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8화. 사람이 다섯 명이나 모이면 (3)
* * *
숙소에 들어가 오르페의 갑옷을 대충 벗겨놓고 침대에 눕혔다.
“으으...”
숙취에 괴로워하는 오르페를 보고 있으니 여동생이 생각난다. 성격도 생김새도 완전히 다른데 왜 그런 걸까. 그냥 성별이 같아서인가?
오빠! 이거 먹어!
그녀도 날 잘 따르던 시절이 있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순수했었고, 사람의 가능성을 조건 없이 믿었다. 혈육인 그녀라면 내 원대한 꿈을 말해도 비웃지 않아 줄 거 같아 결국 말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간과한 실책.
뭐야 그게. 완전 바보 같아!
그때의 난 참을성이 부족해서 그런 말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규정하려 하는 사회의 무자비한 압제 속에서 자란 여동생이 이미 유인원이 되어 있었다는 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닌자의 꿈은! 끝나지 않아!
읍참마속(??馬?)의 심정으로 바로 여동생, 아니 침팬지의 머리통에 정권을 내질렀다. 물론 신체를 단련하지 않았던 상태였으니 데미지는 극히 낮았다.
으에엥~! 아빠~!
이후 파워드 고릴라에게 엉망진창으로 맞았다. 솔직히 지금도 내 잘못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의 꿈을 비웃는 행위는 중범죄니까. 그래도 유인원에게 감정적으로 대처한 내 잘못이 크다.
“오르페, 네가 인간이라 정말 다행이다.”
결과적으로 난 깨달음을 얻고 성장했고, 결국 탈주닌자가 되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그 의무를 다할 뿐이다.
“닌닌.”
완전히 곯아떨어진 오르페를 뒤로하고 닌자탈의법으로 옷을 벗었다. 효율적인 살인 근육으로 무장된 내 몸은 욕계의 주인인 제육천마왕도 가볍게 실금할 정도.
“이날, 이때만을 기다렸다.”
오큘의 가죽을 팔아 얻은 닌자슈트를 닌자착의법으로 입었다. 이름 모를 옷감으로 만들어진 검은 슈트는 가볍고 신축성이 뛰어났다. 무슨 무슨 마탑에서 대량생산에 성공해 시장에도 풀린 질 좋은 옷감이라며 비싸게 샀는데 확실히 뛰어나다. 우선 쫄쫄이 같은 게 아니라 도복같이 폼이 나는 천 비슷한 재질이 득점 포인트다.
오르페에게 들어본 바로 마탑은 마법사라 불리는 음양사 짝퉁들이 운영하는 거대 기업체인데, 세력이 강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 왕실에서도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고 한다. 탈주닌자의 장비는 언제나 완벽해야 한다. 이렇게 좋은 물건을 만들어 준 게 약간은 고마웠다. 물론 녀석들이 자본주의 야쿠자라면 용서치 않는다.
싸게 산 검은 두건을 얼굴에 둘렀다. 완벽한 닌자매듭으로 얼굴을 감싸는 두건. 싸구려라 그런지 텁텁하지만 못 쓸 정도는 아니다. 이제 몇 가지의 무기를 챙길 차례다.
아쉽게도 수리검을 파는 상점은 없었다. 미개한 판타지 세계는 닌자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아 닌자도구에 대한 의식이 전무했다. 그냥 교관들이 쓰던 비수를 슈트에 수납했다. 이로써 탈주닌자가 완성됐다.
“탈주닌자 신노빈. 출동.”
여닫이 창문을 열고 기어서 지붕 위로 올라갔다. 시장의 조명등조차 꺼진 야심한 밤. 큰 주택이 시야에 포착됐다. 마르톨란 영주였던가. 소문에 의하면 평범한 영주였다. 하지만 진실은 식사 시간의 노가리로 밝혀지지 않는다. 피와 땀을 머금은 주먹만이 진실에 다가갈 여지를 준다. 과연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휴먼일까, 아니면 정치 야쿠자일까?
“닌닌!”
상권이라 그런지 건물이 많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뛰어다니며 도시를 활보했다. 당연히 뜬그림자 상태라 내 모습이 보일 일은 없었다. 5분 정도 뜀박질을 하니 영주의 집 앞에 도착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냥 졸부의 중세시대풍 별장 같았다.
토숏!
닌자 점프로 가볍게 울타리를 넘었다. 당연히 소리 없이 착지했다. 둘러보니 작은 램프를 들고 다니며 순찰하는 경비들이 꽤 보였다. 나름 치밀하게 행동 패턴을 정해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마법결계가 있는지 확인하며 천천히 움직였다. 괜히 뭣도 모르고 들어가다 ‘칫, 결계인가’ 하며 나오면 존나 멋 떨어진다.
대머리와 싸우면서 깨달았다. 마법 또는 마법 도구는 위험하다. 동급의 상대와 생사가 걸린 싸움을 할 때는 그런 비장의 한 수가 승부를 가린다.
그래도 난 운이 좋게 마법적 조치가 된 물건들을 육감으로 감지하는 게 가능했다. 오르페에게 물어보니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은 드문 모양. 완벽한 탈주닌자의 자질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상 무.’
다행히 결계는 없었다. 촌구석의 영주라도 암살위협은 있을 텐데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셈이다. 마르톨란 영주는 위기의식이 부족한 바보거나 돈이 없는 거렁뱅이가 틀림없다.
창문은 내리닫이 창문이었다. 위로 슬쩍 올리고 나비처럼 침투했다. 고요한 게 다들 꿀잠을 자는 모양이다. 이렇게 큰 집에서 가족들이랑 시종 몇 명만 데리고 사는 건가? 공간의 낭비다.
까치발로 집의 모든 방을 확인했다. 일단 가구들이나 책상 서랍 전부 뒤졌다. 특이한 건 없었다. 사람들의 얼굴도 확인했다. 인간으로 변장한 요괴가 있을지도 모른다.
영주와 영주 아내, 딸 두 명, 아들 하나, 시종 다섯. 이상 10명의 사람 전부 특이사항이 없었다. 금고 같은 게 있긴 했지만, 아직 선악 파악도 안됐는데 돈을 훔칠 순 없다. 정치 야쿠자인 게 확인되면 그때 가져가도 늦지 않다. 영주의 방에 들어가서 밀실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벽을 두드렸다.
통통.
딱히 없다. 바닥은?
텅텅.
무언가가 있다?! 이 십새끼 잘 걸렸다.
바로 카펫을 치우고 바닥을 들어내 작은 공간을 발견했다. 이상한 책들이 10권 정도 들어 있었다. 표지에 아무 그림도 없고 원문에도 글자만 가득한 거로 보아서 수상한 금서가 틀림없었다. 요괴를 부르는 마도서 같은 건 아닐까? 뭐가 됐든 일단은 전부 압수다. 글씨를 모르니 일단 챙겨서 오르페에게 보여줘야 한다.
쓱싹.
챙겨온 보자기에 전부 싼 다음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코코넨네.
집에 도착하니 오르페는 마침내 야쿠자들이 펼치는 학살극의 악몽에서 벗어나 고른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꿈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는 날도 있을 거다. 그때가 되면 자면서도 웃을 수 있겠지.
그렇다. 살아야 한다. 살아남는 자가 희망의 싹을 틔운다. 나의 소명은 단 하나. 최대한 무고하고 죄 없는 생명을 구해 세상에 낙원을 구현하는 것이다. 돈 많고 힘 있는 자들은 알아서 몸보신을 잘하니 굳이 챙겨줄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어떤가. 가진 게 몸뚱아리뿐인 그들이 지나가던 뽀삐에게 물려 중상을 입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물며 뽀삐가 아닌 야쿠자, 사무라이, 요괴에게 걸린다면? 야쿠자는 백성을 금품을 갈취할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사무라이에게 백성은 새로 산 칼을 시험할 때만 사용하는 도구다. 요괴에게 백성은 한 끼 식사에 불과하다.
탈주닌자는 이 모든 악을 죽여 없애면서 어둠 속에서 백성을 섬긴다. 폭력을 폭력으로 제압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따지며 폭력의 연쇄를 거론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난 파괴와 살육으로만 구할 수 있는 생명도 있다 진심으로 믿는다.
“닌닌.”
대충 하늘을 보니 아직 아침이 되기는 먼 거 같다. 한숨 자야겠다.
빠르게 닌자탈착의법을 써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평소에는 내가 침대에서 자고 오르페는 땅바닥에서 대충 이불을 깔고 잔다. 하도 오르페가 피곤해 보여서 침대로 옮겨준 게 갑자기 후회된다. 땅바닥에서 자는 건 후보생일 때만으로 충분하다.
대충 오르페를 굴려서 구석으로 밀어 넣고 옆에 누웠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잠이 바로 안 와 닌자수면법으로 잠을 청했다.
‘지붕을 넘나드는 닌자가 하나, 지붕을 넘나드는 닌자가 둘...’
바로 잠들었다.
***
“닌자기상법!”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자세를 잡았다. 화들짝 놀란 오르페가 바닥에 옷가지들을 떨어뜨렸다. 어제 입었던 옷들을 세탁하고 가져왔나 보다.
“까, 깜짝 놀랐잖아.”
“쑈리.”
닌자는 오지에서 긴장을 풀고 자면 절대 안 된다. 침대에서 나와 외투를 입었다. 오르페가 고개를 돌린 후 물었다.
“어제 있잖아.”
“닌?”
“왜 침대에 같이 누워 있었던 거야?”
하긴, 뭔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상황이긴 하다. 그래도 비명을 지르면서 날 깨우지 않았다는 거에서 가산점을 줘야겠다. 닌자의 잠을 함부로 깨우다간 칼침을 맞을 수도 있다. 그녀의 신중함이 그 생명을 구했다. 오르페에게 저녁의 술자리부터 내가 영주집에 염탐하고 온 상황까지 설명했다.
“영주의 집에 혼자 들어가서 책을 가져왔다고? 그게 가능해?”
“닌닌.”
“...역시 대단하네. 아무리 남작가라 해도 침투가 쉽지 않을 텐데. 그 책들은 어디 있어?”
그녀에게 어제 얻은 10권의 책들을 보여줬다. 받자마자 그녀가 눈가를 찡그리는 걸 보니 금서가 분명하다.
“슬기로운 부부의 성생활백서, 남자가 쉽게 고개 숙이지 않는 방법, 오래가는 행복... 음란한 몬스터 하녀? 이거 새튼 씨 작품인데?”
“아니, 그게 대체 뭔데?”
“아무래도 성생활 도움서나 외설적인 소설 같은데...”
"이 씨발."
그만 정신이 깜깜해졌다. 좆같네 진짜. 아무래도 빨리 글자를 배워야 할 거 같다.
* * *