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4화 (4/119)

〈 4화 〉 4화. 타락한 닌자마을 (3)

* * *

132는 울퉁불퉁한 오른손으로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매끈매끈한 감각에 심신이 안정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올 한 올 빠지는 소중한 희망들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졌다. 사람은 상실에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

그는 일말의 유대관계조차 없는 제자들의 눈을 보았다. 약에 취해 몽롱해진 그들의 흐린 눈동자는 불쾌했다.

신성하고 성스러운 의식, 사갈의 꼬리의 전통, 공유되는 경험으로 다져지는 신뢰. 어떤 미사여구를 붙이며 포장해도 그 행위는 언제나 불쾌했다.

끔찍한 일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건 진짜로 끔찍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자만이 말할 수 있는 뻔뻔함에 가득 찬 기만이라고.

­ 이, 이야아!

8년 전, 이곳과 똑같은 장소에서 132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을 베었다. 아이의 몸집은 유난히 작았고, 손은 오밀조밀했다. 숨통을 끊어놓는 순간까지 아이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칼을 잡을 때마다 가시지 않는 불편함을 잊기 위해서 132는 권격술을 익혔다. 사갈의 꼬리에서 지정해준 첫 번째 목표물의 목을 손으로 꺾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목표물의 신상정보를 기다리고, 정보가 확인되면 목표물을 죽이고 거금을 받는다. 받은 돈들은 고급장비와 사치 생활로 사용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똑같이 반복된다. 단장의 말이 맞았다. 하다 보면 즐기게 되고, 익숙해지면 자랑스러워진다.

하지만 이 장소는 불쾌한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낸다. 132는 믿고 싶었다. 그때 당시에 향에 섞여있는 마약성분에 취해있었기 때문에 마음과는 상관없이 저지른 행위라고. 그렇지만 이 장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수많은 마약을 흡입해본 지금이라면 안다.향의 기운은 강하지 않았다. 이건 그냥 시장바닥에 굴러다니는 피로해소제에 불과하다.

이 안개는 살인을 쉽게 돕기 위해 환각에 취하게 만드는 비약이 아니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사람이 아니다 등의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지 못한 사람에게 진실을 회피할 기회를 주기 위한 빌미를 주는위약(藥)이다.

“우오, 우오, 우오우. 우와아아!”

자기암시가 끝난 예비 암살자 한 명이 단검을 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일말의 효율조차 없는 멍청한 자세, 그렇지만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생명이란 이렇게 가벼운 것이다.

그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 녀석을 시작으로 모두 고삐가 풀리겠지.'

132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쐐액!

안개를 가르고 뻗어 나온 단검이 향로를 박살냈다.

쩡!

부서진 향로에서 짙은 향이 무분별하게 퍼져나갔다. 아까와는 다르게 시야를 방해할 정도였다. 다들 당황해서 머저리처럼 멈춰있을 때, 두 번째 향로가 터져나갔다.

퍼걱!

“이런 씨발! 어떤 새끼야!”

132는 다른 교관들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일부러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빠르게 예비 암살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갑자기 훅 퍼지는 향에 코를 막으며 벙쪄있는 걸 보니 반란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기습했다고? 사갈의 꼬리를?’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소리다. 이르갈 왕국에서 제일가는 암살자들만 모아 놓은 조직이 기습을 당했다? 진짜배기 초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습과 암살에서는 노련한 자들이 모인 장소다.

­ 와자뵷!

어디선가 들려온 기합 소리에 132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

소수가 다수를 상대할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닌자의 고향에서 만들어진 전술인 포위섬멸진이 있겠다. 300명의 병사로 5,000명의 적군을 둘러싸 섬멸한다는 심플하고도 우아한 전술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사용 가능한 전력은 나 하나뿐. 568의 능력으로는 어떤 걸 시키든 5초 안에 핏덩이가 될 게 분명했다.

현재 상태로는 무조건 기습해서 난전으로 끌고 가야 한다. 탈주닌자 혼자 일인군단이 되어 닌자마을에서 펼치는 난전. 그야말로 로망이다.

복면녀까지 포함해서 교관은 모두 18명, 가장 강한 복면녀와 까까시를 제외하면 다 엇비슷해 보인다. 뭐 대머리 교관도 한가닥 하는 놈이긴 하다.

교관들 모두 살인기술과 경험 전부 뛰어나겠지만, 절대적인 마나량이 적어 보였다.

복면녀 그년도 솔직히 애견카페에서 왕 노릇을 하는 늑대랑 다를 바 없는 새끼다. 뒤에서 칼찌나 하는 삼류닌자들은 절대적인 힘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승부, 나의 승리다.

울부짖는 닌자 후보생에게 시선이 집중됐을 때 바로 튀어 나가서 네 명의 후보생들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고 곧바로 2개를 향로에 쏘아 보냈다.

대머리가 악을 쓰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안개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삼류가 내 뜬그림자를 볼 수가 있을 리가 없다.

“오걱!”

“끄르륵!”

내 한 쌍의 단검은 교관 네 명의 목젖을 베면서 춤추고 있었다. 쓰레기들을 상대로 한 첫 살인. 별것도 아니었다.

먼저 찔러넣고 빠르게 회수해 후속타를 준비하는 방식이 실제로 도움이 많이 된다. 까까시의 조언이 훌륭하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우선 팔이나 다리를 크게 베어 전투 불능으로 만든 뒤 급소에 확인사살을 가하면 웬만한 허접들은 끝난다.

­ 와자뵷!

혼란스러움을 증폭시키기 위해 마나를 실어 기합을 내질렀다. 상황을 확인하려 일어서는 복면녀, 바로 그녀의 심장을 노리고 단검을 던졌다.

챙!

복면녀가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수를 꺼내 단검을 쳐냈다. 저 손놀림은 날 보거나 움직임을 읽어서 쳐낸 게 아니다. 수많은 경험이 빚어낸 제3의 감각이 발휘되어 본능적으로 막아낸 거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쓰레기 닌자마을의 수장이 될 자격은 충분해 보였다. 그렇지만 거리를 좁힐 시간을 번 것뿐이다. 곧바로 몸통 박치기를 선사해줬다.

“음!”

특이한 기술을 사용하려고 했는지 이상한 자세를 취한 복면녀가 재빨리 몸을 웅크려서 방어자세로 전환했다. 그렇지만 폭주기관차 토마스를 고라니 한 마리가 세울 수는 없는 법.

터엉!

튕겨 나간 복면녀가 벽에 몸을 기댔다. 균형이 흔들려서 그런지 복면녀의 눈동자도 흔들린다. 바로 배에 단검을 찔러넣었다.

“흡!”

복면녀가 단검을 쥔 내 오른손을 움켜잡고 비틀었다.

이런 시발, 금나수를 쓴다고? 민머리 여자를 보고 아미파를 고려하지 못한 내 실책이다.

그렇지만 그딴 거에 당해줄 탈주닌자는 없다. 우선 단검을 떨구고, 팔을 빼내는 척하면서 박치기를 가했다.

빠각!

“으허어...”

코피를 줄줄 흘리는 복면녀의 팔에 힘이 빠져나간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두 팔을 붙잡은 뒤 다른 손의 검지로 복면녀의 두개골을 꿰뚫었다.

“­타코야끼 살법.”

손끝이 좀 욱신거리지만 감수할 만하다.

“...컥.”

눈깔이 뒤집어지는 걸 확인하고 복면녀의 비수를 빼앗아 지원하러 달려오는 땅딸보의 머리통에 날렸다. 매캐한 향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던 그가 소리의 방향을 확인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머리에 칼이 박힌 채 힘없이 쓰러지는 땅딸보.

“닌닌.”

결국엔 이 정도 수준이다. 기껏해야 자기보다 조금 강한 상대를 기습해서 이긴 경험밖에 없겠지. 압도적인 힘과 재능 앞에서 하수의 잔재주는 무의미하다.

전면전에 들어가면 한없이 나약해지는 삼류닌자의 특성상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는 거다.

땅딸보 교관이 들고 있던 장검을 들어 올렸다. 남은 교관은 12명. 체감상 2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6명을 죽였다.

그래도 닌자착의법 정도의 기술을 가진 교관이 있다면 정비하기 충분한 시간이니 방심하긴 이르다. 어디까지나 기습으로 얻은 성과.

일단 큰 변수인 복면녀가 죽었으니 까까시를 천천히 찾으면 된다.

“이, 이 새끼!”

“어디야! 안 보여!”

하나, 하나, 또 하나. 녀석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교관 중에는 뜬그림자를 써서 나에게 다가오는 놈들도 있었다. 할머니 앞에서 주름잡는 꼴, 간단하게 썰어줬다.

쾅!

“아니, 시발.”

그렇게 6명 하고도 5명을 더 죽였을 때, 내가 있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거대한 암석이 날아왔다. 공중제비를 다섯 바퀴 정도 돌아 멋있게 피한 후 암석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했다.

“567!”

역시 이런 미친 짓이 가능한 건 대머리 교관뿐이다. 어디서 챙겨왔는지 건틀릿이랑 경갑, 투구까지 써서 무장한 꼴이 딱 봐도 단단해 보였다.

역시 이 새끼는 프로레슬러를 해야 했다. 이렇게 풀템을 맞춰 온 놈을 상대하다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

“상황이 이해가 안 돼? 567이 교관들을 죽이고 있잖아. 교관들이 쓰러지고 있잖아! 그 교관들이 그냥 죽고 있다고! 그냥 시체가 되고 있다고!”

어디선가 568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향이 개이는 거 같더니 그새 교관들이 죽은 걸 확인했나 보다.

“평생 이러고 살고 싶어?! 정신 차리고 567을 도와 교관들과 싸워! 아니면 그냥 여기서 다 죽는 거야!”

적절한 선동이다. 후보생들이 시간만 좀 벌어준다면 대머리 또한 케이크처럼 쉽게 먹을 수 있다.

“씨, 씨발!”

“그래, 이 개새끼들 잘됐다!”

“죽여버려!”

‘분노’라는 감정을 되찾은 후보생들이 정비하고 있던 교관들을 둘러쌌다. 이게 진정한 포위섬멸진이다.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대머리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내가 할 말은 단 하나뿐이다.

“와바랏!”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