌닌....!”
닌자가 머리를 미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대머리 교관처럼 탈모가 와서 그런 건 아니고, 미용에 쓰는 시간을 줄여 훈련에 매진하기 위해서다.
이건 아무리 나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나조차도 머리카락은 포기하지 못했는데, 엄청나게 비범한 자다.
스킨헤드녀, 아니 복면녀가 즉석에서 설치된 책상만큼 넓은 의자에 앉았다. 의자 양옆으로 거대 향로가 설치되었고, 까까시를 포함한 교관들이 하나둘씩 자세를 잡고 향로 옆에 섰다.
“기립 상태 유지, 복면을 받는다.”
분노 조절 대머리조차도 오늘은 섬뜩할 정도로 진지해 보였다. 깜짝파티가 아니라 킬링파티를 벌이려는 거 같다.
복면을 다 넘긴 대머리 교관이 향로를 피웠다. 녹색 연기가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종교의식이 되어버린 행사.
‘대충 알아들었지?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가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다.
“올해가 가장 많이 살아남았구나.”
식은땀 넘치는 침묵 속에서 드디어 복면녀가 입을 열었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과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 마나가 담긴 낮고 웅혼한 목소리가 폐광산을 둘러싸 중압감을 만들어냈다.
능력을 숨길 생각도 없는 저 자신감, 확실히 사갈의 꼬리 최강이 맞다. 이 정도면 1.5 까까시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준.
“복면을 써라.”
이미 교관들은 모두 복면을 착용한 상태. 당연히 후보생 그 누구도 거역하지 못했다. 568도 벌벌 떨면서 내 눈치를 보더니, 복면을 착용했다. 하나둘 착용하는 걸 지켜보다가 나도 대세를 따랐다.
“이 복면을 쓴 순간,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게 된다.”
갑작스러운 탈인간 선언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사악한 요괴들의 술법이 내장된 복면이었다!
“그러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 주저하지 않는다.”
좆같은 비유적 표현이었네.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리 이세계라도 이렇게 단시간 내에 감염시키는 것은 너무 사기다.
“그게 뱀과 전갈의 꼬리가 된다는 의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관들이 마차에서 손과 발이 묶인 사람들을 데려와 후보생들의 앞에 내팽개쳤다.
“한 명을 정하고 그 앞에 서라.”
행동대장 대머리의 명령에 주춤거리던 후보생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사람을 골랐다. 어떤 설명도 없었지만 다들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다. 지금 고르는 사람이 내가 죽일 첫 번째 희생자라는 것을.
잔혹한 훈련을 받으면서 몸과 마음이 망가진 후보생들이지만 아직 최후의 선은 넘지 않았다.
살인.
오늘은 후보생 모두가 살인마로 거듭나는 날이었다.
“으윽...”
후보생들과 희생자 양쪽에서 기묘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희생자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연령과 성별의 구분 없이 모인 사람들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난 차분하게 그들의 모든 것들을 살폈다. 남자의 몸은 농사일로 다져진 것이었고, 여자아이의 앙상한 팔과 볼록한 배는 굶주림으로 인한 것이었다. 치아 없는 노쇠한 노인의 입에서는 침이 계속 새어 나왔고, 여자의 옷에서는 젖자국이 남아있었다.
야쿠자, 사무라이, 요괴가 아니다. 전부 내가 지켜야 할 무고할 백성들.
“평범한 사람들로 보이나?”
다시 찾아온 정적에 복면녀가 입을 열었다. 568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너희들을 버린 사람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완벽하게 공간을 장악한 녹색 안개, 그 향에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성분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었다. 후보생들과 끌려온 사람들의 눈이 서서히 풀려간다. 568은 아예 꿀잠을 잘 기세다.
“뭐든지 처음이 있지. 걱정은 하지 말도록.”
복면녀의 연설이 계속되는 가운데 까까시가 양철로 된 바구니에서 단검을 꺼내서 후보생들에게 넘겨줬다. 약에 취해 망설이다 집어 드는 후보생들의 눈에서 기묘한 열기가 느껴진다.
마약으로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고, 쾌락을 주입한 뒤 후보생들을 살인광으로 탈바꿈시키려는 비열한 수작.
“하다 보면 즐기게 된다. 즐기다 보면 잘하게 된다. 잘하게 되면…. 자랑스러워진다.”
더는 연설이 들리지 않았다.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는 사갈의 꼬리를 부순다. 아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567. 아직 ‘제물’을 고르지 않았네요? 그래도 언제나 신중한 건 좋은 태도에요. 뭐든지 첫 단추가 제일 중요하거든요.”
아직도 내가 신중남이라고 믿고 있는 까까시가 단검을 넘겨주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마약 안개의 영향인지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묻어났다.
“제가 개인적으로 거는 기대가 커요.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제 파트너가 될 만큼 강해질 거에요. 장담할게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작게 낄낄대는 쓰레기 닌자 까까시. 저년도 그냥 살인광에 불과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던 존경심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하도 기가 막혀서 ‘닌닌’도 안 나올 정도.
삼류닌자를 육성하고, 잔악무도한 민간인 살해를 저지른 반인륜적인 쓰레기 닌자조직 사갈의 꼬리.
탈주? 그걸로는 부족하다. 이 조직은 그 이상의 응징을 받아야 한다.
의무와 사명, 이성을 잃고 미쳐가는 너희들에게 내가 내릴 심판은 단 하나.
닌자 몰살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