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5화 (5/119)

〈 5화 〉 5화. 타락한 닌자마을 (4)

* * *

“아아.”

우두둑.

쇄도하는 대머리의 주먹이 암석을 갈랐다. 건틀릿이 암석을 강타할 때마다 검은빛에 감싸이는 걸 보니 마법장비가 확실하다.

“­느려.”

빠른 속도와 파괴력을 겸비한 공격이지만, 모든 공격이 그렇듯 맞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춤추듯이 피해준 후 대머리의 눈을 향해 장검을 찔러넣었다. 직전에야 파악한 대머리가 머리를 살짝 틀었다.

우우웅.

대머리의 투구가 건틀릿과 똑같은 검은 빛에 휩싸이더니 칼날을 튕겨냈다. 마법장비 성능 존나 좋네.

“이 더러운 배신자 새끼가!”

냅다 내지르는 주먹을 피하고 열 걸음 정도 후퇴했다. 케이크는 개뿔, 역시 정보의 차이가 크다. 난 물론 여기 주민인 567까지도 살면서 저딴 물건을 본 적이 없다.

트리위키가 없는 세상이라니. 이 세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다시금 체감했다.

“병신같은 소리나 하면서 미친 척하더니, 역시 너무 꺼림칙했어. 언제부터 꾸미고 있던 거냐? 이 미치광이 새끼야. 목적이 뭐냐? 왜 그랬지?”

대화를 시도하는 척 숨을 고르면서 시간을 버는 대머리. 그렇지만 악인과 할 대화는 없다. 그들에게 들려줄 소리는 일방적인 문답과 기술 이름뿐이다.

“닌닌.”

장검은 벌써 날이 나가서 쓸모가 없다. 특별히 강한 상대는 아니지만, 갑옷이 튼튼해서 정말 지루하고 긴 싸움이 될 거 같았다. 아무래도 까까시의 닌자도가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이년은 구석에서 전투 화장이라도 하고 오는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장기전으로 유도해 대머리를 붙잡고 있다가 교관을 다 죽이고 오는 후보생들과 집단린치라도 가하는 게 어떨까 생각했지만.

“합공, 합공하자니까!”

“뒤로 빠져 좀!”

“씨발!”

40명이나 되는 후보생들이 5명밖에 안 되는 교관 상대로 밀리고 있었다. 후보생들의 공격은 교관에게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교관이 기회를 노려 일격을 가할 때 568이 적절히 나서서 막아주니 어떻게 전선이 유지되고 있긴 하다.

“아니, 얼마나 병신인 거냐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기려면 몇 명을 고기 방패 삼아서 밀고 들어가야 하는데, 희생을 자처하는 후보생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희생을 강요할 만큼 비정하지도 못하다. 사람 꽤나 담가 본 교관들이랑 마음가짐부터가 다른 거다.

“쟤네들은 별것도 아냐! 이 새끼만 잡으면 끝난다! 이쪽으로 합류해!”

대머리가 상황 파악이 끝났는지 교관들을 불렀다. 둥글게 뭉쳐서 서로의 등을 보호하던 교관들이 눈빛을 교환한다.

“저거 보내면 안 돼! 뭐해! 다시 둘러싸!”

568이 악을 쓰며 명령을 내리지만, 삿갓을 쓴 여자 교관이 원을 그리며 회전시키는 사슬낫이 두려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후보생들. 대머리와 눈빛을 교환하던 곱슬머리 남자 교관이 조용히 우물거렸다.

“나와 352는 132를 지원한다. 셋이서 버티고 있어.”

“알았다.”

그 말을 신호로 삿갓녀가 사슬낫 회전을 멈추고, 곱슬남이 품속에서 비수들을 꺼내 후보생들에게 던졌다. 맞아서 넘어지거나 움직이면서 피하는 후보생들을 제치고 달려 나가는 삿갓녀와 곱슬남.

“잡아!”

후보생 몇 명이 막아보려 했지만, 한 교관이 큰 곤봉을 휘둘러 고깃집 주인이 파리 위협하듯 내쫓았다. 내 쪽으로 도착한 삿갓녀는 중거리에서 자세를 잡았고, 곱슬남이 좀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비수를 던졌다.

“오히려 좋아.”

솔직히 말하면, 개꿀이다. 저들은 날 죽이러 온 게 아니라, 나에게 무기보충을 해주기 위해 찾아왔다. 장검으로 비수 몇 개를 쳐내고 달려오는 대머리의 투구에 장검을 집어 던졌다. 흠칫하며 가드를 올리고 뒤로 빠져나가는 대머리. 쪼는 걸 보니 투구에 걸린 방어마법도 내구력 또는 횟수 제한이 있어 보였다. 역시 이깟 수준의 닌자가 사기템을 끼고 다닐 수는 없는 법이다.

우우우웅! 태앵!

대머리가 주춤한 사이 삿갓녀가 사슬낫을 던졌고, 난 그대로 몸을 틀어 낫만 피한 채 사슬을 붙들었다. 이것도 마법무기였는지 갑자기 무거워졌다. 눈웃음을 치면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삿갓녀. 당연히 그 정도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히얍!"

간단히 버텨냈다.

“앗?!”

당황하며 땀을 흘리는 삿갓녀. 다가오는 대머리를 간단한 견제동작으로 제지하면서 곱슬남의 눈치를 봤다. 곱슬남은 포지션을 다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자리를 옮기는 중이었다.

이때가 기회다.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사슬을 잡아당겨 삿갓녀를 넘어뜨린 후 대머리의 주먹을 피했다.

붕­

“우부쟛!”

넘어지면서 자갈돌에 미간이 찔린 삿갓녀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다. 검붉은 피가 바닥에 번져나가는 걸 보니 부처의 품으로 돌아간 게 확실하다.

챙!

다시 날아온 비수를 사슬로 튕겨내고 상체를 숙인 채로 대머리의 아랫도리에 낫을 찔러넣었다.

“이 미친 새끼!”

“느려.”

간신히 낫을 잡아낸 대머리의 두 팔을 두 차례 사슬로 묶었다. 역시, 이 갑옷에 새겨진 방어마법은 직접적인 공격이 들어오지 않으면 발동하지 않는다. 충돌할 때만 검은색으로 빛났던 이유가 있었다.

“닌자 본디지 플레이(Ninja Bondage Play).”

바로 구속된 대머리의 등 뒤로 넘어가 사슬로 목을 감았다. 착 달라붙어 조이는 느낌이 꽤 좋다.

“커허억...”

“이야!”

비수가 다 떨어진 곱슬남이 마체테 같은 칼을 빼내서 달려들었다. 승산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는지 비명을 지르면서 오는 게 상당히 불안해 보인다.

리얼닌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전투감각에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고 정신을 놓아버린 것인가?

그 불안감을 영원히 덜어주는 것이야말로 닌자의 참된 도리다. 발끝으로 땅바닥에 널려있는 비수 중 하나를 차서 곱슬남의 왼쪽 눈알에 꽂아버렸다.

풀썩.

입을 벌린 채로 쓰러지는 곱슬남. 아마 뇌까지 뚫렸을 거다.

우두둑!

마지막으로 산소부족에 빠진 대머리의 목을 꺾어버렸다.

“이에, 이에에에에에!”

“이건 말도 안 된다...”

“살, 살려줘!”

트리플 킬을 보고 있었는지 후보생과 대치하던 교관들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예 한 교관은 칼을 내려놓고 자비를 구걸하고 있었다.

“좆까!”

“찔러!”

승기를 잡은 후보생들이 칼로 세 명의 교관들을 난자했다. 원래 살인은 다 같이 저지르면 죄책감이 덜해진다. 집단구타와 따돌림이 괜히 번번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한 568이 나에게 달려왔다.

“567! 우리가 이겼어!”

“우리가 아니고 내가 이긴 거지.”

어디서 또 얹혀가려고 해. 그래도 선동으로 시간을 벌어줬으니 용서했다.

“까까시는 어디 갔지?”

“까까시? 그게 뭔데?”

“단발실눈여캐.”

“여캐?”

시팔, 언어가 안 통하니 힘들다. 대충 인상착의를 설명해주니 교전이 시작하고 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말하는 568. 설마 그대로 빤스런한건가. 사실 있든 없든 결과적으로는 똑같았을 거다.

문제는 까까시의 닌자도다. 대머리와의 싸움으로 인해 템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최고급 마법 장비는 평범한 사람도 초인으로 바꿔놓을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잠깐, 평범한 사람?

“백성들은 다 어디 갔지?”

첫 싸움이기도 했고, 수적으로 약세였기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아예 신경조차 못 쓰고 있었다. 이건 좀 감점인데. 이렇게 존나 열심히 싸워도 지켜야 할 사람들이 다 죽으면 뭔 소용이 있나. 아무리 둘러봐도 묶여 있던 사람들이 안 보였다.

닌자할복각인가?

“묶여 있던 사람들? 아까 전부 풀어주고 몇몇 애들이 입구 바깥으로 안내해줬어. 그 애들도 같이 탈출한 거 같지만... 뭐 중요한 건 아니니.”

“닌닌.”

다행이다. 이러면 결과적으로 훌륭한 데뷔전이라 볼 수 있다. 뭐,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다음부터 이런 부분도 신경 쓰면 된다는 교훈을 얻은 셈 치면 된다.

그럼 템파밍 시간이다.

뒤적뒤적.

그나마 사이즈가 비슷한 곱슬남의 상의를 벗기고 입었다. 대머리의 갑옷은 탐이 났지만 내 싸움방식과는 너무 달라서 굳이 챙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 대충 단검이나 비수, 검을 챙기고 있었는데 날 보는 후보생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

꿀꺽.

이제는 아예 침 삼키는 소리까지 난다. 후보생들은 벌벌 떨고 있었다. 나랑 똑같이 템파밍을 하고 있던 568이 입을 열었다.

“겁에 질려서 그래.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긴,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지금 여기서 40명 전원을 몰살하는 것도 가능했다. 후보생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압도적인 강자 앞의 약자들, 산군 앞의 뽀삐와 몽이, 까미 신세다.

“사갈의 꼬리는 여기서 해산한다.”

그러나 이들 또한 죄 없는 희생양들이다.

“여기서 배운 기술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스스로 정해라.”

그리고 나와 같은 탈주닌자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별 과제 무임승차 탈주닌자. 나같이 순수한 탈주닌자와는 다르게 의무나 책임을 굳이 질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죄 없는 이들의 피를 흘리게 한다면.”

하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한다.

“내가 찾아가겠다.”

호다다닥!

으름장을 놓고 멋지게 뜬그림자로 사라져서 동굴 바깥을 나갔다. 급하게 뛰느라 도중에 넝마가 된 신발로 자갈돌을 밟아서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참았다.

“음.”

맑은 공기와 밝은 빛이 오히려 어색했다. 옷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적당한 암석에 앉아 발을 주무르고 있었는데 급하게 뛰어온 568이 보였다.

“헥, 헥. 이르갈 왕국, 출신이 아니지?”

뭐 그런 걸 물어보려고 뛰어오냐. 무시하고 발이나 계속 주물렀다.

“화폐나 글자 같은 거 알고 있어?”

“탈주닌자는 공부따위 안 해.”

“탈주닌자? 너희 나라에서는 널 그렇게 불러? 아무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같이 다니자. 내가 시중들어줄게. 그 대신에 제자로 삼아줄 순 없어?”

“탈주닌자는 제자 따위 두지 않는다.”

“그, 그럼 가끔 대련만 해줘도 돼. 응?”

솔직히 따까리가 필요하긴 하다. 정보 부족으로 인해 이번 싸움도 힘들었다. 567 이 새끼는 고아라서 뭐 아는 상식이나 지식이 거의 없었다. 568은 다른 애들과 비교했을 때 소위 말하는 ‘먹물’을 먹은 티가 났다. 아마 이 세계의 귀족 같은 거였겠지. 어쨌든 설명충이 필요하다. 식사, 설거지, 빨래 등을 해주는 가사도우미는 덤으로.

“따라와라. 야쿠자 슬레이어.”

“그건 또 뭐야...”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금 뛰기 시작한다.

이제 탈주닌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해야 할 때가 왔다. 무고한 백성을 위해 싸우는 탈주닌자는 야쿠자, 사무라이, 요괴, 타락닌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우선, 상인이 된다.”

나, 신노빈은 비로소 유년기의 끝을 맞이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